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집회 15,15-20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 제2독서
1코린 2,6-10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 복음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집회 15,15-20

주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15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16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17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18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
19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
20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2,6-10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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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사랑이 없는 규칙은 방향을 잃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초보 운전자가 있었습니다. 정속 주행을 고집하던 그는, 앞에 가던 스포츠카가 빠르게 달려 나가자 갑자기 속도를 높여 따라붙었습니다. 옆자리 친구가 당황해하자 그는 말하였습니다.
“앞차와 간격을 100미터로 유지하라고 배웠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규칙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통행 속도 제한이라는 법을 어긴 것입니다. 배운 대로 움직였을지 몰라도, 정작 주변 흐름과 안전이라는 근본 목적은 놓친 것이지요.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규칙에 집착하면서 정작 그것이 왜 필요한지 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전례부 활동을 하며 전례 규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런데 방학 때 본당에 가면 전례에 관하여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를 왜 저렇게 켜지?’, ‘종은 저렇게 치는 게 아닌데 …….’
주님을 위한 수단이던 규정이 어느새 주님을 가리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차량 간 거리를 지키려다 과속한 운전자처럼, 형식에만 얽매이면 더 본질적인 계명을 놓치게 됩니다. 모든 규정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 규칙을 이끄는 방향이고, 규칙은 사랑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에 참되게 응답하는 삶이며, 우리를 자유와 기쁨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화답송)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조각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 가운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움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죄를 지을지라도 사랑하며, 조금 사랑할지라도 사랑하고, 자기만 사랑할지라도 사랑하며, 개를 사랑할지라도 사랑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가운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가지 계명은 어기더라도 한 계명은 지키고, 철두철미하게 지키지는 않더라도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율법의 완성을 보려고 합니다.
미흡하고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완성에 열려있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기만 하면 사랑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작다고 실망하지 않고 작은 사랑도 소중히 여기며, 거기서부터 희망을 지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해야 합니다. 사랑도 욕심부리면 안 됩니다. 사실 욕심 가운데 사랑 욕심만큼 크고 강한 욕심 없고, 그래서 웬만해서는 만족할 수가 없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욕심보다 사랑 욕심에 가난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너의 사랑이든 나의 사랑이든 큰 사랑만 사랑이 아니기에 작은 사랑으로도 만족할 줄 알고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사랑도 만족스럽게 되면 사랑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에 집중하게 되면서 다시 말해서 미운 구석은 쳐다보지 않게 되면서 사랑의 완성을 향한 여정은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의 완성은 개인의 사랑만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작은 사랑도 소중히 여기고 너의 작은 사랑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사랑은 작고 불완전하지만 작은 사랑들을 모으고 모아 크고 완전한 사랑이 되게 합니다. 저는 이것을 조각보 사랑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형형색색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 듯 사랑도 각기 다른 사랑들이 모여 공동체 사랑을 완성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사랑의 조각들입니다. 사랑의 조각인데 아주 작은 조각입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작다고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고, 나의 사랑과 다른 사랑을 다양성으로 긍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지향하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사랑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 얘기하지만 완성의 시작은 나의 사랑이든 너의 사랑이든 사랑의 그 작디작음에 실망치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원하기만 하면' 가능한 신앙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15,18)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를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의 지혜’는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요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왜곡해서 그릇되게 지키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그러니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실현된다는 말씀입니다. 골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율법을 지키는 것, 실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고 실행할 수 있을까?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영으로 율법을 지키고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에 따라 실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래서 <루카복음>과 <묵시록>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이에게 행복이 선언됩니다.’(루카 11,28; 묵시 1,3).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지혜입니다. 곧 지혜는 사랑을 실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행’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요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 ~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실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임 밝히시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으며,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예”할 것은 “예”(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1요한 3,18)
그러니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응답 곧 원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주님!
말씀을 이루소서.
제 삶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복된 땅이 되게 하소서.
그 크신 사랑을 이루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폐지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지키고 키우고
실행으로 완성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 성사가 아니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이유
어느 가난한 청년이 자신이 세계적인 재벌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하는 삼각김밥만 찾아다니며, '오늘도 끼니를 굶지 않았으니 참 행복하다'고 자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비서가 찾아와 상속 문서와 함께 엄청난 액수의 통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첫마디로 이렇게 물었답니다.
“우와! 그럼 저 이제 삼각김밥 두 개 한꺼번에 먹어도 되나요?”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이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상속권을 가졌으면서도, 고작 죄 안 짓고 지옥 안 가는 수준의 삼각김밥 같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살인을 안 하는 건 당연하고 화도 내지 마라, 간음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음탕한 마음조차 품지 마라. 이건 인간더러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이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있습니다. 내가 행복을 바라는 만큼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나의 행복은 내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곧 내가 바라는 행복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노예는 주인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저 주인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딱 매를 피할 정도로만 계명을 지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 법은 무거운 사슬입니다. 겉모양만 조심하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자녀는 다릅니다. 자녀는 부모처럼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부모가 누리는 그 깊은 평화와 사랑을 나도 똑같이 누리고 싶어 하기에, 부모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마음의 깊이까지 본받으려 애쓰게 됩니다.
