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58,7-10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 - 제2독서
1코린 2,1-5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 -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58,7-10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2,1-5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가톨릭 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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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8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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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소금 한 꼬집 같은 신앙의 힘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마태 5,13-14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를 ‘복음의 실천’이라는 삶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복음 실천을 너무 거창한 일로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핑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해도 안 돼.” 하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을 조금 더 단순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맛있는 떡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적당한 ‘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있는 떡은 소금 간을 잘한 떡입니다. 그렇다고 짠맛이 도드라질 정도는 아니지요. 그러나 소금을 아예 넣지 않으면 밍밍하고 맛없는 떡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능력과 여건이 되어 크고 거창하게 복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참으로 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내 몫을 다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의 (첫 번째) 신분증은 기쁨으로 인도하는 참행복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신자를 보고 성당에 가고 싶다거나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이라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꺼내어 먼저 내밀 수 있는, 딱 이 정도로 ‘신앙인의 티’를 내 보면 어떨까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초대에 응할 것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오늘 이 말씀은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선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도 그렇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과 오늘 마태오복음을 연결하여 보면 세상의 빛이신 당신을 따라 세상의 빛이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할 것이냐 그것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을 보겠는데 사실 우리는 빛이 아니고 그러니 세상의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고 빛이신 주님 안에 있을 때만 또는 빛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실 때만 빛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어둡다면 왜 어두운지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안 계신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내가 세상의 빛이 못 되는 이유도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관건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 초대에 응할 것이냐?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거부하거나 사양하겠습니까? 거부하거나 사양한다면 왜 거부하고 왜 사양합니까? 거북하니까 거부합니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거북하지요. 내가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고 하는데 실은 나의 어둠이 오히려 세상에 드러나기가 십상이지요.
근자에 많이 봤듯이 그냥 보통 사람으로 있었으면 드러나지 않을 것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오르려 하면 백일하에 다 드러나 망신당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다 드러나고 이목이 쏠리는 것이기에 거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엄청난 초대에 응하려면 그만큼 큰 사랑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큰 사랑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내 좋을 대로 하는 작은 사랑을 합니다. 좋을 대로 하다가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어둠 속에 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아(小我)를 깨고 진아(眞我)를 찾아 나서야 하고,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하여 과감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이고 이것이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큰 사랑입니다. 그다음에야 하느님 사랑 까닭에 그리고 이웃 사랑 까닭에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세상의 빛이 되려다 내 어둠이 드러나 망신당하기도 하고, 나의 사랑과 선행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보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거룩히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나려는 위험도 있지만 내 욕심보다 사랑을 더 크게 함으로써 오직 사랑 까닭에 세상의 빛이 되는 겁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빛을 '비추는 사람'이 아니라, '빛인 사람'으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인가?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16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명품은 스스로 라벨을 붙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엄청난 정체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백화점 명품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혹시 시장에서 파는 가방과 명품 가방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아십니까? 비가 올 때 반응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비가 쏟아질 때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면 시장표고, 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내 머리가 젖는 걸 선택하면 명품이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뼈가 있습니다. 명품은 스스로 “나 비싼 거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만든 장인이 붙인 ‘라벨’과, 그것을 소유한 주인의 ‘태도’가 그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야”, “나는 좋은 엄마야”라며 스스로 라벨을 붙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붙인 라벨은 가짜입니다. 진짜 라벨은 오직 나를 만드신 분만이 붙여주실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내가 나를 규정하려고 할 때, 인간은 길을 잃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 귄트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유혹에 빠져 평생을 방랑합니다. 그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예언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세계의 황제’라 칭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밭에서 양파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 껍질은 부자였던 나, 이 껍질은 예언자였던 나... 그런데 알맹이는 어디 있지? 아무리 벗겨도 중심이 없구나.”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수많은 가면을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절대적인 정체성을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껴안고 울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철학자는 가장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창조주를 잃은 피조물의 고독한 최후였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누가 나를 규정해 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1920년 인도 늑대 굴에서 발견된 두 소녀, 카말라와 아마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고 늑대 틈에서 자랐습니다. 발견 당시 그들은 네 발로 기고, 날고기를 먹으며, 밤에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세울 수 없습니다. 늑대와 대화하면 늑대가 되고, 하느님과 대화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반대로, 권위 있는 누군가가 긍정적인 라벨을 붙여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버드 심리학과 로젠탈 교수의 ‘피그말리온 효과’ 실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은 학생들의 명단을 교사에게 주며 “이 아이들은 지능지수가 높은 영재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종의 ‘규정’을 지어준 것이지요.
