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2사무 24,2.9-17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 복음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사무 24,2.9-17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 무렵 다윗
2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9 요압이 조사한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 유다에서 오십만 명이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이튿날 아침 다윗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에게 내렸다.
12 “다윗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서 일러라.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을 터이니, 그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13 가드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알렸다. “임금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을 뒤쫓는 적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 다니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 나라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 좋습니까? 저를 보내신 분께 무엇이라고 회답해야 할지 지금 잘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가드에게 말하였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17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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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4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교황님 2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39
✚ 강론시작 09:1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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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아는 신앙이 아니라, 따르는 신앙으로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특히 듣기 싫은 말을 들을 때 더 그렇지요. 어쩌면 이 말의 속뜻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일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알았어요.” 한마디로 대화를 닫아 버리고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을 막고, 마음을 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처음에는 감탄하지만 곧 그분의 출신과 신분을 문제 삼으며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하였지만, 정작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이성만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무한히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지혜의 말은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이런 겸손이야말로 신앙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 더 이상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요. 이에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이 그것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바라고 청하는 이는 자만하거나 고집스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허물은, 내 뜻이 전부인 줄 아는 교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화답송을 되뇌어 봅니다.
“주님,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 못마땅한 심사가 잘 드러나는 표현이 ‘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 표현보다 그들의 심사를 더 잘 드러내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분’도 ‘저 사람’도 아닌 ‘저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사를 실감 나게 드러내는 번역을 제가 한다면 ‘저자가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번역함이 좋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라면 주님을 절대 그렇게 지칭하거나 번역하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지칭하고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가요? 자기들이 지닐 수 없는 지혜를 주님께서 지니고 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향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보겠습니다. 우선 그들은 인간적으로 자기들은 그대로인 데 반해 주님께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하신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했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부족을 인정하지 못했고, 교만하게 주님의 지혜로움과 능력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잘못이라면 신앙적인 잘못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봤기에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는 것임을 봤다면 그것이 하느님께 온 것임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뛰어넘는 것 곧 초월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어야만 하느님 나라의 그 영적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 동네나 누구의 친척 같은 것을 고집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없으며 용은 결코 개천에서 날 수 없겠지요.
같은 식으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는 없고 자기 동네에 오셔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같은 식으로 나와 오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고,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도 같이 계심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만 있는 것이고 나만 있어야 합니까? 그에게 하느님은 안 계시고 하느님이 함께 계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와 늘 함께 있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고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고향 사람일 뿐이고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 나의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보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4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어야 할 가장 명확한 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익숙하지만,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셨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고, 형제들도 다 우리가 알지 않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안다’는 확신은 예수님을 ‘목수’라는 작은 상자 안에 가두는 감옥이 되었고, 결국 그분의 신성이 들어올 틈, 즉 기적을 막아버렸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향해 “아유, 내가 너 속을 다 알지. 너는 딱 여기까지야”라고 단정 짓는다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오늘 저는 아주 명확한 인간관계의 법칙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향해 “나는 너를 다 안다”라고 말하며 여러분을 자신의 낡은 지식 상자 안에 가두려 한다면, 그때가 바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다’는 말은 사실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너를 궁금해하지 않겠다”는 절교 선언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1. 엄마의 빗나간 사랑: 블랙 스완의 비극
이 무서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입니다. 주인공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발레리나입니다. 그녀의 엄마 에리카는 왕년에 발레리나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여인입니다. 엄마는 딸 니나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아니,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엄마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합니다. 손톱 깎는 것부터, 식사량, 심지어 잠잘 때 자세까지 간섭합니다. 엄마는 늘 말합니다.
“니나, 엄마는 널 다 알아. 넌 내 딸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엄마가 ‘안다’고 확신했던 니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착한 딸’이라는 인형일 뿐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규정했듯, 엄마는 니나를 ‘착한 딸’로만 규정하고 그 이상의 가능성(예술적 열정)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니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그 좁은 감옥을 깨부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광기의 춤을 추게 됩니다. “너를 안다”는 엄마의 말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고,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저주였습니다.
2. 자베르 경감의 자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 경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법과 원칙의 화신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딱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법을 지키는 선인과, 법을 어긴 죄인. 그는 장발장을 쫓으며 확신합니다.
“범죄자는 영원히 범죄자다. 개꼬리가 3년 묵는다고 황모가 되더냐?”
그는 장발장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발장은 변했습니다. 은촛대를 받고 영혼이 뒤집힌 장발장은 성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베르 경감이 혁명군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살려준 건 다름 아닌 장발장이었습니다. 자베르는 혼란에 빠집니다.
“범죄자는 악당이어야 하는데, 나를 살려주다니? 내 데이터에 오류가 생겼다!”
