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복음
마르 6,34-44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요한 4,7-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6,34-44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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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6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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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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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나눔이 기적이 되는 순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마르 6,34)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재물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방법을 알려 주셨을까요?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 저마다 먹을 것을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시며,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6,3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치신 것은 분명 하느님 나라의 진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핵심은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함께 들었을 제자들은 그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이 몇 개 있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가지고 있는 빵의 개수를 확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받은 것을 돌아보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곧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나눌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진 것이 많은지 적은지가 아니라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지 먼저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원류를 찾아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오늘 독서에서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너희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우리는 그러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사랑이 잘 됩니까? 사랑하려고 하는데 왜 사랑이 미움이 됩니까? 없는 사랑으로 억지로 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 역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없는 돈을 주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디서 강도질해서 주던지 거짓말이 들통나고 말겠지요? 그러니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사랑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 내리사랑으로 사랑해야겠지요.
우리도 내리사랑을 하긴 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얼마나 내리사랑을 잘합니까? 그러니 문제는 그 내리사랑이 하느님께까지 올라가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께로 원류를 찾아가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하지 않기에 자기로부터 내리사랑은 해도 곧 자식 사랑은 해도 수평적인 사랑 곧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아 사랑해야 사랑이 충만하여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 어떻게 생판 남인 자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부모의 다른 자식인 형제를 사랑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다른 자식과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사랑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야 하고,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해야 함을 깨닫고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사랑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제물로 보내시어.”(에페 2,4;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1)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곧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을 통해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37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늘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화단에는 가뭄에도 물이 쏟아진다.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농구 좋아하십니까? 미국 대학 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UCLA의 존 우든 감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분은 전무후무한 88연승과 10회 우승이라는, 말 그대로 '기적' 같은 기록을 세운 명장입니다. 신입 선수들이 잔뜩 긴장해서 첫 훈련장에 모이면, 명장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농구공 대신 양말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자, 양말을 신을 때는 주름이 하나도 잡히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 신어야 한다. 그리고 신발 끈은 구멍마다 꽉 조여 매라."
선수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천하의 명장이 유치원생도 다 아는 양말 신기를 가르치다니요. 하지만 감독의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양말에 주름이 잡히면 발에 물집이 생긴다. 물집이 잡히면 뛸 수가 없다. 네가 못 뛰면 팀이 진다."
기적 같은 승리는 화려한 덩크슛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양말을 제대로 펴 신는 그 사소한 '질서'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기초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경기라는 거대한 흐름도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빵이 불어난 결과에만 감탄하느라, 그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아주 중요한 행동을 놓치곤 합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를 잡게 하셨다.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왜 굳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들을 앉히고, 줄을 세우셨을까요? 그냥 빵을 공중에서 뿌리거나, 선착순으로 나눠주면 안 됐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겁니다. 힘센 사람만 먹고 약자는 밟혀 다쳤겠지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폭동입니다.
여기서 '떼를 지어'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본래 '화단의 꽃들이 가지런히 심어진 모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혼란스런 군중을 아름다운 꽃밭처럼 정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곧 기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은총은 담기지 않고 쏟아져 버립니다.
우리 삶의 현장을 봐도 그렇습니다. 기적은 철저한 질서 위에서 피어납니다. 불과 1년 전이었지요. 2024년 1월 2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여객기가 착륙 직후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는 불덩어리가 되어 활주로를 달렸고, 기내는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누가 봐도 대참사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승무원들은 고장 난 인터폰 대신 확성기를 들고 외쳤습니다.
"짐을 버리십시오! 짐을 꺼내지 마십시오!"
