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신명 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 복음
루카 9,22-25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신명 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9,22-25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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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절제의 목적은 사랑이다.
사순 시기를 떠올릴 때면 우리는 십자가와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자연스럽게 절제와 고행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기에 절제와 고행의 삶을 봉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이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 시기에 절제하고 고행하는 까닭은, 먼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동참이 다만 그분을 따라 고통을 겪어 보는 데 그친다면, 그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자신의 고통을 자녀가 똑같이 겪기를 바라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제 십자가’, 곧 자기 몫의 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머리로는 생명의 길을 알면서도, 몸은 여전히 죽음의 길에 머무르려는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긴장과 모순이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처럼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그 어떤 고통도 우리를 그렇게까지 무겁게 짓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무거움은 결단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순 시기의 핵심은 고행의 강도가 아닌 주님과 함께하려는 결단의 진정성에 있지 않을까요?
2026년 사순 시기를 맞아 역설적인 꿈을 꾸어 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은 정말 ‘편안한’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기를. 곧 주님을 향한 결단이 두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기도가 더 절실해집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영성체송).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손을 잡으시다! 주님의 손을.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제가 가끔 죽음을 예감하거나 각오하는 듯한 말을 하면, 예를 들어 미래 어떤 일을 얘기하거나 계획할 때 제가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어떻게 아냐고 얘기하면 말이 씨가 되니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토록 죽음은 아예 입에 올리기도 싫어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생명과 축복을 죽음과 저주와 함께 우리 앞에 내놓는다고 하십니다. 사실 생명과 축복만 우리 앞에 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명과 죽음을 앞에 놓고 선택하는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일부 사이비 종교나 종파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자기들에게 끌어들이는데 삼박자 축복처럼 자기들 교회를 믿으면 축복만 받는 그런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들 교회를 선택하면 생명과 죽음 가운데서 선택할 필요가 없고,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꼬심에 넘어갑니까?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영적으로도 약하게 되는데 고통이나 죽음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 직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미시는 데도 그것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것이고, 하느님께서 손을 내미시는 것인데도 그것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을 우리에게 내미시고, 당신 손도 내미시며 생명을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당신 손을 잡고 건너면 된다고 하시며 손을 내미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밤에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라고 하셨습니다.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한번은 같이 또 한번은 따로입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만 호수를 건너고 다시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만 용기를 내어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하고 주님께서 그러라고 하시자 베드로도 물 위를 걸어 주님께 가는데 풍랑을 보고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만 보고 계속 갔으면 두렵지도 않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물을 보자 두려움에 빠진 것이고 물에도 빠진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다시 주님을 보고 살려달라고 청하고 주님께서 손을 내밀자 손을 잡고 극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죽음의 호수도 건너게 하시고 손도 내미시듯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생명과 죽음도 내미시고 구원의 손도 내미십니다.
직면하길 두려워하지 말고, 선택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것들을 내미시는 분이 당신이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앞에 내미신 생명과 죽음 앞에서 주님의 손을 잡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
오늘, ‘재의 수요일’ 후 첫 번째 날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곧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떠올리는 ‘신약의 십자가’ 이전에 있었던 ‘십자가’.
곧 ‘구약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십자가’(타브)는 구약에서 ‘계약의 표’로서 소유, 선택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원의 표’로 주어졌습니다(에제 9,4.6.). 그리고 이는 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종’과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5,5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들’이라 칭하며, <탈출기>(19,6)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또 하느님의 제사장으로서 ‘계약’을 ‘구원의 표시’로 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계약”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당신을 따르는 이’는 ‘계약’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의 길로 이렇게 제시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사랑으로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나를 죽일 수 없어서 그분이 오셨다.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는 오늘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당혹스러운 명령을 하나 내리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자신을 버리라는 것, 그러니까 자아를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한번 솔직해져 봅시다. 세상에서 제일 안 죽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나'라는 놈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 '나'를 위해 돈을 벌고, 옷을 입히고, 맛있는 걸 먹입니다. 어떻게든 남들보다 잘나 보이게 하려고 안달복달하며 살죠. 그런 나를 내가 죽이라니요? 이건 마치 내 손으로 내 목을 졸라야 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자아'가 고통의 원인이라는 걸 가장 먼저 간파한 건 불교입니다. 불교는 모든 괴로움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니, 수행을 통해 자아를 텅 비워버리는 '공'의 경지에 이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산으로 가고 벽을 보고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아가 자아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순간, '자아를 죽이려 노력하는 아주 거룩한 나'라는 더 크고 괴물 같은 자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삼사라'입니다. 주인공 타시는 오랜 수행으로 자신을 죽이려 하지만, 수행이 끝나고 세상에 나오자 욕망도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 그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건 고행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게 된 여인과 자녀들이었습니다. 그가 다시 승려의 길로 돌아가려 할 때, 아내가 그를 붙잡으며 묻습니다.
