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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3.2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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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3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50,4-7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제2독서
    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복음
    마태 27,11-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50,4-7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으로 돌아가기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필리 2,6-11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말씀 요약 보기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27,11-54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총독이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2 ○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14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18 ○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20 ○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 군중이 대답하였다. ◎ “바라빠요.”

22 ○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 군중이 모두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3 ○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4 ○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25 ○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26 ○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27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28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29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며 조롱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30 ○ 군사들은 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33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34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37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39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40 이렇게 말하였다. ▣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42 ▣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43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44 ○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48 ○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였다. ▣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50 ○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51 ○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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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9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49

✚ 강론시작 13:4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환호 속에 숨겨진 슬픔

오늘 전 세계의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푸른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치며 행렬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순간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당시 군중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새로운 임금께서 오신다고 믿으며 열광하였지만, 그 환호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깊은 근심에 잠겨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이유는 “호산나!”를 외치던 이들이 곧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마주한다면 그분께서는 어떤 표정이실까요?

기도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삶에서는 내 뜻을 앞세우고, 성당 안에서와 밖에서 모습이 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알면서도 미워하고 질투하며, 내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기에 배반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분을 알면서도 때로 외면합니다.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하며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체험하는 때이며, 십자가 희생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또한 부활을 준비하는 영적 정화의 기간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욕심을 비우며 마음을 새롭게 하여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도록 초대받는 때입니다.

이번 한 주간만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냅시다. 우리의 작지만 진실한 실천으로, “호산나!”의 외침이 주님 마음에 참된 기쁨으로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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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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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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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고통 속에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는 <수난주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반면,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성지주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들고 성당에 들어와,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사를 듣습니다.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됩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를 환호하는 기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난과 죽음으로 치닫는 비탄이 흐릅니다. 환영의 행렬은 곧바로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손을 흔들던 환호의 성지가지는 등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등위에 타셨던 분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에 따른 우리 주님의 수난기’입니다. 이 ‘수난사’는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그 군중들이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배신과 욕설로 마무리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을 더욱더 처참하게 만듭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하루 밤 사이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리옷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넘겨버리고,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붙잡힐 때는 옷마저 벗어던져버리며 달아나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노리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관은 서로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예수님을 심문하고 박해하며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군중과 모든 적대세력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절대극명의 위기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26장 마지막 장면인 베드로의 배반 장면(26,69-75)만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이 거듭될수록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하다가(70절), 다음에는 맹세까지 하고(72절), 급기야는 거짓이면 천벌까지 받겠다고 극구 부인합니다(74절). 결국, 그는 단지 예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인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는 가르침도 따르지 않습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대사제의 추궁에도 맹세하지 않고 담대하셨는데 말입니다(26,63-64).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비닐이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원의 카이로스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는 그의 무지와 불신에 광명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닭 울음’은 어리석음에 갇힌 그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영혼의 귀를 뚫고 내리는 청천벽력의 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불신과 의혹,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서 버렸습니다. 그의 울음은 단지 죄에 대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거짓과 비겁함에 대한 울음도, 혹은 스승을 배신한 불효나 불충에 대한 울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75절) 하는 성령의 ‘죽비’요 ‘할’이었습니다. 닫힌 가슴을 헤치고 들어오는 주님 말씀의 광채요 섬광이었습니다. 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깨우치는 빛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먼저 베푸신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의혹과 불신에 휩싸여 배신했어도 바로 그러한 그를 끝까지 믿고 희망하신, 그분의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었습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2-32)고 하신, 비록 넘어졌지만 결코 희망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명을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지고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빛나는 울음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당신 사랑에 대한 거절이었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었습니다. 그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지만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을 관상하며 기쁨의 거룩한 울음을 울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 사랑하십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하고 변덕스러워도 당신은 그러한 저를 끝까지 사랑하시니, 주님 사랑 받들게 하소서.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더더~ 저를 믿으십니다.

저의 믿음 약하고 미진하여도 당신은 저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제가 구원되오니, 주님께 의탁하게 하소서.

주님 희망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 희망하십니다.

저의 희망이 그릇되고 빗나가도 제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고 기다리오니,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응답의 장소요 공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 곁에 교만한 사람이 많다면 당신이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며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의 문을 엽니다. 오늘 전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방금 전까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하던 군중의 함성이, 잠시 후 수난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서슬 퍼런 증오의 비명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이 변덕스러운 군중을 비난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장면의 본질은 군중의 변덕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택하신 '입성의 방식'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정복자가 아니라,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태 21,5)

왜 하느님이신 그분은 이토록 낮은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교만'을 치료할 유일한 약이 오직 '겸손'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믿는 병이고, 겸손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가는 십자가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자아라는 더러운 겉옷을 벗길 수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단단한 바위는 정으로 때려 부수려 할수록 더 강하게 저항합니다. 타인의 교만을 꺾어보겠다고 논리로 이기려 하거나 힘으로 누르려 하면, 상대의 자아는 더 단단한 갑옷을 입습니다. 오직 겸손만이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대 지혜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오만한 왕이 자신의 행차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왕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칼과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게 했지만, 칼날만 부러질 뿐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좌절하고 있을 때 한 현자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대왕이여, 바위를 때리지 마시고 그 밑으로 물을 흘려보내십시오."

