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스바 2,3; 3,12-13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라. - 제2독서
1코린 1,26-31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 복음
마태 5,1-12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스바 2,3; 3,12-13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라.
3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3,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1,26-31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5,1-12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가톨릭 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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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서울 길동성당 소개 00:21
✚ 미사시작 01:33
✚ 강론시작 16:4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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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3고'로 걷는 신앙의 길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선뜻 다가오지 않는 말씀, ‘행복 선언’이 선포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고난과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의미가 고귀할지라도,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이 물음을 함께 묵상하기 위하여 ‘3고’라는 신앙 여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3고’는 바로 ‘고통–고독–고상(고귀함)’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는 기도조차 쉽게 잊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면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시련 앞에서는 무력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고독을 마주하게 되지요. 이 고독은 우리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근원적 자각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의 시간을 지나면서 사람은 조금씩 고귀함과 깊이를 배우게 되며, 이 여정을 통하여 참된 기도와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과 고독을 통하여, 진정 당신을 찾는 고귀한 삶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스바 3,13)는 바로 이러한 여정을 충실히 걸어간 성인들의 상징입니다. 우리 또한 이 시대의 ‘남은 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신앙인의 ‘3고’를 함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는 이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을 찾아 산 위로 오르겠는가?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지난주일 복음은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허약한 이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지나치지 않고 눈여겨본다면 이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행복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데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신 것과 거기에 자리 잡고 가르치신 점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평지에서 첫 제자들도 부르시고,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주신 다음 굳이 산 위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행복에 관한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행복에 관한 비결을 그냥 평지에서 계속 가르치시지 않고 주님께선 왜 굳이 산에 올라가시어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만 가르쳐주실까? 또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이란 누구인가? 주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첫 제자 넷인가? 아니면 그들 말고도 군중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명백하게 풀어 줄 단서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군중들을 보시고 산 위로 오르셨다는 점이고, 거기까지 올라 온 제자들에게 행복 비결을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군중 모두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도 궁금해하겠지만 그 행복 비결을 알려면 산 위로 올라오라고 초대한 사람 가운데서 산 위에 올라 온 사람들 곧 행복 비결을 꼭 알려는 열성이 있는 사람들만 주님께서 제자로 여기시고 가르쳐주신 것일 겁니다.
실로 행복은 누구나 원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끝까지 탐구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예수님께 그 답을 얻으려는 사람은 더 많지 않습니다. 그저 돈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고 돈 열심히 벌며 일생을 살고, 재물과 지위와 명예를 누리며 희희낙락하면 그것이 행복인 줄로 알고 일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군중과 달리 주님의 진실한 제자들이라면 산에 오를 정도까지 참 행복에 관한 갈증과 갈망이 있어야 하고 다른 이의 행복 비결이 아니라 주님의 행복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란 주님께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신 행복은 역설적입니다. 가난해야 행복하고 특히 영으로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사실 부유할 때는 누구나 행복할 수 있고 그런 행복은 누구나 찾습니다. 그런데 부유할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해도 하느님 나라 때문에 행복한 영적인 행복은 제자들만 찾습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살 때뿐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행복하고, 죽고 난 뒤에 더 행복하기에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참 행복 비결이고,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완전한 행복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행복 비결을 따르겠습니까? 이 비결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행복을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스바니아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예고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스바 3,13)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주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으니”(1코린 1,30 참조) 우리의 행복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 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1-12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낙원의 저주는 고통이 사라질 때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일론 머스크는 다가올 2040년에는 인간의 수보다 많은 100억 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보급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인간이 하기 싫은 모든 노동, 위험한 일, 심지어 귀찮은 가사노동까지 AI 로봇이 완벽하게 대신해 주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땀 흘려 일할 필요도, 육체적인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는 꿈같은 ‘지상 낙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미 이 완벽한 낙원의 결말을 시뮬레이션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동물행동학자 존 칼훈(John B. Calhoun) 박사의 그 유명한 ‘유니버스 25(Universe 25)’ 실험입니다.
칼훈 박사는 쥐들이 살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천적도 없고, 질병도 없으며, 먹이와 물은 무제한으로 공급되고, 온도마저 쾌적하게 유지되는 그야말로 ‘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고통과 결핍이 ‘0’인 세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쥐들이 폭발적으로 번식하며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개체 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지자, 쥐들은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 중 ‘아름다운 존재들(The Beautiful Ones)’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짝짓기도 하지 않고, 다투지도 않고, 사회적 교류도 끊은 채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자신의 털을 다듬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털은 윤기가 흐르고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죽어 있었고 영혼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완벽한 낙원에서 쥐들은 서로를 공격하거나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단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전멸했습니다. ‘고통’이 사라지자 ‘생명력’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AI가 우리에게 줄 미래가 바로 이 ‘유니버스 25’가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간절함도 없고, 슬픔이 없기에 위로도 필요 없는 세상. 그곳에서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들’처럼 겉모습만 매끈한 껍데기가 되어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선포하신 행복 선언, 곧 진복팔단은 이 멸종을 막을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주님께서는 그 결핍과 슬픔이야말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숨구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어 죽어가느니, 고뇌하는 소크라테스가 되어 영원을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낙원의 저주는 자기를 극복하려는 고통이 사라질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진복팔단은 행복해지려면 고통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면담하자고 찾아오셨습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하셨고 평생 교편을 잡으신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자신이 환시를 보고 환청을 들으며 신비스러운 꿈을 꾼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자매님, 그것은 100%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분의 표정에는 평화가 없었고, 삶의 열매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렸을 때 유체 이탈을 경험했고 신비한 십자가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대학 이후로는 30년 넘게 냉담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받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제품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음성을 딱 한 번 들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힘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에서 오는 것은 영원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을 남깁니다.
