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7일 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민수 6,22-27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제2독서
야고 4,13-15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 복음
루카 12,35-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민수 6,22-27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야고 4,13-15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12,35-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2월 17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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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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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작심삼일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방법
오늘로 우리는 벌써 새해를 세 번째로 맞이합니다. 교회 전례력의 새해, 양력 1월 1일, 그리고 오늘 설까지, 올해만도 여러 번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들 새해를 맞이하며 세운 계획들은 잘 지키고 계신가요? 아마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작심삼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듯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면, 결국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에 대한 답을 오늘 전례 안에서 찾아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
그렇습니다. 어떤 계획이든 우리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계획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계획일수록, 더욱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해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먼저 주님께 청하는 다짐으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도 대단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을 의식하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획보다 먼저 주님을 기억하고 따르는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청하고 부를 그분께서는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대로, 우리에게 힘을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올 한 해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이고 죽겠네.”가 아닌, “아이고, 주님”을 먼저 부르는 삶. 그 고백 하나가 우리의 걸음을 분명히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뻐하고 감사하며
언제부턴가 제게 설 명절은 새해맞이 명절이라는 느낌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사는 달력에서는 2026년 1월 1일이 새해 첫날이잖습니까?
그래서 설 명절은 새해 첫날이라는 명절이기보다는 다시 말해서 올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명절이기보다는 내 한 존재의 시작을 기념하고 내 존재를 있게 한 근원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요한복음 시작의 느낌으로 의미 새김을 한다면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에서 그 한 처음과 같은 의미랄까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있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부모님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올라가면 조상들이 있고 하느님께서 시작의 시작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오늘은 우리 존재의 시작과 근원을 생각하고 이 모든 시작의 시작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이기에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내가 욥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불행하기에 내가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이고 조상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 명절은 형제들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여 만남의 기쁨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날입니다. 그래서 <본기도>는 이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점점 많이 합니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면 특히 이 명절에 내 옆에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니 내 옆에 누가 있다는 것, 명절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며 만날 누가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인데 갈수록 명절에 찾아가고 찾아오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만나면 기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친교를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인생을 실패한 것이니 이 명절에 인생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설계를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이 점을 반성합시다.
나는 사람이 왜 싫어지고 두려워지고 만남을 귀찮아하게 되었을까? 신앙인이면서 내 곁에 있고 나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선물로 맞아들이지 않게 되었을까? 다행히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오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오늘 <본기도>의 마지막 기도처럼 사십시다.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고, 영육 간에 건강하시어 복 농사도 많이 지으시길 바라고 빌며 이 명절 아침에 큰 절 올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조리에 가득 찬,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우리들 안에서 활짝 피어나고, 화목과 건강, 친교와 사랑이 피어오르길 빕니다.
복 가운데서도 으뜸은 생명을 받은 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무엇보다도, 우리 생명과 생명을 건네주신 부모님, 그리고 영적 생명으로 축복과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축복과 은혜와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을 기립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베푸시고 계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복 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저희와 저희 자손들 위에 내리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존귀함과 생명이 피워야할 사명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되새겨 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맨 먼저 하신 것도 “복”(창세 1,28)이었으며, 창조를 마치신 이렛날에 하신 일도 “복”(창세 2,3)을 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셨고(창세 12,1-3), 백성들을 축복하기 위해 모세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과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최후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주복하셨고, 원수까지도 축복하라고 명하셨습니다(루카 6,28). 그리고 승천장면에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도 “축복”이었습니다(루카 24,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나 자신 안에 하느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진정 복된 이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참으로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존재 속에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잠들지 않을 뿐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기다릴 뿐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음이요,
그보다 먼저,
임이 저를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저를 그리워하는
임의 희망 안에 제가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천국에 갈 용기는 평소의 이자에서 나옵니다.
교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느 찢어지게 가난한 남자가 길가 풀숲에서 5억 원이 든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외쳤습니다.
“우와! 하느님 맙소사! 역시 성모님은 내 기도를 안 버리신다니까! 이게 웬 횡재야!”
그는 그 길로 백화점에 가서 명품 코트를 빼입고 호텔 식당에서 제일 비싼 코스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스테이크를 썰며 웨이터에게 팁으로 10만 원권 수표를 척 내밀었죠. 그때,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쳐 그를 제압했습니다. 형사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유괴범으로 체포한다.”
