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열왕 11,4-13
네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 복음
마르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열왕 11,4-13

네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니,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그러나 다윗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솔로몬 임금이
4 늙자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려놓았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하였다.
5 솔로몬은 시돈인들의 신 아스타롯과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밀콤을 따랐다.
6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7 그때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크모스를 위하여 산당을 짓고, 암몬인들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록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8 이렇게 하여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
9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시어,
10 이런 일, 곧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11 그리하여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뜻을 품고, 내 계약과 내가 너에게 명령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12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
13 그러나 이 나라 전체를 떼어 내지는 않고, 나의 종 다윗과 내가 뽑은 예루살렘을 생각하여 한 지파만은 네 아들에게 주겠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7,24-30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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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나를 살린다.
20-30대 무뚝뚝해 보이는 군인 청년들의 눈시울도 단박에 붉어지게 하는 낱말이 있습니다. 바로 ‘엄마’,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하느님과 함께 지금의 나를 세상에 선물해 주신 분이기에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되새겨 봅니다.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좋다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굳은 믿음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붙드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도 이러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거듭 죄를 저지르며, 때로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모른 채 분노와 시기와 절망에 빠져 있다면,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슬퍼하시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를 단념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절히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화답송).
이렇게 좋으신 하느님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계속 철없는 아이처럼 살아도 괜찮을까요? 아닙니다. 철없는 자식이라도 언젠가는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 시기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철이 들기까지는 ‘자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를 보면 안쓰러운 것처럼, 신앙도 제 나이답게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우리를 살리는 성사와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느님을 모시며 마냥 철없는 자녀로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든든한 성체와 힘이 되는 말씀의 달콤한 맛을 알아 가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겸손한 믿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요청을 아주 모욕적으로 거절하시는데 그런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니, 그것은 모욕도 거절도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복음 어디에서도 주님께서 인종주의적으로 청을 거절하신 적이 없을뿐더러 -실제로 백인대장의 종과, 이스라엘 나환자와 함께 이방인 나환자를 고쳐주셨음오늘도 주님께서는 부러 티로 지역으로 들어가셨지요.
주님께서 인종주의자시라면 이교 지역인 티로에 들어가실 리 없잖습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이란 주님께서 인종주의자가 아닐뿐더러 민족적인 차별이 전혀 없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시리아 여인은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믿음의 소유자였고 우리보다 더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강아지 취급하며 청을 거절하실 때도 주님께서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청을 들어주시리라는 것도 굳게 믿었기에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주님께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이런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없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실 때나 나환자들을 고쳐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하셨으며 코라진과 벳사이다에서 했던 기적을 똑같이 티로와 시돈에서 행하셨으면 그들은 더 회개했을 것이라고 한탄하신 바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왜 이런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없었을까요? 반대로 이교도들에게 왜 이런 믿음이 있었을까요? 오늘 여인이 주님을 부른 호칭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렇게 백인대장도 그렇고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믿음을 고백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 사람들도 주님을 ‘이자는’ ‘저자는’ 하고 불렀으며 기껏해야 스승이나 예언자 정도로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치유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모욕적인 언사를 쓰신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쓰면서 거절해도 여인은 믿음을 보이고, 그래서 치유가 일어나는데 너희 이스라엘 족속의 믿음은 어떠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연인의 겸손과 믿음을 보고, 자신의 교만과 불신을 보라는 것인데 잘 믿고 있다는 우리도 여인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겸손으로 자비를 붙잡은 어머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겟네사렛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7,28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의 기도가 대화가 아닌 독백이 되어버리는 이유
어느 열심한 자매님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저희 남편 좀 바꿔주세요. 술 좀 끊고, 제 말 좀 잘 듣게 해주세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네 남편을 아주 완벽한 남자로 바꿔주마.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네가 먼저 성녀가 되어야 한다."
자매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주님, 그냥 제가 참고 살게요. 성녀 되는 건 너무 힘들어서요!"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타인을 바꾸려 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진짜 목적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대해진 자아를 주님 앞에서 0으로 줄여나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바로 이 '작아짐의 기술'을 마스터한 분이었습니다.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그녀의 고백은 굴욕이 아니라, 은총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작아지신 예수님의 주파수에 자신의 주파수를 맞춘 영적 공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없이 작아질 때, 나를 위해 한없이 작아지신 하느님의 전능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꾸 커지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소위 '영적 비만'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자신이 대견해서 고개를 쳐듭니다. 성 파코미오의 성인전 『Vita di Pacomio』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 수도자가 남들보다 훨씬 긴 시간 고행하며 자신의 거룩함을 은근히 과시했습니다. 그러자 파코미오 성인은 그를 불러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그대의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라는 바구니 속에 차곡차곡 쌓여 썩어가고 있구려. 그대가 작아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고행은 악마를 기쁘게 할 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 주니페로 형제도 비슷한 유혹에 빠졌습니다. 『잔꽃송이』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낮추려 애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얼마나 겸손한가'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교묘한 유혹이 꿈틀댔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자기를 비우는 기도는 남이 나를 발로 밟아도 그 발에 향기를 남기는 꽃과 같아야지, 내가 낮다고 외치는 종소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꾸준함이 자아를 뽐내는 전시장이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찬가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 어디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이나 병자를 고치시는 영광스러운 예수님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키우려다 망했습니다. 기도는 항상 골고타의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은 모든 자존심이 발가벗겨지고, 하느님의 자비만이 발가벗겨진 채 매달려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골고타의 기도'를 온몸으로 살아낸 분이 바로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입니다. 13년의 감옥 생활을 견뎌낸 그가 생애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로마 제멜리 병원이었습니다. 한때 나라를 호령하던 목자였으나, 이제는 암세포에 정복당해 기저귀를 찬 채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초라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간병인이 침대 시트를 갈며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아버지! 또 실례를 하면 어떡해요! 제발 말 좀 하세요!" 추기경은 그 모욕적인 꾸중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추기경이다"라는 자존심도, "아파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논리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읊조렸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에게서 마지막 남은 인간적 품위마저 가져가시는군요. 이제 저는 당신 앞에 진정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습니다."
