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요한 4,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복음
마르 6,45-52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요한 4,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6,45-52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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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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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오늘, 그 손을 붙잡습니다.
우리는 이상과 현실이 달라서 괴로워합니다. 누구나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경쟁이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가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이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무엇을 위하여 용기를 내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이는 삶의 풍랑 속에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표현하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며,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붙잡을 용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외면한다면, 우리 마음이 완고해져 주님의 손을 잡을 용기조차 낼 수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용기 내어 주님의 손을 잡읍시다. 때로는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아도 괜찮습니다. 멈춤이 뒤처짐은 아닙니다. 마음을 열어 당당히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과 함께 사랑의 길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대장정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아주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신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겠지만 그분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얘기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완성하지 않아도 완전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불완전함이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하느님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어야 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은 인간적이고 불완전하던 우리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경지에 이르는 겁니다. 우리의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불행하게 한 사람은 같이 미워하거나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 원수로 여기는 그런 사랑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던 내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계명 때문에 미움을 거슬러 사랑하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사랑이 차츰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완성을 향한 장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장정이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어가는 것은 진정 대장정(大長征)입니다.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하느님 사랑이 조금이라도 내 안에 들어왔다가 인간적인 사랑으로 원위치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하느님 사랑이 차츰 내 안에 쌓이는 사랑의 대장정은 점차 완성되어가는 겁니다.
그런 것이기에 조급하면 안 됩니다. 100m 달리기처럼 단숨에 도달하려 하면 안 되고, 일생을 거쳐 도달하는 마라톤처럼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먼 것 같아도 실망하지 말아야 하고, 완성까지 10km 남았어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90km 달려온 나에 대해서 수고했다고 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읍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을 때마다 하느님 사랑이 적금처럼 내 안에 쌓인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를 이중으로 드러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50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은 성체를 소화시키십니까, 압도당하십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호수 한가운데서 죽을 고생을 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지금 역풍을 만나 노를 저을 힘도 다 빠져버린 탈진 상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토록 기다리던 스승님이 오셨으니 환호성을 질러야 맞지 않습니까? "이제 살았다!"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유령이다!" 하고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휩싸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이유를 아주 뼈아프게 꼬집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들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빵은 그저 '배고픔을 해결해 준 맛있는 공짜 밥'이었을 뿐, 그 빵을 만드신 분이 '자연 법칙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까지는 닿지 못했던 것입니다. 빵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봐도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겪는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에 와서 성체를 모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생의 배는 여전히 풍랑 속에서 요동칠까요? 왜 성체를 영하고 나서도 뒤돌아서면 불안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소화'시키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마치 영양제나 비타민처럼 생각합니다. "이거 먹으면 좀 힘이 나겠지? 위로가 되겠지?" 성체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성체를 이용하려 드니, 그 엄청난 하느님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갇혀버립니다.
성체는 그러나 우리가 소화시키는 음식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성체가 우리를 삼키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앞에 완전히 '압도(Overwhelmed)'당해야 합니다. 유럽을 제패했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아실 겁니다. 그가 말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장군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였습니까? 아니면 황제 대관식이었습니까?"
나폴레옹은 잠시 침묵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니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내가 첫 영성체를 하던 날이었네."
세상 모든 나라를 정복했던 황제조차, 그 작고 하얀 빵 조각 앞에서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성체는 내가 정복하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정복하러 오신 왕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영성체 순간, 쓰고 있던 나의 왕관을 벗어 놓는 것, 그것이 압도당하는 자의 평화입니다.
