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미카 7,14-15.18-20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복음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미카 7,14-15.18-20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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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내 마음이 향한 곳이 시선이 된다.
사람은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은 시각입니다. 눈은 빛을 감지하여 형태, 색깔, 거리, 움직임 등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보지 못할 때가 있는데 바로 주의력을 잃었을 때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부주의 맹시’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은 바로 이 부주의 맹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한 아버지에게 그는 분노하였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염소 한 마리도 내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였습니다. 질투와 서운함에 사로잡혀, 그는 집 안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의 눈에는 아마도 ‘잔치’가 보였을 것입니다.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며 춤추는 사람들, 살진 송아지로 차려진 풍성한 식탁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곧 ‘돌아온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굶주림과 죄책감 속에 고개 숙여 뉘우치던 동생의 모습, 자비로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끼던, 자신도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였던 사랑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와 같은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작 바라보아야 할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분노와 질투, 오해 속에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올바로 바라보고 참되게 판단할 수 있는 눈을 청합시다. 바라는 것이 바뀌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좋은 옷을 입히시는 하느님
누구의 사랑이 참사랑인지는 배반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배반했을 때 사랑을 거두는지 그래도 사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는 늘 사랑의 배반을 경험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의 사랑은 큰데 너의 사랑은 작다고 생각하고, 그러고는 그런 너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사랑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답을 바라는 아주 차원이 낮은 사랑이라고 치부하지 말 것입니다.
정말 보답을 바라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사랑의 가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금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사랑을 줬는데 그 사랑의 가치를 모르니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사랑을 진정 금보다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나라도 내 사랑을 가치 있게 여기고 포기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남이 내 사랑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주도권을 포기한 것이요, 너에 의해 내 사랑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사랑은 너에 의해 내 사랑이 좌우되지 않기에, 내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네가 사랑할 만하기에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그만두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처럼 내 사랑이 싫다고 떠나도 그런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가여울 뿐이지 괘씸하지 않고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그런데 참사랑은 내 사랑을 떠난 사람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고 가엾게 여길 뿐 아니라 여전히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의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쫄쫄이 굶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가장 맛있는 송아지 고기를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힙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그런데 그저 받아주는 것만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큰아들에게 이런 아버지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불만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벌을 받아야 하고 죗값을 치러야 할 놈에게 좋은 옷 입힐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 작은아들은 당신 사랑을 떠나 고생고생한 것으로 이미 충분히 벌 받고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죄인 취급할 생각이 없고 돌아온 것이 오히려 고맙기만 한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이해가 갑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병들고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이 제일 불효이듯이 하느님도 우리가 죄로 인해 영육 간에 아픈 것이 제일 마음 아프시고, 그래서 죄를 지어도 좋으니 죽지 말고 살아만 다오!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언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7-18)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과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아들이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일이기에,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이 사순시기에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5,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품으시는
그 사랑에 안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할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성모 신심 미사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이 말씀은 결코 성모님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새 창조'의 청사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은 바로 '희망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집착'입니다.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주던 안락한 자궁과 탯줄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만약 아기가 탯줄이 생명줄이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자궁 밖 세상이라는 더 넓은 차원을 향한 '희망'과, 그곳에서도 내가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탯줄을 놓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우화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엄마 태중에 쌍둥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회의론자였고, 다른 한 아이는 희망론자였습니다. 회의론자인 아이가 물었습니다. "너는 정말 태어난 후의 삶을 믿니?" 희망론자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분명히 여기보다 더 밝고 넓은 세상이 있을 거야. 그리고 거기선 우리 발로 걷고 입으로 음식을 먹게 될 거야."
그러자 회의론자가 비웃었습니다.
"발로 걷는다고? 입으로 먹는다고? 말도 안 돼. 탯줄이 우리 생명인데 이걸 떠나서 어떻게 살아? 엄마라는 존재도 본 적 없잖아?"
이때 희망론자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믿어. 우리가 이곳의 집착을 버리고 나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가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될 거야."