수술대로 향하는 카트 위에서 알몸으로 누워 의료진의 차가운 시선을 견딜 때, 그는 비로소 십자가 위에서 알몸으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추기경은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기도를 바쳤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십자가에서 제로(0)가 되셨습니다. 당신이 0이 되셨기에 하느님의 전능이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이제 저도 0이 되었습니다. 제가 0이 되었을 때, 비로소 당신이 나의 전부(All)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투안 추기경은 기도를 통해 자아라는 견고한 성벽을 완전히 허물고, 주님 앞에 한 마리 강아지처럼 작아졌습니다. 그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제로로 만들었을 때, 골고타의 은총은 비로소 그의 영혼을 온전히 덮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는 나를 증명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골고타로 향하는 길이며, 나를 밟는 사람에게도 향기를 묻혀줄 수 있을 만큼 철저히 부서지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작아질 수만 있다면 주님은 어떤 은총이라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한 영혼의 역사』에서 자신이 너무나 작고 약해서 성덕의 높은 계단을 오를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통해 거창한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느님이라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 위해 스스로를 아주 작은 어린아이로 만들었습니다. 『Petite Voie』는 선포합니다.
"내가 작아질수록 하느님의 팔은 나를 더 높이 들어 올리신다."
오늘 하루, 기도의 양을 채우려 애쓰기보다 골고타의 십자가 아래서 내 안의 자존심을 한 조각 깎아내는 일에 집중해 봅시다. 우리가 기꺼이 주님 앞의 강아지가 될 때, 주님은 당신 식탁의 풍성한 빵을 우리에게 내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사라진 그 자리가 바로 은총이 머무는 자리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나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내가 제일 나를 잘 알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신학교 입학 후, 저 자신에 대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무엇하나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부족함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과연 신부가 되는 것이 옳으냐는 생각이 계속되면서, 묵상 중에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게 힘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님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응원의 말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때의 제 모습을 보면 신부가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응원에 또 믿는다는 말씀에 힘을 얻어 조금씩 믿게 되었고, 실제로 이렇게 신부가 되어 지금까지 행복한 사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 ‘앎’이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도 또 자기 안에 잠재된 모습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고,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된 판단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만약 그 어떤 사람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주님을 떠올리고 믿어야 합니다. 분명 그 안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진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구약의 이제벨 여왕의 고향으로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이교도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 가셨다는 것은 유다교의 정결 개념을 지리적으로도 완전히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교도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사회적 금기를 깨고 예수님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라고 말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매우 가혹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화를 내며 그 자리를 걷어차고 떠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강아지도 가족의 일원이며, 주인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권리는 있지 않겠냐는 대답입니다. 그녀는 유다인들이 받는 혜택 전체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워낙 크시기에 부스러기만 있어도 자기 딸을 고치기에는 충분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여인의 딸을 치유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자격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에만 호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진정한 기도는 ‘내가 이만큼 했으니 들어주십시오’가 아니라, ‘저는 자격이 없으나 주님은 자비로우시니 도와주십시오’라는 태도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그리고 그 믿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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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한 책무가 있다(김진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크기로 나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도 빵의 맛과 생명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여인의 낮아짐은 굴욕이 아니라 신뢰의 표현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는 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낮아질수록 은총은 더 가까워지고, 비워질수록 사랑은 더 깊이 스며듭니다. 참된 신앙은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는 부스러기조차 은총이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몫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신앙의 자리입니다.
많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랑 한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작은 위로 하나, 짧은 말씀 한 구절, 잠시 스치는 친절의 한 순간이 우리 영혼을 다시 일으킵니다. 사랑을 위한 낮아짐은 가장 의로운 선택이며, 가장 낮은 곳이 가장 많은 것을 받는 자리입니다. 많이 가지는 것이 풍요가 아니라, 작은 것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태도가 참된 풍요입니다.
부스러기가 있다는 것은 이미 빵이 있었다는 뜻이며,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부스러기의 본질은 겸손과 가까움이며, 그 기쁨은 작음의 재발견입니다. 조용히 떨어지는 은총의 부스러기 하나가 오늘 나와 너를 다시 살립니다.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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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7장 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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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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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0 |
| 2026.02.0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09 |
| 2026.02.0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08 |
| 2026.02.0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07 |
| 2026.02.0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06 |
| 2026.02.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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