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58,1-9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58,1-9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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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보여 주는 단식이 아닌 나누는 단식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오늘 화답송은 참된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실 회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뜻밖에도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 죄송해서 고해성사조차 볼 수 없다.”라는 말 속에는, 참된 뉘우침보다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녀가 죄책감과 당혹감에 휩싸여 집을 뛰쳐나갔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돌아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부모님이 나를 받아 주실 리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가로막지만, 정작 부모는 마음이 상하였을지언정 자녀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기다립니다. 이런 끝없는 자책이 과연 부모에 대한 참된 미안함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자책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상황을 통제하려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책을 속죄로 착각하지만,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해명이나 보상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단식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단식은 그저 ‘보여 주기 위한’ 행위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이 정도 뉘우치면 되겠지.” 하는 식의 거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단식하여 남겨 둔 것을 기꺼이 필요한 이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랑의 실천,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여러 결심에 앞서, 오늘 복음 환호송을 마음에 깊이 새겨 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단식의 2중(二重) 목적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주는데 이런 단식의 의미와 목적을 어제 독서의 기도 제2 독서에서 성 레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제정한 이 사순절을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써만 아니라, 우리의 악습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 단식을 행함으로써 지내야 합니다. 거룩하고 합당한 단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애긍시사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애긍시사라고 하는 자선 행위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우리가 실천하는 이유는 미용 단식이나 건강 단식이 아님은 물론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자기학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단식하라 하니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레오 교황이 얘기한 대로 하나는 악습을 끊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행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자기 사랑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고, 미용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단식이지만 악습을 끊는 것이 최고의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단(斷) 곧 끊는 것 중의 끊는 것은 단식(斷食)이 아니라 단욕심(斷慾心)이요 단악습(斷惡習)일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하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가치 있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악습을 끊는 것보다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레오 교황은 얘기하는데 이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의 인격적 단식입니다.
오늘 독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기 위한 단식을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신랑의 수난과 함께하는 Compassion의 단식을 얘기합니다. 옛날 우리 신자들은 성미를 모아 바쳤지요. 이것은 성미(誠米)라고 할 수도 있고 성미(聖米)라고 해도 좋을 텐데 사순 시기 매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형편껏 한 숟가락 또는 한 움큼씩 떼어 놓은 쌀이었지요.
이것은 지금 돈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뜻깊게 다가옵니다. 쌀 한 톨이 귀하던 때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번에 툭 내는 것보다 매 끼니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턱내는 것은 금액으로는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겠지만 성미는 매 끼니 가난한 이를 생각하며 나누는 것이기에 더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 북한 일할 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문과 주님의 기도를 제가 짓고 식사 때 바치는 기도도 지었는데 그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굶주리는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사순절만이라도 굶주리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이 기도를 다시 바쳐야겠습니다. 그러면 식욕이나 식도락으로 밥을 먹지 않게 하고 사랑으로 밥을 먹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참된 단식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과 ‘신랑의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사실, ‘단식’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이는 당신이 누구신지, 그 신원과 동시에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이 ‘신랑’(묵시 19,6-9)임을 계시함과 동시에, 지금이 ‘신랑이 함께 있는 때’임을 드러냅니다.
사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고(이사 54,5-6; 62,4-5; 호세 2,16-20),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요한 3,29)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시면서 당신을 ‘신랑’(마태 22,2)으로 비유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당신의 수난 예고와 당신이 수난 받는 야훼의 종임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새로운 의미의 단식, 곧 감사와 사랑의 단식을 예고해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 새로운 마음의 단식을 하게 하소서.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을 섬기는 일을 단식하고, 주님과 형제를 섬기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9,14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
주님!
저를 결박하는
마음 속 생각을 멈추고
당신의 뜻 따르게 하소서.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고
내어놓음으로
당신의 생명이 퍼져가게 하소서.
제 자신 섬기기를 멈추고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배가 부르면 눈이 감긴다.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첫 번째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오늘 저는 이 단식이 어떻게 우리에게 잃어버린 신랑, 즉 우리 주님을 되찾아 주는지에 대해 여러분과 깊이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저에게도 단식에 얽힌 아주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때는 의욕만 앞서서 남들이 안 하는 단식 기도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죠. 한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흘쯤 굶으니까 정말 겸손해지더군요. 아니,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신학 책을 읽으려 해도 글자가 라면 면발처럼 보이더라고요.
그전까지 저는 제가 아주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신학 공부도 잘할 것 같고, 거룩한 사제가 금방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밥 몇 끼 굶었다고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다니요. 그 지독한 무력감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만은 눈을 가려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성 바실리오(St. Basilius Magnus) 교부께서는 『단식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식은 낙원에서 제정된 법이다. 아담이 단식하지 않았기에, 즉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에 낙원에서 쫓겨났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즉 자아가 배불러지고 싶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배가 부르면 영혼의 감각이 무뎌집니다. 당연히 육체적인 욕망도 사라지고, 소유욕도 없어지니 삼구(三仇, 세속·육신·마귀)가 다 줄어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단식이 좋은 겁니다.
