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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3.2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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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3월 26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창세 17,3-9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복음
    요한 8,51-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창세 17,3-9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으로 돌아가기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8,51-59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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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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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6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이름이 바뀌는 순간 시작되는 사명

성경에 나오는 개명 사건은 단순히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새롭게 정해지는 구원 사건입니다. 이러한 개명의 대표 사례가 바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브람 이야기입니다. ‘존귀한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이미 하느님 앞에서 귀하게 불린 한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존재가 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 구원 계획을 펼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응답이자 ‘믿음의 조상’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감추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개명으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름 하나를 새롭게 부르시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다시 한번 세상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결코 잊으시지 않고, 복을 내리시기로 한 이를 마침내 축복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에도 아브라함과 같은 개명 사건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세례명을 정하거나 받습니다. 어떤 세례명이든 하느님께서 저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을 그 세례명을 통하여 알려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세례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해 봅시다. 새 이름을 품고 길을 나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저마다 자신의 세례명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묵상 목록으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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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함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니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8,51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바퀴(영)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에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사랑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언제 비로소 하느님을 참으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아버지를 아는 것"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 8,55) 그러시면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는 나다." (요한 8,58)

여기서 '나는 있는 나다'는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에고 에이미(Ego Eimi)'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본성이 하느님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본성'을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숭이의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하루 종일 나무 위를 다니며 바나나를 까먹고, 본능적인 욕구에만 충실합니다. 그런데 그의 품속에는 위엄 넘치는 사자의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그 사진을 보며 "이분이 내 아버지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사자의 용맹함, 사자의 포효, 사자의 고귀한 기질은 전혀 닮지 않은 채 원숭이처럼 살면서 사진 한 장 가졌다고 사자를 아버지로 안다고 우기는 것은 기만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본성은 인간이거나 거의 짐승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본성은 자기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욕구는 본성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본성은 ‘두려움’ 속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이야기는 이 위선의 결말을 잘 보여줍니다. 어느 날 당나귀가 사냥꾼이 버리고 간 사자 가죽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것을 뒤집어쓰고 마을로 내려가 모든 동물을 겁주며 사자의 권위를 즐깁니다. 나중엔 자신이 정말 사자가 된 줄 알았고, 사자를 정복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들켜 귀를 잡히고, 사자 가죽이 벗겨지며 결정적인 순간에 사자의 포효가 아닌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내뱉고 맙니다. 우리가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만큼 거짓의 정체성 가죽이 벗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알아갈까요? 이것을 알면 됩니다. 아버지는 ‘다~’ 주신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영화 '닥터 지바고' (1965)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눈물겹게 보여줍니다.

예브그라프 장군은 조카인 타냐를 찾아냅니다. 타냐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를 잃고 거칠게 살아온 노동자 소녀였습니다. 예브그라프가 묻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언제 잃었지?"

타냐가 대답합니다.

"불이 났을 때요...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그날 밤이었죠." 예브그라프가 다시 묻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니?"

타냐는 고개를 떨굽니다.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뛰었는데... 제가 그만 아버지의 손을 놓쳐버렸어요. 군중 속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죠."

이때 예브그라프는 타냐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진실을 말해줍니다.

"아니, 타냐. 너의 아버지는 유리 지바고란다. 그는 위대한 의사였고 시인이었지.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라. 아버지는 절대로 딸의 손을 놓지 않는단다. 네가 무서워서 아버지의 손을 놓은 것이지, 아버지가 너를 버린 게 아니야."

자신이 그저 길거리에 버려진 이름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고결한 영혼을 가졌던 유리 지바고의 혈육임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전율합니다. 이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첫 발을 내딛습니다. 어쩌면 시를 쓰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출처: 영화 '닥터 지바고' 1965)

저도 성체를 영할 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다 주시는 분 앞에서 “당신은 하느님이시지만, 나에겐 하느님이라고 할 본성은 주지 않셨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렇게 다 줄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을 금지시켰습니다.

