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다니 3,25.34-43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복음
마태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다니 3,25.34-43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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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감사가 열어 주는 용서의 문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세 마디만 건넨다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밥 도!”, “아는?”, “자자!” 저도 경상도 남자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분명 자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표현이 있지 않나요? 혹시 ‘고마워.’ ‘미안해.’ ‘이해해.’ ‘용서해.’ 아닌가요? 감사하는 마음, 미안해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가 늘 기억하고 자주 표현해야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용서에 관하여 예수님께 여쭙니다. 용서의 횟수를 헤아리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참된 용서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주인에게 큰 빚을 탕감받고도 감사할 줄 몰랐던 종은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괴롭힙니다.
만일 그가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다면, 자신이 갚지 못한 채무에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고, 동료의 사정 또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동료에 대한 용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감사해하지 못하면, 미안함도 느끼지 못하고, 이해도 닿지 않으며, 끝내 용서에 닿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힘들다면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요?
마음의 표현이 서툴거나 적은 사람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표현하는 법을 익힐 기회가 적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어색하고 낯설더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표현해 보기를 바랍니다.
감사하기! 사과하기! 이해하기! 용서하기!
감사하고 사과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그 하루는 이해와 용서가 가득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음
과거의 저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든 다음 용서하려고 애썼습니다. 애초 죄인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용서하려고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사람들을 그렇게 죄인으로 만들었을까요? 교만했기에 다시 말해서 제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만 했을 뿐 아니라 요구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려면 이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느냐고, 불만하고, 불평하고, 바뀌라고 요구했던 것이고 요구했던 대로 바뀌지 않으면 미워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음. 그러니 이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밴댕이 소갈딱지만 한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그런 마음은 아예 깨져야 하고 아주 박살이 나야 합니다. 오늘 아자르처럼 영혼이 부수어지고 정신이 겸손해지면 진정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해져 용서해 줄 내가 아니라 용서를 청하고 받아야 할 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용서받아야 할 내가 감히 누굴 용서해줄 수 있으며, 베드로처럼 몇 번 용서해주면 되겠냐며 입을 나불거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한 번만 간신히 용서해줄 생각으로 용서의 번 수를 따지는 마음으로는 번번이 용서에 실패하고, 오늘 주님 가르치심대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를 지었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인데 그 죄를 용서받았기에 이제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용서하게 되지 않는 사람을 의지적으로라도 용서하려는 마음도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보단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혼이 부서지고 정신이 겸손해져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사람, 그 사람이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용서해야 하는 이유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 올바른 관계맺음의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참으로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입니다. ‘만약 상대가 회개하거나 용서를 청하면’이라든지 혹은 ‘상대가 준비가 되면’이라든지 같은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용서를 적당히 하거나 알량한 선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셔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무색해지고 말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넘겨준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다윗, 성범죄를 지은 막달레나,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바오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용서했으며, 그래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사실,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바로 그 용서의 심연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먼저 자신을 용서할 때 타인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머리로 하거나 동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 말씀은 용서받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적으로 용서를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8,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방법을 쓰면 내 입에서 비난이나 험담이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제3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1만 탈렌트라는 우주적인 액수를 탕감받고도 고작 100데나리온 때문에 동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둔 종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종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나쁠 수 있을까?"라고 혀를 찹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히 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라는 자비의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한 영적 부적응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비난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지킬 수 있을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농도가 있습니다. 이를 자비의 임계점이라고 부릅니다. 가정은 아주 많이 자비로워야 유지되는 곳이고, 하느님 나라는 자비 자체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자비가 산소처럼 흐르는 나라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독가스를 뿌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임금이 그 종의 용서를 취소하고 형리에게 넘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잔인한 복수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방역입니다. 자비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자비라는 바이러스가 온 나라에 퍼져 다른 백성들의 행복까지 갉아먹지 않도록, 확진자를 격리하는 조치입니다. 내가 타인의 잘못을 끄집어내어 떠들고 용서하지 못할 때, 사실 나는 하느님의 방역 당국에 "저는 자비의 나라에 살 자격이 없는 감염자입니다"라고 스스로 신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럽 수도 생활의 기틀을 세운 성 베네딕토는 그의 『수도 규칙』 제28장에서 이 방역의 원리를 아주 안타까운 심정으로 설명합니다. 수도원에서 끝내 회개하지 않고 형제들을 비난하며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형제가 있을 때, 원장은 현명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장은 먼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를 훈계하고 기도하며, 몰래 지혜로운 형제들을 보내 그를 위로하고 자비로 감싸 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끝까지 자신의 무자비함을 고집하며 공동체에 독을 퍼뜨린다면, 베네딕토 성인은 원장에게 눈물을 머금고 수술 칼을 들라고 명합니다. "한 마리의 병든 양이 온 양 떼를 전염시키지 않도록 그를 잘라내야 한다." 이것은 그 형제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남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살리기 위한 목자의 어쩔 수 없는 결단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왜 1만 탈렌트의 자비를 입고도 100데나리온에 눈이 멀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허물이 보일 때마다 영적 센서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아, 내가 지금 20조 원의 탕감 영수증을 찢으려 하는구나!' 이 기억이 희미해질 때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멱살을 잡게 됩니다. 알아도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대학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당시 르완다는 국민의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0일 만에 8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웃의 손에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성당에서 나란히 앉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이들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의 멱살을 잡고 칼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웠고 분명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내 이웃이 하느님이 탕감해주신 소중한 형제라는 기억보다 당장의 정치적 선동과 증오라는 욕망에 굴복했습니다. 자비의 임계점을 스스로 무너뜨린 그들은 결국 그토록 평화로웠던 공동체를 지옥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기억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릴 때, 인간은 얼마나 잔혹한 방역 대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실화입니다.
