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예레 18,18-20
어서 그를 치자. - 복음
마태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예레 18,18-20

어서 그를 치자.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3월 4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3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39
✚ 강론시작 06:2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믿음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이 ‘구원받기 위하여’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사순 시기는 십자가의 죽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때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에서 사제는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이 되는 이유는, 죄를 제외하고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이 모든 여정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의 죽음도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죽임까지 당하신 그분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높이 달린 십자가는, 우리가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이정표일 것입니다. 십자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구원자 예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합시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겸손한 사랑으로 나아가자!’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룩한 새로움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를 없애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
예레미야만 아니라면 마치 누구의 말이든 잘 들을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를 죽인 자들이 예수님도 죽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레미야와 주님은 같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주님이 없어지고 나면 사제에게 가르침을 받고, 현인에게서 조언을 얻고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거라고 하지만 이 사제는 이래서, 저 예언자는 저래서 안 된다며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애초에 누구의 말도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듣고 싶은 말만 들었으며 도리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다를까요? 다를 바 없나요? 일단은 다를 바 없습니다. 어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어제)
“너희 가운데서 높은 자가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늘)
같으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시는 것으로 제자들을 착각하게 했는지 두 번이나 이미 수난 예고를 하셨고 이어 세 번째로 예고를 하셨음에도 주님의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스승님의 나라’니 ‘오른편과 왼편 자리’니 운운합니다.
그러나 역시 제자들은 다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주님을 죽이고는 자기들이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제자들마저 없애려고 들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늦게라도 주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남은 삶에 할 바입니다. 우리도 아직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주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말씀의 뜻을 다 이해치 못했다는 뜻도 되겠지만 머리로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들어도 마음이 수긍하지 못하는 곧 마음으로는 종이 되거나 섬기는 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뜻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마음은 늘 늦됩니다. 그리고 다 했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 이해했다거나 다 실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달릴 바를 다 달렸다고 감히 얘기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나 가능한 말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다 하지 못했다고 함이 좋고 프란치스코조차도 그러했습니다. 생애 말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
프란치스코가 남긴 이 말을 전한 다음 토마스 첼라노는 자기 생각을 덧붙입니다.
“그는 아직 목적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삶의 거룩한 새로움을 얻으려는 뜻을 꾸준히 지니면서 늘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다.”
여기서 ‘거룩한 새로움’과 ‘늘 다시 시작’이라는 말이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지 말라!”는 초대송 후렴과 겹치면서 저의 마음에 와닿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섬김과 출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였을(마태 20,22 참조) 뿐만 아니라, ‘진정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건만, 정작 제자들의 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를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신뢰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요, 섬기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섬김 받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고,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니요,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하더라도,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섬기면 주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0,23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 앞에 있는 사람과 어디까지 갈지 알고 싶다면
교우 여러분, 사순 제2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마태 20,18) 그런데 이 비장한 분위기 속에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주님께 절하며 아주 세속적인 청탁을 하죠.
"제 두 아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 20,21)
오늘 저는 이 질문을 '관계의 수준'이라는 관점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원할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이인지, 즉 내가 그 사람과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너는 나와 어디까지 갈 준비가 되었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저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본당에서 교우분들을 만날 때, 저도 모르게 가장 많이 던지게 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무실이나 고해소에서 누군가 저를 찾아오면 저는 먼저 묻습니다. "자매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혹은 "형제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그 대답 속에서 그분들이 저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저와 어디까지 동행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물질적 이익'을 원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은 나에게 그저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신앙으로 치면 하느님을 내 욕망을 채워주는 자판기로 여기는 수준이죠. 이런 관계는 이익이 끝나면 관계도 끝납니다.
이런 왜곡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류학적 사례가 '카고 컬트'(Cargo Cult), 즉 '화물 숭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멜라네시아 제도의 원주민들은 하늘에서 비행기가 내려와 통조림과 옷 같은 신기한 화물(Cargo)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행기가 오지 않자, 원주민들은 나무로 비행기 모양을 만들고 활주로를 닦으며 존 프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비행기를 만든 사람도, 그 문명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박스에 든 '화물'뿐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 화물 숭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이라는 존재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분의 손에 들린 '건강, 합격, 돈'이라는 화물만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물건'을 답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딱 거기까지만 가는 사이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위로와 에너지'를 얻기 위한 대상, 즉 '상담사'로 대하는 단계입니다. 아마 저를 찾아오시는 많은 신자분이 이 단계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혹은 저와의 면담을 통해 내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다시 살아갈 깨달음이나 에너지를 얻으려 하십니다.