교사는 그 권위 있는 교수의 말을 믿고 아이들을 ‘영재’로 대우했습니다. 눈빛, 말투, 기대감이 달라졌습니다. 8개월 후, 놀랍게도 그 아이들의 성적은 실제로 급상승했습니다. 권위 있는 자의 긍정적인 규정이 평범한 아이를 비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에디슨이 받아온 편지에는 “댁의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어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에디슨에게 편지를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아드님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수준이 너무 낮아 아드님을 가르칠 수 없으니 어머니가 직접 가르쳐주세요.”
어머니라는 절대적 권위자가 “너는 천재”라고 규정해 주었기에, 에디슨은 평생 자신을 천재로 믿고 살았고 실제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규정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로젠탈 교수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창조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진짜 믿어지십니까? 솔직히 거울을 보면 소금은커녕 곰팡이 같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 선언이 믿어지려면 ‘보증’이 필요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전과자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발장, 잊지 마시오. 나는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샀소. 자네는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이오.”
은촛대라는 값비싼 대가, 즉 희생을 치르고 붙여준 이 새로운 라벨이 장발장을 성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대가가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의 화장품으로 엉망진창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혼냈겠지만, 어머니는 “어머, 이건 여동생 샐리구나!” 하며 아들에게 진한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훗날 거장이 된 벤자민 웨스트는 말했습니다.
“나를 화가로 만든 것은 그때 어머니의 키스였다.”
어머니의 키스가 그를 화가로 만들었듯,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그분의 ‘피(Blood)’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키스이자, 우리 영혼에 찍힌 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값을 치르고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빛이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라는 닭장에 살고 있는 독수리들입니다. 어느 농부가 독수리 알을 주워 닭장에서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 닭을 따라 모이를 쪼며 “나는 닭이다”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물학자가 와서 그를 절벽으로 데려가 던지며 외쳤습니다.
“너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하늘이 너의 집이다, 날아라!”
처음에는 믿지 못해 퍼덕거렸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과 학자의 외침을 믿고 날개를 펴자 창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흙수저가 아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알려주시는 동물학자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그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분이 붙여주신 라벨을 믿고, 닭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소금임을 믿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빛임을 믿고 올바른 삶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할 때, 그것을 믿고 매일 할 때, 우리는 진짜 빛과 소금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해질녘, 부부가 하루 일을 마치고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 생각나십니까? 밀레의 ‘만종’입니다. 밀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난에 쪼들렸던 화가였던 것입니다.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친구가 찾아와 “자네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라면서 3백 프랑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그에게 그 돈은 더할나위없이 귀했고, 무엇보다 자기 그림이 드디어 인정받았다면서 자부심과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림에 더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 그의 작품은 화단의 호평을 받으며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그림을 팔아줬던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집에 3백 프랑에 팔렸다는 자기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직접 사준 것임을 이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우정과 배려가 지금의 밀레가 있게끔 해준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커다란 변화를 불러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이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자기가 받을 사랑에만 집중하고, 자기 이익에 중심을 둡니다. 이때 과연 변화가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다’라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하신 것입니다. 소금의 기능은 첫째, 부패 방지입니다. 당시에는 냉장 시설이 없었기에 음식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죄와 타락으로 부패해 가는 세상 속에서 영적인 방부제 역할을 하라고 하십니다.
둘째, 맛을 내는 기능입니다. 소금 없는 음식이 과연 맛있을까요?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은 정화와 계약입니다. 구약에서 소금은 제물을 정화하는 데 사용했고, 변하지 않는 약속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이어지는 빛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빛의 본질은 드러남과 다른 사람을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등경 위의 등불처럼 우리의 신앙이 나만을 위한 위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이웃을 비추기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로써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사 58,8)입니다.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주변 사람들에게 살맛을 줄까요? 아니면 상처를 줄까요? 살맛을 주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변화가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윌리엄 프레데릭 홀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처럼 먼저 녹는 법을 배웁니다. 녹아 사라지면서 다른 존재의 맛을 기꺼이 살리는 소금의 신비입니다. 소금은 침묵의 참된 봉헌입니다. 눈에 띄지 않고, 말이 없으며, 성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운 삶일수록 자신의 이름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편안함만을 주지 않고, 소금처럼 때로는 회개와 변화라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을 바꾸기보다 세상이 썩지 않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입니다. 소금은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다.
기억되는 것은 소금이 아니라 살아난 맛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존재로 누군가의 삶을 살아 있게 하고 있는지 조용히 묻습니다. 드러나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보시는 자리에서 묵묵히 머무를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좋은 관계입니다.
소금은 결코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맛은 소금 덕분에 제자리를 찾습니다. 소금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작용은 가장 깊어집니다.
우리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공동의 생명을 살리는 실천의 정신입니다. 실천의 정신은 생활을 살리는 소금의 자리입니다. 빛나는 존재보다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는 소금의 삶입니다. 소금처럼 산다는 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드러나지 않게 생활을 지켜 내는 사랑의 삶입니다. 생활이 곧 소금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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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5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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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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