성경에서 이 정체성의 회복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서 계실 때,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도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마리아야!" (요한 20,16)

이 짧은 부름은 창세기의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던 그 권능의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이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같은 본성 안에서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의 영적 시력은 하느님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그녀는 즉시 "라뽀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고, 오직 하느님의 자녀만이 하느님을 스승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의 아버지가 같음을 선포하시며, 마리아를 '죽은 자를 찾는 여인'에서 '부활을 전하는 사도'로 재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된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의 본성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딸이라는 본성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요한 복음 20장)

우리는 내 정체성이 진짜 하느님임을 깨닫고,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하느님 능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 "어떻게 기적을 믿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원숭이 본성에 갇혀 사진만 구경하는 상태입니다.

서기 452년, ‘하느님의 채찍’이라 불리던 잔인한 정복자 아틸라가 훈족 대군을 이끌고 로마 턱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와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레오 대교황은 무기도 없이, 군대도 없이 홀로 아틸라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교황은 아틸라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보며 꾸짖었습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멈추시오!"

놀랍게도 그 잔인한 아틸라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습니다. 훗날 부하들이 왜 도망쳤느냐고 묻자 아틸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의 등 뒤에서 칼을 든 거대한 천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인간 레오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자의 위엄에 압도당했다."

레오 대교황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하느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제국을 구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출처: 체사레 바로니오, 『교회 사략』; 몬테소리, 『성인전』)

입으로만 아버지를 부르는 가식에서 벗어납시다. "아버지는 결코 내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고, 내 안에 감추어진 신적인 본성을 일깨웁시다. 진정으로 아버지께 “다~” 받았다고 믿고 고백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세상을 이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참 자녀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1950년대, 동물행동학자 니코 팀버겐은 갈매기 둥지에 ‘가짜 알’을 넣었습니다. 이 알은 진짜 알보다 더 크고 더 선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알이었습니다. 갈매기는 어떻게 했을까요? 이 가짜 알을 버렸을 것 같지만, 반대로 진짜 알을 버리고 품어도 아무런 결과를 낼 수 없는 가짜 알을 끝까지 품으려고 했습니다. 왜 이런 멍청한 행동을 할까요?

본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연에서는 ‘더 큰 알이 곧 더 건강한 새끼’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진짜 알보다 큰 가짜 알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본능이 자기의 진짜 알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습니다. 본능적으로 물질이 좋아하고, 풍요롭고 편안함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미움과 다툼을 만들었고, 물질만능주의의 생각으로 나의 이익만 있자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이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아도 떵떵거리며 잘 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나라에서도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살까요? 아마 땅을 치며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너그러울걸, 더 나눌걸, 더 사랑할걸….’ 이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기준이 아닌 하느님 기준으로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라는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영적 죽음인데,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생물학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자의 헛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고, 유다인들이 ‘우리의 하느님’이라 부르는 아버지에게서 온다고 명확히 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뜻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고, 그분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하고 완전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설명해도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요한 8,57)라고 말하면서 조롱할 뿐입니다. 유한한 시간의 틀에만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 유다인의 모습을 따를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현세적인 이익이나 세속적인 잣대로만 해석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래서 정작 내 삶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또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전환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분 뜻에 집중한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선물을 포장하고도 주지 않는 것과 같다(윌리엄 아서워드).

 

다른 말씀 묵상도 함께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요? 같은 현실 속에서도 누군가는 불가능만 보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가능성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여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쁨은 모든 것이 이루어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음을 알아보는 순간 기쁨은 더욱 구체화됩니다. 억지로 보려 하면 보이지 않고, 내려놓을 때 드러나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재입니다. 기쁨은 결과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미래를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 안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기쁨입니다. 이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의 날을 이미 오늘로 살아내며 기뻐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완성이며 삶의 가장 깊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완성의 참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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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8장 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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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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