물론 좋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상담가이시고, 사제인 저 또한 여러분의 목자이니까요. 하지만 이 관계 역시 여전히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상담사가 어떤 아픔을 겪는지, 상담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주길 바라고, 방전된 내 영혼을 충전해주는 배터리가 되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한 상담가가 일부러 자기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내담자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상담을 받은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선생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상담가의 얼굴에 난 상처보다 자기 마음의 생채기를 쏟아내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상담가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인격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 감정의 쓰레기를 받아주는 '처리장'이자 방전된 기분을 채워주는 '무선 충전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원하는 '부부 관계'의 단계입니다. "주님, 저는 화물도 필요 없고, 제 기분 좋아지는 에너지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수준이죠.
하지만 이런 사랑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를 유럽의 지성들은 "Égoïsme à deux"(에고이즘 아 되), 즉 '둘만의 이기주의'라고 경고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사랑이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보며 외부 세계와 담을 쌓는다면, 그 사랑은 곧 고립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결혼의 목적이 단둘이 행복하게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녀를 낳아 관계를 확장하는 데 있듯이, 신앙의 정점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주님을 전해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듣고 싶으셨던 대답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을 모르는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에게 당신을 전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구원의 값을 치르는 존재, 즉 '몸값'(Lutron)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까지, 즉 죽음 너머 생명을 낳는 자리까지 가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교우 여러분,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주님의 교정을 받고 나서야 '잔'을 마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잔’은 ‘사명’입니다. 나의 ‘사명’에 함께하려는 사람이 끝까지 갑니다. 만약 나의 사명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사명이라면 말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성당 안의 그리스도만을 공경하고 성당 밖에서 헐벗은 그리스도를 외면한다면, 그대는 성체를 모신 것이 아니라 성체를 감옥에 가둔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미루면서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옛날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 펀드가 아주 유행했습니다. 은행에 갔다가 창구 직원이 펀드 가입을 권하면서, “예금과 똑같은데 이자가 훨씬 많이 붙는 것 아시죠?”라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하면 무식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 “저도 이제 하려고 했어요.”라면서 펀드 가입했습니다.
바로 친한 신부에게 무식이 드러날까 봐 펀드에 가입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거 주식과 똑같아. 따라서 신부가 하면 안 되지.”라는 것이 아닙니까? 곧바로 해지하러 은행에 갔더니, 가입했던 펀드가 그새 하락했다고 합니다. 곧 오를 것이라는 말에, 본전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해지를 못했습니다. 그 뒤 한 달 내내 확인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한 번만 아니라 하루 종일 수시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너무 한심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손실 20%를 보고 해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해지하자마자 이 펀드 종목이 폭등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지’라고 했지만, 저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의사결정 전문가 애니 듀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을 몇 년 동안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을 때 최대한 빨리 접을 수 있는 능력이다. 손실을 조금이라도 빨리 줄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렇게 삶 안에서 단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더 분명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실한 미래가 결정되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세상의 원칙과는 너무 다릅니다. 하느님이면서도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보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다가올 경광의 날에서의 권력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도 똑같이 권력을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완전히 다름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군림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사람, 종이 첫째가 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성공, 인정, 편안함 등의 세상 것을 단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럴수록 주님께 가까워지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이 용서받기 위해 기도할 때, 혹은 남을 용서할 때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은 없다(장 폴 리히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생명은 우리가 움켜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용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기 내어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 없는 영광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바치러 왔다.”라는 이 표현은 강요된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 결단을 드러냅니다. “많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구원이 공동체적 차원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라는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참된 치유는 우리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믿음이 깨질 때 시작됩니다. 해방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몸값은 벌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잇는 해방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에서 우리는 값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오시지 않으시고 되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존엄을, 상처 입은 우리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오셨습니다. 목숨을 바친 사랑 앞에서 내어주신 사랑의 깊이에서 사랑의 사람이 탄생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내어드려야 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상처 많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열리는 우리 마음뿐입니다. 몸값과 목숨이 마음에서 만납니다. 마음의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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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20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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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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