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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31주일 -
2021년 10월 31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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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신명 6장 2-6절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화답송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으시다. 주님은 당신 임금에게 큰 구원 베푸시고, 당신의 메시아에게 자애를 베푸신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제2독서
히브 7장 23-28절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복음
마르 12장 28ㄱㄷ-34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첫째 계명을 잊지 않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둘째 계명을 지키는 이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계명을 실천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10월 31일 (일)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1년 10월 31일 (일)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함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라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형식적으로 봉헌하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물을 봉헌하기만 하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신의와 하느님을 옳게 아는 것을 더 바라셨습니다(호세 6,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제물을 봉헌하고 전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계명보다 강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미사에 참석한다고, 주일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감사드릴지 생각하며, 만약 미워하는 이웃이 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함께’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다하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신명 6,3)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신명 6,6)
오늘 신명기는 거듭 명심하라고 그러니까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키 위해 우리는 간단한 것은 손바닥에다 적어 놓고, 수첩이나 비망록에 적기도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돌판에 새기기도 하지요.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참으로 한탄을 했던 것이 곳곳에 김일성 우상화 글귀, 곧 "우리의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글귀를 돌에 새겨놓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김일성을 마치 하느님처럼 여기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에 새겨야 할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고 모세도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계명을 그래서 돌판에 새긴 것인데 오늘 신명기는 그것을 돌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라는 것은 또한 머리와 생각 이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머리와 생각에만 있지 않고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그것을 모르기에 다른 것, 예를 들어, 돈을 더 중요시하다가 건강 상하고 인생 망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아는 것은 생활의 지혜를 넘어 인생의 지혜이며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이리 가야 할 것을 저리 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방향을 잡았기에 비로소 첫걸을 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걸음이란 그야말로 가야 할 걸음의 첫 번째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소중함을 알았다면 이제 사랑해야 하고, 그것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데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고 분심 곧 마음의 갈림도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갈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말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이 있다는 거지요.
이 분심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 알지만 욕망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여 마음이 갈리고 사랑이 갈리는 것입니다.
욕망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게 하지만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봉헌케 하고, 좋아하는 것 곧 소유물뿐 아니라 자신마저 봉헌케 하지요.
이것이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오늘 묵상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미 인준 회칙 23장)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이를 당신의 사랑으로 이끌고, 다른 이들의 선을 우리 것처럼 즐거워하며 불행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주의 기도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창조자만이 당신을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이 해답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다 지쳐서 ‘그냥’이라는 해답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중년에 들어서면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에 공허함도 느낍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답을 지금까지 명확하게 주는 인물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역사상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돈도 많고 힘도 세고 나라도 다 정복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영웅이 언젠가 징그럽게 생긴 훔바바(Humbaba)라는 괴물과 싸우게 됩니다. 물론 길가메시가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엔키두라는 친구가 죽습니다.
길가메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자신도 언젠가 죽을 운명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유명하고 성공하고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죽으면 다 의미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먼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고생하다 결국 어느 먼 곳에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아주 유명한 산신령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은 죽음을 초월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를 찾아간 길가메시는 그가 어떻게 불사신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우트나피슈팀이 대답합니다.
“나는 신들에게 잘 보여서 불사신이 되는 약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그것을 먹었더니 불사신이 되었소.”
길가메시는 “저에게도 그 약을 하나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약을 줍니다. 길가메시는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약을 놓고 연못에서 목욕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서 그 약을 훔쳐 가버립니다. 이 약이 없으면 죽음으로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데 뱀이 훔쳐 가버렸으니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가메시는 다시 우트나피슈팀에게 가서 약을 하나 더 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약은 한 번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길가메시가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합니까?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우트나피슈팀은 말합니다.
“그냥 집에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아라.”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길가메시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오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의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우트나피슈팀이 길가메시에게 주었던 그 약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들이 줄 수 있는 바로 그 약,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에겐 그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탄이라는 뱀, 혹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그 계명의 중요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또 그냥 생존 욕구대로 살아갑니다.
생존 욕구는 그저 태어날 때 생존을 유지하게 하려고 넣어진 욕구이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불사의 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약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대상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창조자만이 줄 수 있는데, 창조자가 아니시면 우리에게 그런 계명을 주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누구에게도 생존을 포기하라는 욕구를 줄 수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욕구를 주면서 자기까지 사랑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생존을 포기하라는 사랑의 욕구를 줄 수 없다? 일본 천황은 가미카제 특공대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천황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명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양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정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 자기가 창조하고 다시 생명도 줄 수 없는 이들을 자살로 내몰면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라면 그런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피조물에 다시 생명을 줄 수 없어서 자신이 피 흘려 창조한 무엇이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이용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라? 이것은 마귀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줄 수 있는 분들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창조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당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까? 항상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녀를 창조하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영약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삶의 의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약을 주신 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도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목숨을 바친 당신 자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이 계명으로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오직 창조자만이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영약을 절대 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래야 모든 삶이 의미로 가득 찹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레짐작은 서로 간 오해를 낳고 서로 힘들게 하는 시작점이다.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왕따를 시킬 수 있죠?”
어떤 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면서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에 직접 물어보았냐고 여쭤보니, 자신이 나타나면 시선을 돌리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직접 그 이유를 물었는지 여쭤보니, 자기들끼리만 따로 모임을 하면서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셨어요?”
직접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을 보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본 뒤에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고 했습니다.
며칠 뒤, 이분은 환한 미소를 띠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서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모두 풀었다는 것입니다. 눈치를 보는 자매님 모습을 보며 그 공동체 분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을 걸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눈도 잘 마주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사적인 모임이 갑작스럽게 생겨도 이런 자리를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십니다.
지레짐작은 서로 간 오해를 낳고 서로 힘들게 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을 낳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은 지레짐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나의 이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불신과 오해가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사랑은 점점 커져서 우리의 진정한 삶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길을 잃어보지 않고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
- 매튜 존스톤
여유있는 삶
일주일 중 이틀(화, 수)은 성지에 함께 생활하는 다른 신부님께서 성지 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이틀 동안 그중에 밀린 일들을 몰아서 하곤 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또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날도 이렇게 못다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불안했습니다.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한 주를 너무 바쁘게 보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글도 안 쓰고, 강의 준비도 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으면 음악을 들으며 책만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일 빈둥거리기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한 주를 그렇게 바쁘게 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따라 흘러가는 세상이기에 내 생각이 이루어질 확률은 너무나 낮습니다.
여유 없이 힘들게 살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여유 있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첫째는 이것이다. (마르 12,29)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마주하는 사랑의 주일이다. 첫째로 지켜야 할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있다. 사랑이 삶이다. 사랑을 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로 사랑을 뜨겁게 배우는 사랑의 여정이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하느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래서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된다.
사랑의 순간이 나눔의 순간이며 거룩한 순간이다.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을 만나는 것이 만남의 복음이다. 우리 사랑을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분또한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구원이다. 다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사랑을 채우는 것도 언제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우리또한 본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하기에 생명도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빛이 있다. 하느님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은 없다.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의 힘이다. 서로 사랑하는 내어주는 사랑만이 모두를 위한 살길이다. 첫째는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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