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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2021년 11월 4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습니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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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제1독서
로마 14장 7-12절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화답송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복음
루카 15장 1-10절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가롤로처럼 형제들을 충실히 섬기며 온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1월 4일 (목)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1월 4일 (목)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크게 기뻐하고 웃어 본 때가 언제인가요?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던 순간은 기억나지만 기뻐하고 크게 웃었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복잡하게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에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마음보다, 나한테는 왜 그런 기회와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지 비교하게 됩니다. 때로는 식탁에서 ‘아재 개그’를 하는 선배 신부님의 천진함이 부럽기도 합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으며,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기뻐하셨을까요?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을까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며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잃었던 양과 은전은 바로 우리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우리, 자신의 고집과 욕심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잊고 살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 안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예수님의 꿈 안으로 회개하여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우리를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회개와 용서에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시기와 질투로,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나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또한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에 우리도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맞이하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떤?
오늘 주님의 비유는 한 사람도 소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잘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아흔아홉을 놔두고라도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시고, 그래서 한 마리를 찾을 때 그것이 큰 기쁨이시라는 말씀이니 내가 그 한 마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유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이 눈물나도록 고맙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마리가 아니라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하느님의 사랑이 오히려 불만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루카 복음은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되찾은 양의 비유는 루카 복음만이 아니라 마태오 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여러 가르침 중에 하나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데 비해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죄인들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 비유를 드십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까지 드시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드십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은 한 마리 양을 잃은 길 잃은 양이라고, 그러니까 한 마리 양이 잘못하여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하는 데 비해 루카 복음은 당신과 공동체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귀책사유가 길 잃은 양에게 있기보다 양을 잃어버린 공동체에 더 있다는 얘기이고 그들을 단죄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하느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존재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 죄인이고 다 심판받아야 할 존재들인데 공동체 지도자들이 자기들은 죄인이 아닌 양 단죄하고 내쫓음으로써 길잃은 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자매님과 얘기를 나누는 중에 옛날 저에게 같이 양성을 받은 자매가 신천지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재속 프란치스칸이 이단에 빠질 수 있는지!
재속 프란치스칸이 이단에 빠진 것은 분명 잘못된 길을 간 것이고, 그의 책임이 없는 것 아니며 그것은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공동체, 사랑이 있는 공동체라면 미성숙한 양의 일탈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미성숙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길을 잃으면 미성숙한 아이의 책임이기보다는 아이를 잘 보지 못한 부모의 책임이라는 책임감을 느끼고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양이 더 나오지 않도록 아흔아홉 마리 양을 잘 돌보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사랑이 있다면 주님처럼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설 것이고, 찾았을 때 더 없이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리가 길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공동체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다 잃을 것입니다.
한 마리가 공동체를 떠나도 기도하지 않고 쇄신하지 않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쫄딱 망하고 말 것입니다.
길잃은 이웃에 대해 나는 어떠한지,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돌아보게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한 자가 바라는 단 한 가지 : 임마누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사가의 ‘회개’의 이해를 엿보게 해줍니다. 본래 회개란 ‘행복’의 방향이 변하는 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행복인 줄 알았다가 이 욕구들과 반대되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내가 하느님을 나의 부모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녀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도 ‘기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의 행복’이 ‘하늘의 행복’이 되게 하는 것이 루카 복음의 회개입니다. 나의 행위를 통해 하늘이 기뻐하는 것 때문에 나도 기쁘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였다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동전 하나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시 자신을 당신 것으로 삼아주는 것입니다. 당신만 옆에 있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으로의 회귀가 바로 회개입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다 성장한 의붓딸 미스티가 한 깜짝 선물에 아빠 라이언이 눈물을 쏟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선물 봉투를 줍니다. 겉에는 편지가 쓰여 있습니다. 가족들은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울 것 같다면서도 읽습니다.
“아빠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남자란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저를 키워주셨죠. 그리고 5학년 때는 사인을 위조하다 걸린 사고뭉치였죠. 처음으로 함께 록 콘서트에도 가고요.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함께 해왔고 그게 바로 아빠인 셈이죠. 아빠 없는 제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이 편지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이 못생긴 상자를 열어보세요.”