그는 자신이 평생 믿어왔던 낡은 지식 체계가 무너지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그는 판단을 멈추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했습니다.
3. “오늘의 김우진은 어떤 모습인가요?”
반대로, 상대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궁금해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보셨나요? 남자 주인공 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매일 모습이 바뀝니다. 오늘은 노인, 내일은 아이, 모레는 외국인 여자...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그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한 여자 이수는 다릅니다. 그녀는 매일 바뀌는 낯선 얼굴들 속에서 우진 고유의 눈빛, 말투,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묻습니다.
“오늘의 김우진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녀에게 사랑은 ‘파악 완료’가 아니라 ‘매일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도 그랬습니다. 그는 ‘루앙 대성당’을 그릴 때, 똑같은 성당을 수십 번 그렸습니다. 아침의 성당, 점심의 성당, 비 오는 날의 성당...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아니, 다 아는 성당을 뭐 하러 또 그립니까?” 모네는 답했습니다.
“빛에 따라 성당은 매 순간 다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성당을 보고 싶습니다.”
대상을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빛(은총)에 따라 매 순간 새롭게 변화하는 생명으로 바라보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4.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호기심의 상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하느님을 다 파악하고 나서 “아, 이제 알 거 다 알았으니 좀 쉬자” 하며 하품하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4세기 신학자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신앙생활을 ‘에펙타시스(Epektasis)’, 즉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그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지루한 휴식이 아니라, 매 순간 하느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와! 당신은 이런 분이셨군요!”라고 감탄하며 더 깊이, 더 높이 빨려 들어가는 역동적인 모험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 아, 그분 하느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뭐 착하게 살라고 하셨지. 나 다 알아!” 하며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다 안다”고 말하며 성경책을 덮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무한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내 좁은 머릿속에 갇힌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결론: 영원한 연애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어야 할 가장 명확한 때가 언제냐고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난 널 다 알아. 넌 변하지 않아”라며 나의 가능성을 닫아버릴 때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쟤는 원래 저래”라며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 사랑은 끝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권태기 부부처럼 “당신 얘기는 안 들어도 뻔해” 하며 10분도 안 되는 복음 말씀을 흘려듣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처음에는 ‘유다 남자’로 알았다가, ‘선생님’으로, ‘예언자’로, 마침내 ‘그리스도’로 앎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물동이를 버리고 뛰쳐나가는 그 설렘을 회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매일 새롭습니다. 그분에 대한 호기심이 살아날 때, 나자렛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서는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아직 모릅니다. 오늘 저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호기심 가득한 질문 하나가, 오늘 여러분의 하루를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가슴 뛰는 천국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화가 당신을 버리는 것보다 당신이 먼저 화를 버려라.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우리 자신도 괴롭히는 고통을 안겨준 화, 우리는 좋지도 않은 그 일에 귀한 인생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가! 화를 내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로마 시대 철학자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 중의 내용입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긴 삶인 것 같지만 짧은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10대에는 지금의 50대가 과연 올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50대를 살면서, 10대에서 지금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따라서 짧은 인생을 좋은 생각으로 지금 기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할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을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정의 마음을 벗어 버리고, 긍정의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긍정의 마음을 살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부정의 마음을 살게 되면 모든 것이 불평불만이 되고 맙니다. 과연 어떤 삶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겠습니까?
어제 복음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셨습니다. 이방인 지역과 유다 지역을 오가며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바로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불신으로 반응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지독한 편견으로 함께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를 예수님에 대해 “저 사람은 목수로서”(마르 6,3)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에서 알게 됩니다. 목수는 육체노동자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육체노동을 전혀 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위의 표현은 ‘육체노동자 주제에 무슨 랍비 행세야?’라는 계급적 편견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요셉이 사망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 역시 비하의 발언입니다.
‘내가 다 안다’라는 식의 교만은 하느님의 새로운 활동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믿음 없음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믿음과 만나야지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짧다고 할 수 있는 지금의 삶을 믿음 없이 부정의 마음으로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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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마라.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찬 바람 속에서도 씨앗은 이미 봄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생명의 입춘(立春)입니다. 고향과 친척, 집안은 우리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곳이기에 변화된 우리를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자리입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인정받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데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형성된 이미지와 역할에 그를 가둡니다. 예언자는 특별하지 않고 너무 평범하기에, 오히려 신뢰받지 못합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예언자는 칭찬에도 들뜨지 않고, 거부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인정받지 못해도 자기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오히려 가장 맑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언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판단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진리는 말해질 때보다 살아질 때 더 자주 배척당합니다.
사라진 것은 말씀의 힘이 아니라, 말씀을 맞이할 우리의 빈 마음입니다. 예언자의 길은 말을 많이 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끝까지 남아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이해받지 못해도 작은 진실을 지켜나가는 우리들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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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기 하권 24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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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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