불가의 경허 스님 일화가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자, 젊은 수도승은 계명에 얽매여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노승 경허는 선뜻 처녀를 등에 업어 건너주었습니다. 십 리 길을 더 간 뒤에야 제자가 따져 물었습니다. “수도자가 어떻게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경허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젊은 제자는 계명에 충실했을지 모르나,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신적인 기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법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만, 자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데 집중합니다. 하느님은 계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쩔쩔매는 이들을 따분해하십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개구리의 기도 1』에 나오는 80세 노인의 풍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계명을 완벽히 지켰지만 정작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정말이지 따분한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즐긴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보상만 바랐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서』 15장에 나오는 큰아들 역시 아버지 곁에서 한 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를 종(Schiavo)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공유한 아들이 아니라 보상을 바라는 노예였기에,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계명은 지켰으되 행복의 맛은 전혀 몰랐던 불행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차원 높은 행복을 욕망해야 합니다. 레스토랑의 일용직 조리사는 주방장이 시킨 레시피의 양만 정확히 지키면 임무가 끝납니다. 하지만 주방장의 아들은 아버지가 요리를 완성하고 손님이 맛있게 먹을 때 느끼는 그 희열을 닮고 싶어 합니다. 노예는 사고가 안 나면 행복하지만, 자녀는 아버지가 만든 최고의 맛을 낼 때 비로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소개된 한 감동적인 실화는 이 자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새아버지는 아내와 결혼할 때, 자신이 가장 아끼던 꿈의 자동차를 팔아 결혼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딸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팔았던 바로 그 차를 찾아내 정성껏 고쳐서 아버지에게 선물했습니다.
딸의 마음은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했을 때 느꼈을 그 아픔과 행복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꺼이 작아지셨으니,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하며 행복해지겠다는 자녀의 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살인을 넘어 분노까지, 간음을 넘어 음탕한 눈길까지 다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법은 노예들이 죄에 빠지지 않게 막아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지만, 신약의 법은 하느님인 우리가 하느님답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본성의 법입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으시기에 영원히 행복하시니, 하느님인 너희도 그 평화를 누리려면 마음속 분노라는 독초를 뽑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 주석서 『La Sacra Bibbia』는 이 대목을 노예의 의무에서 아들의 모방으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처럼 화를 안 내고 하느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의지로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가 등장합니다.
밀떡이 신부님의 축성 기도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듯, 성체를 모신 우리도 하느님의 본성으로 변화됩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하느님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에너지가 우리 혈관 속에 흐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오늘 복음의 그 높은 계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해집니다.
결론적으로, 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본성을 받은 하느님임을 깊이 믿읍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에게 붙잡힌 어린 왕자 루이 17세(도팽)가 천박한 욕설을 강요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천한 말은 결코 내 입에 담을 수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을 가진 이의 품격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 내 정체성에 맞지 않기에 죄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먼저 내가 성체로 인해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내가 누구인지 믿는 만큼 내가 추구할 행복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복해지기를 욕망할 때, 계명은 우리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정원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눈부신 날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힘겹게 보이던 계명이 다 지켜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호주의 간병인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는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일만 열심히 했다). 3)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4) 친구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그때의 친구가 보고 싶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 살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과연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요? 그보다 생각, 말과 행동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정리한 관습적인 조문의 숫자는 모두 613개(긍정 명령 248개, 금지 명령 365개)입니다.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깜짝 놀라고, 어쩌면 불가능한 말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살인의 뿌리가 되는 성내고(내적 감정), 바보라고 부르며(언어폭력), 멍청이라고 하는(인격 모독) 행위까지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행위인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와의 화해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간음 역시 물리적 행위 이전에, 마음속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여자를 소유의 대상이나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모세 율법은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락했지만, 배우자를 버리면 그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근원적 가르침을 전달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아예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평소의 말에 거짓이라는 악이 섞여 있다는 증거이기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고 죄라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죄를 만드는 뿌리인 분노, 음욕, 거짓 마음 등을 마음에서 지우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높은 기준을 우리 힘만으로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인이 되라고 지금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지키기 힘든 주님의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삶의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행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오랫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어떤 여행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출발지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여행 중인 우리는 이 여행을 마치면 출발지인 고향으로, 즉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중인 지금 삶에서 계속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우리는 360도로 된 세상에 살잖아요. 그런데 왜 한각도로만 바라보나요?(자하 히디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의로움은 먼저 관계의 올바름이며 관계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는 사건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공동체를 살리고, 상처를 감싸며, 화해를 먼저 선택하는 실천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과 간음, 맹세의 계명을 행위의 차원을 넘어 마음의 차원으로 확장하십니다. 이는 윤리의 강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화를 요구하시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더 엄격한 기준의 나라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진실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정직하면 말도 단순해집니다. 과장과 변명, 이중적 태도는 내적 분열에서 비롯됩니다. 의로움은 잘못을 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선을 창조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통합의 삶은 다름을 지우는 데 있지 않고 다름을 품어 하나로 살아내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완성되는 삶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넘어 의로움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평화로운 주일 되십시오. 의로움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 앞에서 관계가 바로 서는 건강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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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서 15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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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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