이미 이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의붓아빠에게 딸이 여러 선물과 함께 넣어서 내민 것은 하나의 쪽지였습니다. 아빠는 그 쪽지를 보고 흐느낍니다. 그 쪽지는 딸 미스티가 수십 년간 자신을 길러준 라이언이 법적으로도 ‘아빠’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입양신청서’였습니다. 아빠는 말은 안 했지만 흐느끼며 “난 이날만 기다렸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미스티는 그토록 바라던 아빠의 성을 자신의 이름에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청한다면 아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임마누엘’이 되어달라는 우리의 청원일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고 그분은 우리가 그것만 바랄 때 모든 것을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회개하면 누구처럼 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니 어린이처럼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본능적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그것을 청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임도 압니다.
유튜브 ‘터치터치’란 채널에 ‘마지막 순간에 네 살 딸이 부모님께 전해준 말’이란 제목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생후 육 개월부터 급성 급성 폐렴을 앓다가 네 살에 죽음의 위기를 겪는 여자아이와 부모의 절박한 대화 내용입니다. 아이는 말합니다.
“나 살아있어요.”
“물론이지.”
이 말을 부모님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저 괜찮은 거 맞죠?”
“당연하지!”
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분명 건강해져서 집에 가고 싶기도 한데 죽음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는 죽기 직전임에도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부모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직 자신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모에겐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잠시 기도를 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말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는 더 사랑해.”
“아빠는 네 곁에 있을게.”
드디어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이 가장 원하고 부모도 기뻐할 것을 청합니다.
“엄마 제 옆에 계속 있어 줄 수 있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 하나는 그저 부모가 자신의 옆에 있어 달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원하고 부모가 가장 원하는 한 마디입니다.
아이는 다시 부모님을 걱정합니다.
“아빠, 엄마. 울고 있어요?”
“아니야, 이젠 안 울어.”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말합니다.
“제가 괜찮아질 거라 믿어요.”
아이는 자신이 괜찮아지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다시 숨을 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괜찮아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숨이 찬데도 큰 소리로 말합니다.
“저 괜찮아지고 있어요!”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아이는 죽기 직전임에도 하는 모든 말이 부모의 뜻에 맞는 말만 합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쁨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말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것이 자신 안에서 다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믿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는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건강을 회복하여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내가 잃은 양 한 마리이며, 잃어버린 동전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무엇이 주님과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아는 것.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달라고 청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고 나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것임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것만 청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다 잘 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한 삶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파란 고추와 빨간 고추가 다른 나무에서 자란 것이 아니다.
장을 보러 가면 여러 종류의 고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는 빨간 고추와 파란 고추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솔직히 이 고추가 각기 다른 나무에서 달리는 줄 알았습니다. 도시에만 살았던 저였기에, 또 한 번도 고추를 키워보지 않았기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중에야 밭에 심은 고추 모종이 자라 파란 고추가 열리고 점점 빨간색으로 익어가면, 그것을 따 말려서 고춧가루를 만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파란 고추와 빨간 고추가 다른 나무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 모두도 다른 나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좋은 나무에서, 악인은 나쁜 나무에서 창조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종, 나이, 직업, 지역 등으로 계속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라는 나무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창조되었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구분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데 방해를 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비록 나쁜 나무에서 나온 것처럼 옳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원래가 좋은 나무였기에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던 죄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이 와 닿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모두가 좋은 나무에서 창조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누구는 하늘 나라의 계산법은 1이 99보다 더 크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마음 씀씀이의 문제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당황스러움을 걱정해서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잃었던 은전의 비유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길잃은 죄인을 포기하실까요? 그 역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되돌리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 회개가 주님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이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두려움은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 U.G.크리슈나무르티
신중해야 합니다.
언젠가 조그마한 동네에 일주일 동안 휴가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시내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산과 강가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 사람처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환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휴가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걷고 있는데, 제 옆으로 자전거 한 대가 서더니 길을 묻습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저씨! 기차역이 어디예요?”자신 있게 “자전거 타고 이쪽으로 20분 정도만 가면 나올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큰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제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잘못 가르쳐 드렸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린 방향은 버스 터미널이었고, 기차역은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알려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루카 15,10)
양심과 회심 사이에 우리가 있다. 회개는 마음에 눈을 다시 뜨는 기쁨이다. 병든 마음이 다시 건강해지는 변화이다. 참된 기쁨을 알게되는 우리의 회개이다. 마음의 질서를 바로잡는 회개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회개가 참된 신앙이다. 하늘 나라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선택과 결정으로 더욱 아름답다. 회개하는 죄인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위선과 거짓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연결시켜주는 회개이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은 회개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잃어버린 기쁨 잃어버린 삶의 이유를 되찾아주는 회개의 기쁨이 있다. 회개를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우리의 참된 회개이다. 누구도 가로챌 수 없는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회개가 참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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