자, 그럼 왜 배가 부르면 진리나 아름다움, 선함을 볼 수 있는 눈이 멀어버리는지, 역사의 생생한 사례를 통해 찾아보겠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V)는 유럽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다스린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지독한 식탐 때문에 늘 통풍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매끼 20가지 이상의 고기 요리를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왕관을 내려놓고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으로 은퇴했을 때, 그는 이미 비대해진 몸과 무뎌진 정신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역사학자 윌리엄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의 기록에 따르면, 은퇴 후 그는 수도원에서 수십 개의 태엽 시계들을 모아놓고 시간을 똑같이 맞추는 작업에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시계들은 제각각 움직였죠. 카를 5세는 시계의 시간을 맞추려 애쓰다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 기계 시계들도 내 마음대로 시간을 맞출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 수많은 민족의 종교와 사상을 내 마음대로 맞추려 했단 말인가!"
그가 권력과 음식에 배불러 있을 때는 자신의 오만함과 종교개혁의 본질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의 엄격한 식단과 절제 속에서 몸의 비계가 걷히자, 비로소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려 했던 가련한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성자,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비안네(Jean-Marie Vianney) 성인은 하루에 감자 한두 알로 끼니를 때우며 지독한 단식을 이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성인을 '뼈만 남은 성자'라고 불렀죠.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배가 부르면 영혼이 잠듭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영혼이 하느님의 세밀한 속삭임을 듣기 위해 깨어납니다."
성인이 단식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은총은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고해소에 들어온 신자가 죄를 숨기면 성인은 "형제님, 10년 전 그 나무 밑에서 저지른 일을 왜 숨기십니까?"라고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육체의 굶주림이 영혼의 망막을 맑게 닦아주어, 인간의 위선 뒤에 숨은 본질을 보게 만든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annes Chrysostomus) 교부의 말씀처럼 "단식은 영혼의 음식이며, 기도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임을 몸소 증명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단식은 단순히 고통을 자처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단식은 우리 삶의 노이즈(Noise)를 제거하는 영적 수술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로 너무 시끄럽고 배부를 때, 우리 곁에 계신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는 묻혀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신랑을 빼앗긴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존심이 너무 배불러서, 내 탐욕이 너무 가득 차서, 정작 내 영혼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교부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단식은 영혼을 정화하고, 정신을 고양하며, 육신을 영혼에 복종시킨다."
이번 사순 시기, 단식을 통해 우리 안의 '교만의 비계'를 좀 떼어냅시다. 배가 조금 고플 때 비로소 들리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단식이 잃었던 신랑을 되찾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비워진 그 마음자리로, 부활의 기쁨을 가득 안고 오실 신랑 예수님을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작가의 재미있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야야~~ 들어봐 들어봐! 내가 오늘 군부대로 강연 갔어. 다른 데도 아니고 군부대로!! 그걸 수락한 내가 미친년이지. 뭔 생각이었나 몰라. 군인들 삼백 명이 쫙 깔려 있는데 분위기 싸하고 와 뒤지는 줄 알았다. 레전드였음. 그렇게 힘든 강연은 처음이었어. 군부대 다신 안 가….”
이 말을 많은 이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군부대 강연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그런데 저는 이 작가의 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군부대에서 강의했었기 때문입니다. 제 강의 역사 중에서 가장 힘든 강의였습니다. 군인의 이미지는 씩씩하고 늠름한 그리고 의젓해서 무엇이든 다 열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강의 가서 만난 이미지는 패잔병이었습니다. 깨어 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이제 막 군 생활을 시작한 이등병 몇 명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분위기를 올리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경험했기에 작가의 말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경험이 이해를 돕습니다. 그런데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너무나 부족한데,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워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하느님과 더 멀어질 뿐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라고 요한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며, 금욕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경건함의 척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어울렸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적 열심에 정반대의 모습을 비췄기에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랑은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으로 칭하면서,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며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기쁨의 축제인 혼인 잔치에 단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단식을 이야기하십니다. 단순히 구약에서처럼 율법을 지키거나 슬퍼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사랑의 기다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대충 아는 것으로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과 함께 이 사순 시기를 지냈으면 합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도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면 성공할 것이다(알베르트 슈바이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단식은 단순한 음식 절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음식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아닌 것을 덜어내는 것이 단식입니다.
“빼앗길 날”은 다름 아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빼앗긴 분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되십니다. 잃을 때는 잃고, 비울 때는 비우는 것이 지혜입니다. 있음과 없음, 만남과 헤어짐은 또한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단식은 무언가를 참아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것,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 주님보다 앞세웠던 것들을 아프게 만납니다.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상실을 기억하는 것은 절망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회복될 참된 희망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음식을 멈춤으로써 마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단식입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결단입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사랑을 정화합니다. 그 단식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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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58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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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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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4 |
| 2026.02.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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