생사가 오가는 순간, 내 가방을 챙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대로 했다면 통로는 막히고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무질서를 멈추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비행기가 전소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분이었지만, 탑승객 379명은 전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짐을 버리는 질서'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는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어디 인간사뿐이겠습니까. 자연을 보십시오. 꿀벌들이 모아온 꿀은 액체입니다. 그냥 쌓아두면 다 흘러내리고 맙니다. 그래서 벌들은 '육각형'이라는 가장 완벽한 질서의 형태로 집을 짓습니다. 빈틈없고 가장 튼튼한 그 구조 덕분에 벌집은 자기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을 저장합니다. 육각형이라는 질서가 없으면, 꿀이라는 풍요는 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는 본래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듭니다. 그런 혼돈 속에는 은총이 내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기드온을 보십시오. 적군 미디안은 13만 5천 명인데, 기드온의 군사는 고작 300명이었습니다. 전면전, 즉 무질서한 싸움을 하면 전멸이 뻔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칼 대신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을 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하여라"는 엄격한 행동 수칙을 주십니다. 그들이 약속된 신호에 맞춰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질서를 지켰을 때, 적군은 공포에 질려 자기들끼리 칼부림하다 자멸했습니다. 300명의 질서가 13만 명의 무질서를 이긴 것입니다. 이처럼 질서만 잡혀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그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크림 전쟁 당시의 나이팅게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야전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의 사망률은 42%였습니다. 총상 때문이 아니라 오물과 무질서 속에서 감염되어 죽어갔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한 일은 거창한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청소를 하고, 환자의 침대를 줄 맞춰 정리하고, 환기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망 원인을 꼼꼼하게 통계표로 만들었습니다. 아수라장이 평화로운 질서의 공간으로 바뀌자, 6개월 만에 사망률이 2%로 급감했습니다. 그녀가 부여한 '질서'가 곧 수천 명을 살리는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질서의 힘은 빛을 발합니다. 1914년, 남극 탐험 중 배가 부서져 얼음 위에 고립된 어니스트 섀클턴 대장과 28명의 대원 이야기를 아십니까? 영하 30도의 추위와 고립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 섀클턴 대장은 엄격한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축구를 하고, 머리를 깎게 했습니다. 심지어 유머 시간까지 정해서 웃게 했습니다. 그는 무질서한 감정이 침투하지 못하게 일상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634일간 표류했지만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생존하여 귀환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그들을 살린 건 따뜻한 난로가 아니라, 영혼을 지켜주는 차가운 질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주 드리는 이 미사 전례(Liturgy)야말로 우리 삶의 질서를 잡는 가장 거룩한 틀입니다. 전례는 딱딱한 형식이 아닙니다. 무질서한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 영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섀클턴의 루틴이자, 은총을 담는 벌집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혼돈 그 자체였을 때, 문명을 구한 것은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그 혼란 속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엄격한 생활 규칙을 세웠습니다. 수도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먹고, 기도했습니다. 그 수도원 담장 안의 평화로운 질서는 암흑시대를 밝히는 등대가 되었고, 그 안에서 유럽의 문명은 다시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질서는 벌써 평화이고, 그 평화가 기적을 초대합니다. 올 한 해, 거창한 계획보다 사소한 질서를 세워보십시오. 존 우든 감독이 양말을 펴 신게 했듯,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 단순한 규칙(Regula)이 여러분의 영혼을 육각형 벌집처럼 튼튼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은총이, 낭비되지 않고 여러분의 삶이라는 그릇에 가득 담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자동차 창문을 열고 시속 100km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태양 주변을 도는 공전 속도는 어마어마합니다. 1초에 30km에 달합니다. 시속 100km의 소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인데, 훨씬 빠른 지구에 살면서 공전 소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자전, 공전 소음은 인간이 듣는 청력 범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목이 마르면 수돗가에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지요.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사서 마신다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다시 나타났다면서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수를 사 마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것 역시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더 우리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을 갖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일이 우리 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빵의 기적만을 보고 있지만, 빵을 주기 전에 하셨던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라고 전해 줍니다. 영적인 배고픔의 해결이 육적인 배고픔의 해결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배고픔은 육적인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서야 채우는 것이라고 하지요. 어쩌면 영적인 배고픔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은 군중을 남으로 보지 않고, 책임져야 할 가족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앞이 잘 보이지는 않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의 한계 상황만을 이야기하면서, 못한다고, 할 수 없다면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깜짝 놀랄만한 일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배고픔을 먼저 채울 수 있어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이 존재하는 비결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엡스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부족해 보여도 사랑으로 내어놓을 때, 평화와 은총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욕심의 길이 아니라 헤아림의 길을 다시 만납니다. 빵을 가지려 하면 빵을 잃습니다. 감사는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먼저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이어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말씀과 빵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빵은 움켜쥘수록 줄어들고, 흘려보낼수록 살아납니다.
나눔의 성찬은 높아짐의 식탁이 아니라 낮아짐의 자리이며, 그 낮아짐 속에서 우리 모두는 배불리 먹습니다. 성찬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사건이기보다, 함께 깨어나 서로를 살리는 일상의 사랑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은총을 이웃의 밥으로 돌려주는 하루의 실천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눔과 감사가 맞물릴 때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은혜를 아는 마음에서 봉헌은 시작됩니다. 풍요는 더 많이 소유할 때 오지 않고, 이미 주어진 것을 봉헌으로 바꿀 때 시작됩니다. 그래서 축복은 소유의 크기보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내어놓은 작은 빵 위에, 우리 모두를 살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적이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서로를 살리는 가장 좋은 은총의 날입니다. 내어놓음이 가장 좋은 사랑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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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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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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