그 돈은 유괴범 유인하려고 경찰이 깔아둔 미끼 돈이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생명을 빌려주셨고, 부모님이 피땀 흘려 기른 정성이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 것’이라 착각하며 흥청망청 살고 있습니다. 마치 남의 집을 빌려 전세를 살면서 자기가 집주인인 줄 알고 벽에 함부로 못을 박고 주인 행세를 하는 철없는 세입자와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올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잊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비극은 그 참 주인을 만나야만 할 때에 옵니다. 과거 어느 신부님께 수천만 원을 빌려 간 분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에겐 몇 년간 차를 사려고 아끼고 모은 귀한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돈을 빌려 가고는 연락을 끊었습니다. 십 년이 훨씬 지난 뒤, 그분에게서 다시 다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빚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이 또 다른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채무자라는 사실을 빌린 사람에게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그 동안 연락을 끊고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잊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잊지 않았다고 말하며, 거의 화를 내며 “갚으면 될 거 아니예요!”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10년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그분은 이제 그 신부님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준비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설은 우리가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의 덕으로 지금 여기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 매주 봉헌하는 십일조, 그리고 오늘 조상들께 드리는 감사는 마치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드리는 이자와 같습니다. “제 생명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이런 날조차 감사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주님 나라에 갔을 때 그 엄중한 심판 앞에서 조상들에게 어떻게 중재를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사랑의 학교』에 실린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어린 소년 마르코는 가난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러 간 엄마가 소식이 끊기자, 엄마를 찾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납니다. 마르코는 길에서 구걸하거나 일하며 모은 돈을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도, 발에 피가 나도 ‘이것은 엄마를 만나기 위한 준비’라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만약 마르코가 번 돈을 가는 길에 흥청망청 써버렸다면 어땠을까요? 고생 끝에 병든 엄마를 만났을 때, 마르코는 엄마를 안아드릴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엄마, 미안해. 엄마 찾으러 오다가 돈을 다 써버렸어”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겠지요. 성경에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올 때 빈 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뵈올 면목이 없어지니까요.
하지만 마르코는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절제와 노력이 있었기에 그 작은 아이의 보답에 병들어 죽어가던 엄마는 다시 살아날 힘을 얻었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존재의 이자를 갚으며 준비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용기입니다.
구약 요셉의 축복은 결국 에사우 것이었습니다. 그는 에사우를 만나야 하는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계속 선물을 보냈고, 결국 납작 엎드렸습니다. 에사우는 자신의 복을 가로챘지만, 그런 동생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과 조상들에게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 학자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띠를 매는 행위를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허리띠는 일을 할 때 옷이 펄럭이지 않게 잡아줍니다. 즉, 모든 것이 내 것인 양 절제 없이 휘두르던 세속적 욕망과 육신의 정욕, 마귀의 교만을 묶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제하고 싶어도 나를 이기지 않으면 절제가 안 되고 그러면 바칠 이자도 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등불을 ‘깨어 있는 양심과 사랑의 선행’이라고 보았습니다. 등불은 하느님의 뜻, 부모님의 유훈을 따르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등불은 보게 하는 데 사용됩니다. 나중에 주인이 나의 행위를 볼 때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역시 나도 그분을 만날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 앞에서 엎드릴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부모에게 오늘 세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오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준비한다면,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은 공포의 심판 날이 아니라, 밀린 이자를 기쁘게 탕감해주시고 영원한 집으로 초대해주시는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부모에게도 허리를 조이고 감사의 행위를 합시다. 부모는 그것으로 모든 노력의 보상을 받는 것처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가족들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지난 1월 1일에도 했던 인사이지만, 음력 설날을 맞이하면서 다시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을 받으라는 축복은 계속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서로 축복을 나누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험 시간이 한 학생이 손을 든 뒤에, “선생님! 7번 문제 답을 모르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때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1) 답을 가르쳐 준다.
2) 답에 관한 힌트를 준다.
3) 혼낸다.
이 상황은 북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1번 답을 가르쳐 주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물으니, 시험은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모자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3번을, 즉 혼을 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등수를 매겨서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을 뽑기 위해 시험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쉬워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여유도 있지 않을까요? 책 읽을 시간이 없고, 친구와 만나 수다 떨 시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만족할 수 있는 스마트폰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등수 매기는 공부는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똑같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의 나이에 와서 보니, 경쟁했던 순간보다 함께했던 순간이 더 행복함을 깨닫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다면 이번 새해는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마음에 드는 함께하는 계획을 세워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허리에 띠를 매고 급히 먹었습니다(탈출 12,11). 즉,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용해서 주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할 자세를 갖추라고 하십니다. 나태함을 버리고 영적인 긴장감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은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믿음이라는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요구입니다.
이 요구를 따르는 멋진 올해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곁을 지켜 주어라. 기꺼운 마음으로 경청하라. 거기 머물러라.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메건 더바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설은 새로운 시작을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참된 새해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맑아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설의 진짜 가치는 성과가 아니라 함께 머무는 소중한 가족의 시간입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와 화해하며, 미래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시간을 거룩하게 봉헌하는 설 명절입니다. 고향을 찾고, 부모를 찾고, 조상을 기억하는 일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설에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정체성을 이어가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소중한 가치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연결의 핵심입니다. 설은 흩어진 가족을 다시 연결합니다. 새로워지는 연결로 가족이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설은 감사를 다시 배우듯 마음을 바로 세우는 날입니다.
부모와 조상을 향한 존경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뿌리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단순한 인사를 건네는 날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축복하는 설이길 기도드립니다. 설 명절의 중심 가치는 기억, 존중, 관계, 감사, 그리고 새로움입니다.
소중한 설 명절인 오늘이 흩어졌던 마음을 다시 잇고 만남 속에서 존중을 배우며 함께 존재함의 가치를 새기는 은총의 새해맞이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한 설 명절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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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6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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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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