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집회 47,2-11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 복음
마르 6,14-29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집회 47,2-11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사랑하였다.
2 친교 제물에서 굳기름을 따로 떼어 놓듯 다윗도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되었다.
3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양과 놀듯 곰과 놀았다.
4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거인을 죽여 백성의 수치를 씻어 주지 않았더냐? 그는 손을 쳐들어 돌팔매로 골리앗의 교만을 꺾었다.
5 그가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호소하여 주님께서 그의 오른팔에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싸움에 능한 장수를 쓰러뜨려 백성의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6 그리하여 사람들은 만 명을 물리친 다윗을 칭송하였고 그가 영화로운 왕관을 쓰게 되었을 때 주님의 복을 받은 그를 찬미하였다.
7 사실 그는 에워싼 원수들을 무찔렀고 필리스티아 군대를 없애 버렸으며 오늘까지 그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8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9 그는 제단 앞에 성가대를 자리 잡게 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가락을 노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의 노래로 찬미하였다.
10 다윗은 축제를 화려하게 벌였고 그 시기를 완벽하게 정리하였으며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고 그 찬미가 이른 아침부터 성소에 울려 퍼지게 하였다.
11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6,14-29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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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순교는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까닭은 대단한 죄목 때문도, 백성이나 신하들의 거센 압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도로 거두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여겨, 속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요한은 이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성인처럼 존경받던 인물이었는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불신앙이나 불의도 대부분 거창한 이유나 엄청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는 매우 중요하고 절박한 일처럼 느껴졌더라도, 되돌아보면 결국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고집이나 감정에 휘둘린 몽니였던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였네요.” 하고 넘길 수도 있었던 일을, 괜히 논쟁으로 몰고 가 “당신도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라며 갈등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잘못이나 큰 죄보다, 작고 사소한 흔들림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차!’ 싶은 작은 실수에서 불신과 죄가 시작됩니다.
실제로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죄를 짓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문도 아주 작은 열쇠 하나로 열리고 잠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과 양심의 문도, 사소한 태도 하나, 작은 선택 하나로 닫히거나 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하루, 그리고 올 한 해는 엄청나고 대단한 일을 이루려 하기보다 일상 속 작은 습관 하나, 말투 하나, 태도 하나를 돌아보고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 정신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움 없는 인생, 찬미의 인생
어제로 사무엘기와 다윗의 얘기가 끝나고, 전례는 집회서의 다윗 대목을 전해줍니다. 아시다시피 집회서는 구약을 위대한 인물들의 지혜를 들려주는데 오늘 다윗 얘기는 그의 위대함에 대한 종합이요 요약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집회서는 다윗의 위대함으로 먼저 두려움이 없는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를 물리쳤으며, 사자와 곰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과 평화로이 지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두려움 없이 싸울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없기에 평화롭게 어울려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으면 싸움도 두렵지 않아 싸워야 할 때는 용감하게 싸우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땐 두려움이 없기에 누구와도 또 무엇과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와서 저는 정말 가엾은 사람들을 보고 어떤 때는 왜 저 모양으로 사나 하고 한탄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옛날과 비교하여 요즘 사람들이 대체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마련입니다.
극단적인 예가 일본말로 히키코모리라고 하는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가족과 부모조차도 만나는 것이 두려워 방을 나오지 못하고 자기 방과 가상 세계 안에 갇혀 삽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만나기 싫은 것이 두려운 것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만나기 싫은 것이 만나기 두려운 것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제가 프란치스코의 두려움을 얘기할 때마다 하는 것이 너무 싫어하면 두려움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얘기인데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워하지 않지만 너무 싫으면 만날까 두려워하지요.
그러니까 좋은 것을 너무 좋아하고 싫은 것을 너무 싫어하는 현대 사조가, 좋고 싫은 감정이 이성과 의지보다 중심이 되는 현대 사조가 두려움을 만든 것이고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든 것입니다.
어쨌거나 하느님 때문에 누구든 무엇이든 까짓것 할 수 있는 다윗은 아무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고 물리칠 수 있었음을 우리는 배웁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배울 것은 하느님 찬미입니다. 오늘 집회서는 이렇게 다윗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찬미 안에는 감사와 사랑을 비롯한 온갖 좋은 감정이 다 들어가 있고, 반대로 분노나 미움이나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움 없는 인생, 찬미의 인생을 다윗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우자.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며,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주님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 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18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
제 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혀가 헛된 맹세와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불평과 비난이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을 증언하게 하소서.
제 혀를 말씀에 묶어 두고,
온 몸이 혀가 되어 삶으로 외치게 하소서.
온 몸으로 외치는
십자가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가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
찬미 예수님.
우리는 흔히 악마라고 하면 뿔이 달리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가장 무서운 악은 의외로 아주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심지어 성실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관료주의라는 이름의 악마입니다.
주민센터나 관공서에 갔을 때 가장 벽처럼 느껴지는 말이 무엇입니까? 담당 공무원이 세상에서 제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며 모니터만 쳐다볼 때입니다.