현자는 바위틈과 그 주변 흙 밑으로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물은 바위를 지탱하던 바닥의 흙을 야금야금 깎아내며 바위 밑으로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결국 바닥이 허물어지자, 그 거대한 바위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굴러떨어졌습니다.

겸손은 이 물과 같습니다. 상대의 자존심 밑으로 흐르며 그 마음의 뿌리를 적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귀를 타고 상대의 발밑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상대의 완고한 교만은 쓸려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 겸손의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바로 옆에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빈민가 학교에 부임한 레비 소프(Levi Thorpe) 교사의 실화는 더 구체적인 감동을 줍니다. 그의 반에는 '짐승'이라 불리는 열 살 소년 케빈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았고, 친구들을 때리는 것은 물론 선생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징계와 체벌은 아이를 더 난폭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소프 선생은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교실 문 앞에 서서 케빈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타나면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케빈의 풀린 신발 끈을 직접 묶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처음엔 "더러운 손 대지 마!"라며 선생님의 어깨를 발로 찼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의 발치로 내려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선생님이 신발 끈을 묶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자, 케빈이 갑자기 선생님의 목을 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도 누가 제 발 앞에 무릎을 꿇어준 적이 없었어요. 저 같은 놈도 사랑받을 수 있나요?"

겸손이 거울이 되어 케빈의 난폭함 속에 숨겨진 상처와 교만을 비추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더러운 겉옷을 벗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시카고 트리뷴 교육 칼럼, 미담 재구성)

성인들의 삶은 당연히 겸손의 삶입니다. 겸손의 삶이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을 시기한 한 신부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비안네, 당신은 신학 지식도 부족하고 교회의 수치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거나 분노했겠지만, 비안네 성인은 고해소의 낮은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장을 썼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당신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무식한 죄인입니다. 저처럼 부족한 자를 참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의 실체를 일깨워 주신 형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겸손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부끄럽습니다. 이 답장을 받은 신부는 전율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압도적인 겸손'이 거울이 되어,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추악한 시기와 교만을 적나라하게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부님을 찾아와 발치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겸손 앞에서 제가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이 교만한 줄도 모르고 날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발밑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그 거울이 되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트로슈,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나의 겸손으로 타인의 교만이 죽는다면, 그렇게 나의 나귀 밑에 그들의 겉옷이 깔린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내가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 26,33)

이것은 자기를 믿는 극도의 교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말싸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 그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의 교만 앞에서 겸손의 거울을 들이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그 눈길과 마주칩니다. 그때 베드로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단죄하는 판사의 눈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던 그 겸손한 스승의 눈이었습니다. 그 겸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추악하고 나약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거울 때문에 무너져 내렸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그 통곡의 눈물이 베드로의 교만했던 겉옷을 다 적셔 벗겨내었고, 그는 비로소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순종으로 그런 겸손한 제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겸손해질 때,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를 참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가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이렇게 명확히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되신 것은 여러분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으나, 그 길은 오직 주님이 걸으신 겸손의 길뿐입니다."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18, 15).

또한 그는 강조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그 건물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기초가 겸손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Sermo 69, 2).

이번 성주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나귀를 타고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이웃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어줍시다. 내 자아를 꺾어 타인을 살리고, 원수를 친구로 바꾸는 이 겸손의 신비가 바로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부활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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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아주 친한 두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처럼 살면 행복한데, 왜 힘들게 서로 싸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우연히 들은 다른 수사가 빵 하나를 내밀면서 “이 빵을 서로 갖겠다고 해봐. 아마 사람들의 싸움을 이해할 수 있을걸?”이라고 말합니다.

수도승 중 한 명이 먼저 “이 빵은 내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다른 친구 수도승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네 거 맞아. 너 먹어.”

이런 상태에서 과연 싸울 수 있을까요? 욕심과 이기심으로 싸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욕심과 이기심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대 후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으면 뜻밖의 결과에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깔면서 ‘호산나’라 외치며 환호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환호가 며칠 뒤에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그 내용을 오늘의 수난 복음에서 분명하게 봅니다.

이런 군중의 변화에 커다란 아픔을 느낍니다. 환호하던 그들이 이제는 죽이라고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은 로마 황제나 임금이 입는 자색 옷 대신 ‘진홍색 외투’를 입히고, 왕관 대신에 가시관을 씌웁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예수님께 욕을 퍼붓고, 여기서 더 나아가 뺨을 치고 침을 뱉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런 군중의 변화는 왜일까요?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기들만 구원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러나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런 거짓 고발과 조롱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거룩하고 자발적인 순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라고 외치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원망이나 절망의 외침이 아닙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이라 부르며, 처절하고 완벽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우리는 성주간을 맞이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고, 부활의 영광을 향해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결단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이 되십시오.

 

오늘의 명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밖에 없다(루스벨트).

 

다른 말씀 묵상도 함께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환호와 배신, 영광과 고통이 십자가에서 함께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통치 방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함 속에서도 변명하지 않으시고 다투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끝까지 관철되는 자리입니다.

편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자리에서 머무르는 힘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고통을 피하는 선택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은 패배처럼 보이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부정합니다. 환호 속에서도, 조롱 속에서도, 예수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환호에서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만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붙잡지 않기에 흔들리지 않고, 피하지 않기에 왜곡되지 않습니다. 우리 손에 든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성주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십자가이며 내려올 수 있음에도 내려오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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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27장 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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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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