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58,9ㄷ-14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복음
루카 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58,9ㄷ-14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가톨릭 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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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1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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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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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죄의 본질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이가 ‘회개’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잘못을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이 전하는 회개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은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회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친다’와 ‘돌린다’는 분명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고친다.’는 뜻의 회개는 잘못을 없애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은 다릅니다. 오히려 잘못을 계기로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회심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죄는 어떻게 되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아도 그저 하느님만 찾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개념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것도 죄이지만, 더 근본적인 죄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이어 갈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고자 하면서도 되풀이하게 되는 잘못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약함일 뿐이며,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힘과 자비를 청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구자와 파괴자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오늘 복음의 말씀 중에서 두 가지 단어 곧 “그러자”와 “그래서”가 눈에 특히 들어왔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래서’ 투덜거리는데 레위는 ‘그러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공동체에는 항상 이런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깨는 부류와 공동체를 건설하는 부류입니다. 투덜이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주님께서 뭘 가르치셔도,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주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형제들에게 투덜거리며 더 나아가 쫓아냄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이들의 시선은 주님께 가 있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 가 있으면서 불평불만하고, 단죄하고, 쫓아내기만 함으로써 공동체를 깹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단죄하며 공동체에서 쫓아낸 이들을 주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 도구 삼아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러자 그는 즉시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보이는 자세입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의 첫 제자들이 그러했고 프란치스코도 그러했음을 전기 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넘쳐 방금 들은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이리하여 그는 산다미아노 십자가의 주님께서 “가서, 무너져 가는 내 집을 고쳐라.” 라고 하신 말씀을 완수하게 되고 오늘 독서가 얘기하는 ‘복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복구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며,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고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 다만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아는 죄인이 있고 단죄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단죄하는 죄인은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깨는 데 비해 회개하는 죄인은 주님의 부르심 받은 레위가 다른 죄인들도 주님의 식탁에 초대하듯 죄인들의 회개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이 사순 시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회개의 공동체로 부르시며 죄인일지라도 같은 죄인에 대한 연민으로 사랑할 줄 아는 죄인이 되라 부르시는데, ‘그러자’ 즉시 주님을 따르는 우리입니까? 내일로 미루는 우리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렇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5,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용서하시고
저도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 하십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칭찬받음보다 비난받음이 이득인 이유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의 첫 토요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며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왜 건강검진을 잘 안 받을까요? 겉으로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주 고약한 '교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병원을 완전히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제일 잘 알지, 의사가 뭘 알겠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착각합니다. 무엇보다 싫은 건, 병원 가서 제 치부를 드러내고 의사에게 "술 끊으세요, 살 빼세요" 하는 잔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의사의 지시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그 오만한 마음, 즉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은 그 교만이 저를 병원 문턱에서 돌려세웁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지, 꾸중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 혹은 성당에 나오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번듯해진 다음에 주님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레위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일어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가 봐도 죄인이었고,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숨길 가면조차 없는 절박한 상태에서 자신을 치유해 줄 단 한 분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바로 레위가 가졌던 '솔직한 겸손함'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죄인이었기에, 거룩한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거룩함을 증명하느라 주님의 자비가 들어갈 틈을 막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다 보면, 결국 나 자신조차 그 연극에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당에 나와서도 내 상처를 내놓는 게 아니라, 내 거룩함을 자랑하기 바쁩니다. 병원에 와서 내시경을 받는 대신 복근을 자랑하는 환자가 되는 꼴입니다.