"부처가 고귀하다면, 그를 위해 버려진 아내와 아이들은 무엇입니까?"
타시는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 '홀로 거룩해지려는 나'라는 가짜 자아에서 비로소 해방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의지만으로는 이기심이라는 감옥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수술 집도의가 자기 뱃속에 있는 암세포를 직접 도려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겁니다. 내 힘으로 죽일 수 없는 나의 교만과 탐욕을, 그분의 사랑이라는 수술 칼로 직접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요? 답은 오직 '사랑'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죽는 건 의지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의 크기 때문입니다. 아이 키우는 어머니들을 한번 보세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녀들은 잠도 많고, 꾸미는 것 좋아하고, 맛있는 건 먼저 먹던 '자기중심적인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여자는 죽습니다.
새벽에 아이가 울면 천근만근인 몸을 벌떡 일으키고, 자기는 굶어도 아이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누가 시켜서 할까요? 아닙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 아이라는 존재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라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밀려 나가는 겁니다. 아이 때문에 엄마가 죽는 것이고, 그 희생을 먹고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성녀 가타리나의 일화는 이 신비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녀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녀의 저서 『대화』를 보면, 주님께서 가타리나에게 마음속에 작은 방 하나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의 이름을 '자기 지식의 방'이라고 부르게 하셨죠.
성녀는 이 방에서 자신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그 방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보아라."
성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0이라면 하느님은 무한대라는 사실을요. 내가 나를 죽이려고 고통스럽게 고행하는 것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은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성녀는 이 사랑 안에서 내면의 평화를 얻었고, 나중에는 교황님을 설득해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담대한 용기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나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참 행복을 얻게 될까요? 나를 만드신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신비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요한 복음서 21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가 만나는 장면이죠.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에게 "너 그때 왜 그랬니?"라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주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딱 하나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
이 질문은 베드로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자책과 수치심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기의 의지력이나 결단력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라고 고백합니다. 이 순간, 비겁했던 옛 시몬은 죽고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자아를 정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성격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아 괴로우십니까? 내 안의 이기심이 죽지 않아 실망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죽이려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대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 흘리신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완전히 매혹될 때, 나라는 감옥의 문은 저절로 열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을 멸시하는 데까지 이르면 지상의 도성이 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자신을 멸시하는 데까지 이르면 천상의 도성이 된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내 힘으로 나를 죽이려고 너무 애쓰지 맙시다. 대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십자가 앞에 더 오래 머무릅시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내 안의 욕심과 교만이 비좁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가게 만듭시다. 스스로를 죽일 수 없기에 우리에게 오신 그분을 기쁘게 맞이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잃고 하느님을 얻는 진정한 부활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확률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운에 의해 결정되는 나의 삶보다는 땀 흘리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삶이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또 이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확률 낮은 곳에서 쉽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또’입니다. 이를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앰브로스 비어스가 말합니다.
“로또는 수학 못 하는 사람들에게서 떼어가는 세금이다.”
이 세상은 확률 낮은 곳으로 ‘나’를 이끌려고 합니다. 부, 지위, 명예…. 하지만 이를 얻기 위한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또 이 낮은 확률을 뚫고 지나가는 삶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은 낮은 확률은 나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나’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삶만이 높은 확률로 행복할 수 있도록 합니다. 높은 확률이 훨씬 더 쉽게 행복할 수 이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쫓아야 할까요?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세상이 기대하는 영광과 권력의 길이 아닌,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길이 그리스도의 길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주님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분명 어렵고 쉽지 않은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확률로 진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첫 번째,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삶의 중심에 주님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날마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지속적인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40일간의 반짝 이벤트가 아닌, 매일 삶을 변화시키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닌,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 사명, 고통 등을 거부하지 않고 짊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모습을 따라야만 제1독서에서 모세가 외쳤던 ‘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자기희생적 사랑) 삶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이 없는 세상이란 없다. 다만 희망을 잃은 몇몇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뿐이다(헬렌 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진정한 참생명입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자기봉헌의 길입니다. 자기봉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은총은 우리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길 때, 더욱 살아납니다. 그동안 나의 의지를 과도하게 내세웠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과도한 애씀은 오히려 생명을 메마르게 했습니다.
은총을 망각한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는 은총의 사순입니다. 은총의 중심으로 돌아설 때, 매 순간은 은총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이 곧 생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 생명은 지켜집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선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길 때 인간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삶은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할 때, 우리는 잃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을 얻습니다. 참생명을 가르쳐주는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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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0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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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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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7 |
| 2026.02.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6 |
| 2026.02.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5 |
| 2026.02.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4 |
| 2026.02.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3 |
| 2026.02.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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