이 '압도됨'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분이 있습니다. 바로 복자 임멜다 람베르티니입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임멜다는 성체를 너무도 갈망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성체가 그녀에게 날아왔고, 사제가 영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성체를 모신 직후, 그 기쁨과 사랑의 무게를 육체가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습니다. 하느님의 실재가 너무 커서, 육신이라는 그릇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랑의 죽음'이라 불렀습니다. 죄가 머물 육신조차 남기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된 완전한 평화, 이것이 성체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체 앞에서 이렇게 압도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비타민 먹듯 성체를 대하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기습(Ambush)'당할 용기를 내십시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완벽한 무신론자였던 앙드레 프로사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친구를 기다리러 우연히 성당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감실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성당을 나온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쓴 책 제목이 『하느님은 계시다, 나는 그분을 만났다』입니다. 그는 어떤 논리적 설득도 없이, 단지 성체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감에 기습당했습니다. 성당에 앉아 계실 때, "주님, 저를 덮치십시오. 저를 기습해 주십시오"라고 청해 보십시오. 무방비 상태로 그분께 노출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둘째, 말씀을 배우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낯선 나그네와 식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그 나그네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손님이 주인(Host)이 되는 순간, 그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성체 때 내가 예수님을 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는 나고 객체는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압도당하려면 주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뜨겁게 듣지 않았다면 그분의 실체를 볼 수 있었을까요? 성체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셋째, 분석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십시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사목하던 아르스 본당에, 매일 성당 맨 뒷자리에 앉아 감실만 쳐다보는 늙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묵주도, 기도서도 없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루 종일 거기 앉아서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저는 그분을 쳐다보고, 그분은 저를 쳐다봅니다(I look at Him, and He looks at me). 그거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도 너무 말이 많습니다. 분석하고, 청하고, 따집니다. 압도당한다는 것은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저 그분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는 것, 그 '눈맞춤' 속에 모든 평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히 제일 좋지만, 성체가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주 그분을 인식하려고 하면 됩니다. 성체께 드리는 짧은 기도를 정해서 자주 바치십시오. 저는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꽃을 발견하게 하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자주 바치려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제 안의 예수님 심장이 저를 압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에 압도당한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리스트의 제자이자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헤르만 코헨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의 부탁으로 성당 성가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믿음이 없었지만 성체 강복 때 사람들이 무릎을 꿇자 예의상 고개를 숙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그를 감전시켰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었고, 훗날 가르멜 수도회 신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몸의 예의'라도 갖추십시오. 정성껏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그 '형식'이 때로는 내용인 은총을 담는 피뢰침이 되어 하느님의 번개를 맞게 합니다.
성녀 글라라 역시 이 '압도적인 현존'을 믿었기에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사라센 군대가 수녀원을 덮쳤을 때, 그녀는 칼이 아니라 성광을 들고나갔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들을 지켜주소서."
그 작고 하얀 빵에서 나오는 광채에 압도된 군대들은 공포를 느끼고 도망쳤습니다. 성녀가 성체를 단순한 빵이 아닌 '절대 권력'으로 믿었기에 전쟁의 공포가 침범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성체성사를 묵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우리를 먹어치워야 한다."
내가 빵을 소화시켜 내 에너지로 삼으면 나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거대한 불길이 나를 삼켜 태워버리면, 내 안에는 재(Ash)와 예수님만 남습니다. 재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재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 깨끗함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성체를 모시러 나오실 때, 비타민을 먹으러 나오지 마십시오. 나를 삼키러 오시는 사자(Lion) 같은 하느님을 만나러 나오십시오.
"주님, 제가 당신을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압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먹어주십시오."
그분이 내 인생의 배에 '하느님'으로 탑승하시는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맞바람은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그 거룩한 평화 속으로 항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미국에 사는 유명한 자매가 있습니다. 이 자매가 같이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자매 중 한 명이 “나이가 많아서요?”라고 웃으며 묻자,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니요. 세련된 분이셔서요.”
이 자매는 둘 다 100세를 넘겨서 이제 110세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누군가 나이에 대해 말하면 이 둘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그렇게 안 늙었어요.”
그들은 호기심이 있다면 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삶의 소소한 일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을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젊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또 우리를 위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주변의 일에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은 배에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맞바람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둘러 제자들 쪽으로 호수 위를 걸어가십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먼 산 위에서도 애를 쓰는 제자를 알아보시고 급하게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자기들을 구하기 위해 급하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우리 삶에도 이런 맞바람이 참 많습니다. 즉,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 때는 기도도 하기 힘들고,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과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실망하고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우리를 보고 계시며 가장 어두운 시간에 우리를 향해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유키 소나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삶의 바다가 거칠어지는 이때가 은총도 깊어지는 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질 때 우리의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신앙은 폭풍의 부재가 아니라, 폭풍 한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는 신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의 두려움을 꾸짖기보다 그 두려움 한가운데로 걸어오십니다. 물과 싸우지도 않으시며 물 위를 지나가며, 흔들림 없는 중심을 보여 주십니다.
불안을 없애려 애쓸수록 불안은 커지고, 통제하려 할수록 혼돈은 깊어집니다.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내려놓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와 함께 흔들리는 배에 오르시는 실천적 진리임을 보여주십니다.
참된 삶은 파도를 없애는 데 있지 않고, 파도와 더불어 걸어가는 신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다가오심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참된 평안은 풍랑이 사라질 때 오는 것이 아니라, 풍랑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에서 먼저 주어집니다. 인간의 성숙은 위기가 사라질 때가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열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풍랑은 먼저 우리의 환상을 무너뜨립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성숙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우리 또한 한계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풍랑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깊게 하기 위해 온 은총입니다. 풍랑이 은총인 이유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실 위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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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4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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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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