“선생님 사정은 너무나 잘 알겠고 마음이 아프지만, 전산상 입력이 안 돼서 규정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책상과 월급, 이 시스템을 지켜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악인의 모습을 봅니다. 바로 헤로데 왕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요한을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일 잔치에서 술김에 맹세한 체면이 문제였습니다. 딸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그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님들의 시선’과 ‘왕으로서의 위신’이라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예언자의 생명이라는 ‘잃어버린 양’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악한 살인광이라기보다는, 생명보다 자기 체면과 ‘가오’가 구겨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덩치만 큰 겁쟁이 관리자였습니다. 아서 밀러의 희곡 『크루서블』에 나오는 댄포스 판사도 똑같습니다. 마녀사냥의 광풍 속에서 그는 소녀들의 증언이 거짓임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가 내뱉은 말은 충격적입니다.
“이미 12명을 같은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했는데, 지금 와서 이들을 사면하면 법정의 권위가 떨어진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틀렸음을 인정하여 법정의 권위를 구기느니, 차라리 무고한 존 프록터의 목을 매는 쪽을 택했습니다. 99마리의 양(권위)을 지키기 위해 억울한 한 마리 양을 절벽으로 미는 것, 그것이 관료주의의 끔찍한 민낯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하느님의 집이니 다를까요?“교회법상 안 됩니다”, “전례 규정상 곤란합니다”라는 말이 사람의 생명보다 앞설 때,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가운 동사무소가 됩니다. 교회가 관료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마음, ‘착한 목자’의 심장을 갖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서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관료주의자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1%의 손실은 감수하자”라고 말하지만, 목자는 “저 아이 없이는 나도 집에 가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려 하실 때, 바리사이들(종교 관료)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습니다.
“규정을 어기나 안 어기나 보자.”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스템(안식일)이 무너지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한 생명이 고통받는 것이 더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님은 규정을 지키느라 사람을 죽이는 비겁함을 찢어버리시고, 욕을 먹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리 윗자리에 있어도 양 한 마리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행위를 할 수 있을 때 관료주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이끄시면서도 개인적으로도 한 영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발로 직접 뛰신 이유입니다.
1576년 밀라노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의 일입니다. 귀족들과 행정 관리들은 모두 도시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에게도 측근들이 피신을 권했습니다.
“각하, 여기 계시면 전염됩니다. 교회의 시스템이 마비되면 안 되니 안전한 곳에서 지시를 내리십시오.”
이것이 관료주의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주교관의 화려한 가구와 집기를 모두 팔아치워 환자들을 위한 약과 식량을 샀습니다. 그리고 주교의 붉은 의복 대신 수단을 걷어붙이고 페스트균이 득실거리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는 맨발로 십자가를 들고 다니며, 길바닥에서 썩어가는 환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는 ‘고위 성직자’라는 높은 자리(시스템)에 안주하지 않고, 죽어가는 양 한 마리가 있는 그 비참한 현장으로 내려왔습니다. 조직을 지키려 했다면 도망쳤겠지만, 생명을 지키려 했기에 죽음의 땅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형제 사제 여러분. 우리는 종종 99마리의 양이 있는 안전한 우리, 즉 ‘안정된 시스템’ 안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곳은 따뜻하고 규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시스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는 시스템 밖, 벼랑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지 말고, 울타리를 넘어 광야로 나가는 목자가 됩시다. 이것에 제가 사제 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냉담자 방문을 하며 처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전까지 제 사제의 삶이 헤로데와 비슷하지 않았나?’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나의 안위와 시스템을 버리고 떠날 줄 아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착하게 살아야 해요. 근원적으로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착한 척한다면, 긴장이 풀리는 순간 단 한 번의 일탈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모든 개인의 정보가 줌인되어 확대되고, 환기되고, 재생될 수 있으므로 앞으로는 ‘일상의 매 순간이 항상 건실해야 한다’라는 삶의 법칙이 각자에게 요구될 것입니다.”(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중에서)
크게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 소위 공인이라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로 나락에 빠지는 일을 너무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까? 특히 정보가 가득한 인터넷 세상 안에서 비밀이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착하게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쁜 성품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착한 성품으로 오히려 손해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보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어서인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을 봅니다. 우선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중 하나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커다란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라고 말하지요. 죽은 요한이 그의 양심 속에서 계속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양심을 따르는 착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
그에 반해 세례자 요한은 타협하지 않는 예언자였습니다. 권력 앞에서도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라고 직언합니다. 이 직언이 자기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안위보다 하느님의 법을 우선시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진리를 죽이려 하지만, 진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베어서 진리를 이긴 것 같지만,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각종 이유를 들어 자기의 정당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정당함은 별 볼 일 없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당당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헤로데의 모습보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도전하는 것은 잠시 발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키에르케고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칼은 머리를 베었지만 진실은 베지 못했고, 어둠은 잠시 이긴 듯 보였으나 빛은 끝내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에 따라 사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죽음은 말씀이 됩니다.
진실을 제거하는 사람은 마침내 생각할 능력을 잃고, 생각을 잃은 사람은 자유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가장 위험한 공동체는 갈등이 많은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말할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진실은 말을 제거한다고 사라지지 않고, 사람을 베어낸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말씀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자기 집착을 먼저 하느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의 자유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폭력 이전에 우리는 종종 자기 마음을 먼저 베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가장 위험한 죄는 무지가 아니라, 알고도 외면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참된 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질서입니다. 진실을 베어내면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침묵만이 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말씀을 잘라내지 않고 조용히 품으며 살아가는 생명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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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서 47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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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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