사실 인간은 타인이 먼저 나를 죄인으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 자신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곤 합니다. 가면이 완전히 찢겨나가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을 때 비로소 정직해지는 것이지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면서도 거룩했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9세기 프랑스의 왕이었던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의 이야기입니다. 833년, 그는 정적들과 아들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수아송(Soissons)의 성 메다르도 수도원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주교들은 그에게 만천하에 죄를 고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루이는 수많은 군중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려한 왕의 예복을 벗어 던져야 했습니다.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위선을 하나하나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수아송의 치욕'이라 부르지만, 영성적으로는 '수아송의 부활'이라 부릅니다. 루이는 온 나라가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하자, 더 이상 '위대한 왕'이라는 가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그의 가면을 벗겨버리자, 그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정직한 단 한 명의 죄인으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솔직함이 그를 지옥 같은 절망에서 끌어올려 하느님의 자비를 붙들게 만든 것입니다. 레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죄인이라 불렀기에, 그는 오히려 자유롭게 예수님의 청진기 앞에 심장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입니다. 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이 파격적인 통찰은 교회가 이미 깨끗해진 사람들의 전시장(Casta)이 아니라, 창녀와 같은 죄인(Meretrix)들이 주님의 부르심으로 '순결해지는 중'인 병원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당은 이미 치유된 사람이 자신을 뽐내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을 존중하는 길은 내가 아플 때, 혹은 아프지 않더라도 내 영혼의 숨은 병명을 찾아내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눕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등장하는 '위스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생아를 둔 술꾼이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해를 들어주다 잡힙니다. 처형 전날 그는 감옥 바닥에서 절망합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께 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갑니다." 그는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독한 죄의 통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천하에 죄를 드러내는 겸손함이야말로 주님의 자비를 가장 선명하게 듣는 청진기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게 만드십시오. 죄를 지으란 말이 아닙니다. 고해성사하듯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이 칭찬해주는 '마약'에 취해 삽니다. 그 달콤한 칭찬은 우리 영혼의 암세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습니다. 이 마약에서 깨어나려면, 나를 비난하고 나의 허물을 지적하는 타인을 '나의 죄를 알려주는 고마운 스승'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스페인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역시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Pati et contemni pro te."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받고 멸시받게 하소서.) 왜 성인은 이런 당혹스러운 청을 드렸을까요? 타인의 멸시가 내 자아라는 두꺼운 껍질을 부수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오게 하는 유일한 수술 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우리를 부풀게 하지만, 멸시는 우리를 진실하게 만듭니다.
사막 교부들의 일화집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아바 모세(Abba Moses the Black)의 이야기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날 수사들이 그를 시험하려 "저 검둥이 죄인 출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모욕했습니다. 회의 후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 덕분에, 나는 내 영혼이 그보다 훨씬 더 시커멓다는 진실을 떠올렸소. 그들은 내 영혼의 때를 벗겨주는 고마운 비누들이오."
마지막으로 성 요한 클리마코(St. Joannes Climacus)의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그대들의 잘못을 꾸짖고 허물을 드러내는 자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십시오. 그들의 혀는 그대들의 영혼에 묻은 교만의 비계를 도려내는 의사의 수술 칼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다이어트 끝내고 검진받겠다는 영적 교만을 버립시다. 타인의 칭찬이라는 마약을 끊고, 나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드러냅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제 안의 병을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시고 고쳐주십시오!" 이 정직한 절규가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는 전능한 의사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비참한 환자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받아들여야 삶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 속에 삽니다. 자기 생각과 행동이 확실하면 곧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이 착각 속에서 스트레스를 겪으며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뇌는 고통보다 불확실한 가능성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100% 확률로 전기 충격을 받는 것보다 50%의 불확실한 확률 앞에 놓였을 때 더 큰 불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 불확실성과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안감을 줄여나가고 대신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높이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도 불확실한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평화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리 레위가 등장합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동족을 수탈하는 매국노이자, 부정한 돈을 만지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조차 박탈당했고, 회당 출입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런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여기서 ‘보시고’의 그리스어 동사는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은 그를 경멸의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눈으로 그 안의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라.”(루카 5,2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또 어떤 대가를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분명 불확실한 말씀인데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숨기지 않고 큰 잔치를 베풉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깊은 유대감과 형제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율법학자들은 죄인과의 식사를 부정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보다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중병(교만, 탐욕, 미움)에 걸려 있는지 의사이신 주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건강검진 성적표가 좋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환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용기를 내어 자신의 열정을 좇아라. 아직 그게 뭔지 모르겠다면 자신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을 찾는 것임을 깨달아라(오프라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자격이 아니라 은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과거로만 규정되지 않습니다. 부르심을 통해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는 부르심입니다. 비난은 관계를 끊지만 자비는 관계를 회복합니다. 레위의 일어남은 타인을 바꾸기 전 자신을 바로 세우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레위는 “세리”라는 규정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 존재를 다시 씁니다. 우리 자아는 혼자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우리 존재는 과거의 규정 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오늘의 선택 속에서 새로워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과거를 묻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게 하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은총으로 은총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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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58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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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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