이 자매님이 그런 영적 환상에 빠진 이유는 행복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권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할 자기 부정의 고통은 회피하고, 신비한 체험이라는 ‘영적 마약’만을 찾은 것입니다.
장차 AI 시대가 오면,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도 되는 수많은 사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매님처럼 될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에 갇혀, 결국 고통으로 맺어지는 진실한 인간관계에서 멀어진 채 환상의 공간에서 부유하는 존재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다시 외쳐야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만날 수 있는 구원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주인공 미자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홀로 손자를 키우는 예순여섯의 할머니입니다. 그녀는 시를 배우고 싶어 문화센터에 다니지만, 좀처럼 시 한 줄을 쓰지 못합니다. 어쩌면 시가 나올 수 있는 순수함과 감수성을 너무도 오래 잃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던 중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 찾아옵니다. 마을의 한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소녀를 괴롭혀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 속에 미자의 손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들은 돈으로 이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합니다. 그 속에서 미자는 갈등합니다. 손자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밥만 잘 먹습니다. 그렇더라도 유일한 혈육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손자가 감옥에 가고 자기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미자는 진실을 감춥니다. 그러자 더 이상 시가 써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미자는 죽은 소녀가 떠내려왔던 개울가를 지나게 됩니다. 마침 돌풍이 불어 미자가 아끼던 예쁜 흰 모자가 날아가 개울에 빠집니다. 모자를 건지려다 미자는 물에 젖습니다. 자신의 모자도 소중한데, 문득 저 차가운 물 속에서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갔을 소녀가 사무치게 불쌍해집니다. 그 아이가 느꼈을 공포와 차가움을 미자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 고통을 마주한 순간, 미자는 결단합니다. 그녀는 경찰에게 손자를 신고합니다. 뼈를 깎는 아픔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가 경찰에 잡혀간 뒤, 비로소 개울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생애 첫 ‘시’를 쓰게 됩니다.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자는 고통을 회피하여 지하로 숨는 대신,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하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고통을 통해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영혼의 훈련소’입니다. 그렇지 않고 고통을 거부하면, 유니버스 25의 쥐들처럼 영혼이 소멸하거나 가리옷 유다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일만 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고통당하는 법을 배우라”는 명령입니다.
최근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웹툰 작가이자 방송인인 기안84와 배우 권화운 씨가 보여준 극한의 도전이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기안84는 아프리카와 북극을 달리는 도전에 이어, 이번에는 7시간이 넘는 지옥 같은 마라톤 코스 앞에서 결국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함께 뛴 배우 권화운 씨 역시 다리에 극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20km를 더 달리는 독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편안한 집에서 쉬면 그만일 텐데, 왜 스스로 지옥 같은 고통 속으로 뛰어드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을 이겨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 즉 ‘나를 이겨냈다’는 벅찬 자존감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을 이기기 위해 선택한 고통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입니다. AI는 절대로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십자가라는 고통을 짊어지는 사람만이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존엄한 인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거룩한 고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어떤 학생이 “이번에 합격만 되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합격 된 후에는 그 어떤 소원도 없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 소원이 이뤄지면 영원히 행복할까요? 그만큼 지금 간절하다는 의미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멋진 일에서만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 대니얼 길버트는 “행복은 많은 사소한 일들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라고 말합니다.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매일 경험하는 사람이 멋진 일을 한 번만 경험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멋진 일만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성당 꼬마들은 저를 보면 달려들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간식 주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를 껴안기도 합니다. 그만큼 저와의 간격이 좁아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몇십 년 노력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또 아이들과 가까워지게 하는 매개체인 사탕, 초콜릿 등을 통해 쉽게 얻어집니다. 이런 행복으로 주일 오후 3시의 어린이 미사는 항상 신이 납니다.
사소한 일들을 쌓아 나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크고 대단한 목표만을 생각하면서 사소한 일들을 무시한다면 행복의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다릅니다. 세상의 행복은 부유함, 배부름, 웃음, 칭찬, 권력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에 주림, 박해받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왜 이들이 행복할까요? 분명 이 세상에서 힘들 수밖에 없기에, 이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렇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즉, 죽어서가 아닌,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편에 서야 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아 예언자는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겸손한 이들아!”(스바 2,3)라고 말합니다. 겸손하게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라면서, 복음의 역설적 행복을 신학적으로 풀이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행복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소원,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약하고 부족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안에 생기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을 열정이라고 부른다(사이먼 사이넥).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월의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축복의 선언을 하십니다. 이 선언은 세상의 기준을 뒤집는 하느님의 참된 행복입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하느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하느님께 맡길 때 행복은 이미 현재형이 됩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늘은 멀리 있지 않고 숨과 숨 사이, 기대와 체념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잡을 수 없는 우리의 가난입니다. 그래서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삶을 맡깁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깊은 신뢰입니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기준에 맡기지 않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행복하여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삶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이미 들어와 있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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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니야서 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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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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