결국 희망을 품고 탯줄을 놓한 아이는 세상에 나와 부모를 닮은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했지만, 끝까지 집착하며 머물려 했던 존재는 태어나지 못하고 사멸했습니다. 성모님이 바로 이 희망론자 아이와 같으셨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희망하셨기에, 그분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식을 믿음으로 붙잡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사다리와 같습니다. 희망은 사다리의 '세로대'이고, 믿음은 그 사이에 끼워 넣는 '가로대'입니다. 양옆의 세로대가 튼튼하게 서 있어야만 가로대를 붙여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겸손하셨지만,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간절히 희망하셨습니다. 그 희망이라는 세로대가 확고했기에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를 믿음의 가로대로 삼으실 수 있었고, 그 진리가 성모님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바라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형제요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우리를 재창조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으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을 낳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자녀를 낳을 수 있어야 온전한 인간이 되듯, 하느님의 자녀 역시 하느님을 낳을 수 있어야 온전하게 하느님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희망하고 믿게 되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실화입니다. 그녀는 폐결핵이라는 고통스러운 병고와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평온했습니다. 주변 수녀들이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영혼들의 어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새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이런 고통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마지막 대화』 1897년 7월 11일 및 『편지』 193호 참조)
데레사는 자신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이자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희망하고 믿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이 위대한 진리가, 그녀를 죽음의 공포와 육신의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입니다.
감실이 된 성모님도 이와 같으셨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 성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돌아오면 불륜으로 오해받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지만, 내 안의 하느님을 전하여 엘리사벳의 태중 아기를 기쁘게 뛰놀게 하고 그들을 하느님 자녀로 낳겠다는 사명이 그분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제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그 놀라운 신뢰와 믿음을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그분의 형제자매이며, 심지어 그분을 세상에 낳아줄 수 있는 어머니임을 희망하고 믿읍시다. 성 암브로시오는 『루카 복음 주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영혼은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낳는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복음서 강론』에서 "사랑의 목소리로 주님의 사랑을 이웃의 마음에 불어넣어 그분을 낳게 하는 이가 바로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가족을 넘어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이 압도적인 진리 앞에 설 때, 비로소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집착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이 거룩한 희망과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영생으로 나아가는 가장 완전한 준비이자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낳는 사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탯줄을 끊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빛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20대 초반의 아들이 하루 종일 조그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만화영화만 보고 있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떤 만화영화는 1,000번 넘게 돌려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런 아들의 방문만 봐도 답답하고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만화영화를 보면서 연출을 익혔고, 그림체와 상상력이 더해져 나중에 엄청난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국형 좀비물의 새 역사를 쓰며 천만 관객을 끌어들였던 영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입니다.
방구석에서 만화영화를 보는 아들을 부모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니 의미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격려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이 세상 안에서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자기의 판단으로 의미 없다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바라보십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것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십니다. 따라서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그들이 보기에 세리와 죄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의미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패륜아와 같은 작은아들을 이야기하십니다. 작은 아들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 15,12)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데도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종한 생활로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심지어 유다인들에게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 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 줍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 잘못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지위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품팔이꾼’으로라도 취직하려는 계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못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루카 15,20 참조). 이 모습에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라고 큰아들은 항의합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철저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계약 관계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보상과 의무감 때문에 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몰랐다고 해서 큰아들을 내치지 않습니다. 큰아들도 사랑으로 달래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이나 큰아들 모두 내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이 아닌,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첫 모금의 과학은 우리를 무신론으로 이끌지만, 잔을 끝까지 비우면 그곳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베르네 하이젠베르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돌아간다는 것은 길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사랑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삶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데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행위이지만, 그 시작과 완성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잘못과 한계를 인식합니다. 그러나 인식만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는 언제나 행동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과거의 허물을 붙잡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중심적 욕망을 넘어서는 삶이 근원적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에도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관계의 근본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참된 인간다움은 허물이 없는 데 있지 않고, 허물을 깨닫고 다시 회개의 길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사순은 우리의 실패를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아버지께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 은총의 시간 위에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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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15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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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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