결국 신앙의 핵심은 ‘기억’입니다. 비난의 유혹이 폭풍처럼 몰아칠 때, 우리 영혼을 잡아줄 기억의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성인들은 감정이 폭발하려는 찰나, 주님의 자비를 강제로 떠올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가동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가슴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본래 불같은 성격을 타고났습니다. 비난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그는 옷 속에 품은 날카로운 금속 십자가를 손으로 꽉 쥐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가슴에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 통증을 통해 그는 강제로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예수님이 20조 원을 들여 살려낸 이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내가 저 멱살을 잡으면 나를 살리신 저 십자가의 주님이 다시 피를 흘리신다!'
피를 흘리는 육체적 고통을 써서라도 주님의 자비를 기억해내려는 처절한 의지였습니다.
모든 성인이 이와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예수님의 가면 기법입니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마음이 들 때, 상대의 얼굴 위에 겹쳐진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얼굴을 상상하려 노력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험담을 시작할 때, 바로 내 옆에서 그 이야기를 슬픈 표정으로 듣고 계시는 예수님의 반응을 상상했습니다. 모두가 이런 식입니다. 한 번에 되는 것은 없습니다. 습관이 덕이 되고 덕이 본성이 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경고했습니다.
"하느님께 1만 탈렌트의 자비를 입은 우리가 형제의 100데나리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임금이 아니라 가장 엄격한 채권자로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비난하고 싶을 때, 그것은 내 영혼의 산소가 떨어졌다는 신호입니다. 그때마다 멈추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자신이 세워 놓은 방법을. 가장 좋은 것은 그 이후에 보게 될 심판관이신 예수님 얼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피 흘리는 의지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가장 행복한 상속자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많은 이가 애완견을 키웁니다. 그런데 왜 키울까요? 예전에는 개를 키우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도둑 들어올 것을 걱정해서 개를 키우기도 했고, 또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사실 이 애완동물이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습니다. 또 나의 일을 대신 해 주지도 않습니다. 나의 일만 늘어납니다. 시간 맞춰서 밥을 줘야 하고, 산책도 시키고 같이 놀아주기도 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때 되면 예방접종까지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족처럼 생각하고 좋아합니다.
아마 내 기분과 상관없이, 또 내 성취와 상관없이 주인이라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상처 준 말을 마음에 담지도 않고, 또 복수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아할 뿐입니다. 자기가 받은 사랑만큼만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애완견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법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성취와 상관없이,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할 수 있는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나 나를 좋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늘 이유를 붙이면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세상의 기준을 더 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랑받을 수 없으며, 특히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교 랍비는 3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일곱 번은 나름대로 관대함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횟수 세는 것 자체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무제한적이고 완전한 용서, 용서를 계산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임금이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줬는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매정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만 탈렌트는 한 국가의 1년 예상 이상의 액수로 천문학적인 돈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 죄의 크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100일 치 임금으로, 적지 않아도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웃이 나에게 지은 죄(잘못)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의 크기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주님의 자비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동료의 작은 잘못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탕감받은 것을 오히려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은총 안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은총의 열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않는 삶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싸우지 않는 대화의 첫걸음은 상대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야마사키 히로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은총의 경험을 잊고 다시 이익의 논리로 돌아가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사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조건 없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자비의 삶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보이지 않는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렇듯이 우리의 삶은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은총을 깨달은 사람은 빚을 따지지 않고, 받은 은총을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 그 빚을 없애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빚을 탕감하는 은총입니다. 용서를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탕감은 우리의 허물을 덮는 사랑이며, 새로운 삶을 열어 주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사순은 하느님의 탕감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자유로워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탕감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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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3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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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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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06 |
| 2026.03.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05 |
| 2026.03.0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04 |
| 2026.03.0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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