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요한 4,19―5,4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복음
루카 4,14-22ㄱ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요한 4,19―5,4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4,14-22ㄱ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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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8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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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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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듣는 말씀에서 사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음은 먼 미래에 이루어질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삶 안에서 실현되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도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합니다”(4,22).
그런데 마치 복음 선포처럼 보이지만 조심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의 선동이 한 예입니다. 주님의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회심에 이르게 합니다. 또한 복음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그것을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거짓 선동은 이해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고, 모든 사람을 위한 주장인 듯 보이지만 대부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빌려 과장된 목적을 주장하거나, 그것이 마치 주님의 뜻인 것처럼 복음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힘과 위로를 얻고 그 말씀 안에서 사랑을 전하는 참된 선포자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은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이것이 요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며 내내 성찰하게 되는 주제인데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느님을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 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사랑받는지도 모르고 부모의 사랑을 늘 받았고 우리도 사랑한다는 생각 없이 늘 부모를 사랑했지만 우리가 부모를 언제 사랑하기 시작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부모를 사랑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게 된 것은 처음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된 다음부터지요. 저의 경우는 중학교 때입니다. 가난했기에 20리 넘는 길을 가능한 한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너무 더워 버스를 타고 하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창밖을 보니 어머니가 그 더위에 호박이니 오이 같은 것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이지요.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어머니는 그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그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서 가시네, 결국 어머니가 나를 머리에 이고서 통학시키시는 것이네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사랑해드려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힘 드시는 일이 더 이상 없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그리고 받은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이 사랑을 실제로 살아갈 때 거치는 단계요 순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면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하듯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얘기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자녀인 형제들이 생겼기에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오늘 우리는 서간에서 가르침 받고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미 받은 말씀, 이미 받은 사랑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 말씀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곧 ‘듣는 행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듣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은 ‘들을 때, 듣는 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곧 말씀을 영접하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가능한 까닭은 이미 그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잠시 후에,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제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듣지 못할까?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 안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고 계십니까? 오늘 저는 조금 엉뚱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한 미식가가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집어 들고는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이 메뉴판의 폰트 좀 봐. 고딕체와 명조체의 조화가 절묘하군. 음식 설명은 또 얼마나 문학적인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유기농 양상추'라니... 재료의 원산지 표시도 아주 훌륭해."
그는 무려 1시간 동안 메뉴판을 정독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감명 깊은 구절을 노트에 필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를 두드립니다. "아, 배부르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 하고는 식당을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그는 정작 음식은 시키지도 않았고,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습니다. 메뉴판은 종이일 뿐, 음식이 아닙니다. 종이를 아무리 씹어 먹어도 배가 부를 리 없지요. 메뉴판을 봤으면 주문을 하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내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꼭 이 '메뉴판을 먹는 미식가'와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천국 잔치의 메뉴판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 시간에 모여 앉아 감탄합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원이 참 오묘하네요."
"바오로 사도의 문체는 정말 논리적이야."
그렇게 연구하고 밑줄 긋고 필사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음식은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혼은 늘 굶주려 있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닮지 않았을까?"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시던 시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가톨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우리 평신도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할 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지 않고, 내 본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이 계속되면 제2의 간디 같은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유학 시절 겪은 일화는 우리에게 뼈아픈 일침을 줍니다. 간디는 성경의 산상수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교회에 들어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입구의 안내원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유색인종이 들어올 곳이 아니오. 딴 데로 가시오."
그 안내원과 교회 안의 백인들은 매주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훌륭한 '대본'이었지만, 그들은 그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엉뚱한 연기를 펼친 것입니다. 간디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예수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본(예수님)은 완벽한데, 배우(신자)가 연기를 엉망으로 하니 관객(세상)이 실망하고 극장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성취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기에, 말씀대로 사셨고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연기 대본'이 아니라 '연구 논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머리는 커졌는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로데 궁전의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유다인의 왕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미카 예언서를 인용하며 정답을 맞혔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장소를 정확히 연구해 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인간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온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경배하러 떠났지만, 정답을 알고 있던 박사들은 편안한 궁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정보'였지, 따라야 할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사례입니다.
성경은 '구원 교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에 관한 책을 분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육화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안에 육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수님과 한 몸인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거창한 신학적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기억합시다. 당시 중세 신학자들은 성경에 수많은 주석과 해설을 달며 지식을 뽐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한 형제가 성인에게 와서 "저도 시편 주석서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복음을 '주석 없이(Sine Glossa)',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성인에게 성경은 연구해서 지식을 쌓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는 그 구절을 노트에 적거나, 집에 가서 묵상하거나, 신학적 의미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즉시' 자기 밭을 팔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수백 번 읽고, 수십 번 강론을 듣고, 성경 공부 시간에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오처럼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구절의 대본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성인이 되었고,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달달 외우면서도 관객석에 앉아 팝콘만 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대본(Script)'입니다. 하느님 감독님은 이미 "레디, 액션!"을 외치셨습니다. 카메라 불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배우인 우리가 무대 위에서 대사만 분석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년 하례식 미사에서 수원교구장 주교님은 올 해의 말씀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뽑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도 놀랐지만, 그 말씀을 한 해 동안 실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로운 말씀을 내 안에서 육화시킨다면 시간인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닮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올 한 해, 성경 전체를 다 알려고 욕심내지 맙시다. 안토니오 성인처럼, 딱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정해봅시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이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라"는 말씀이든, 하나를 정해서 그것을 내 삶으로 '성취'시켜 봅시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 메뉴판을 먹던 미식가에서 진짜 음식을 먹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수영 교본을 덮고 물살을 가르는 구조자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다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 저 사람들을 보니 정말 예수가 살아있구나."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사람을 만나면서 배웁니다. 선생님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울 것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만 보게 됩니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았던 과목을 보면 “잘 가르치신다.”라고 내가 인정한 분의 과목이었습니다. “진짜 못 가르치신다.”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과목은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도움이 될까요? 전혀 될 수 없습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책 등 어디에나 스승님이 계십니다.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제일 많이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람’에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수도 생활 장소(‘라 베르다’)로 늘 사람이 있는 마을이 보이는 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고 또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만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실패해서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인생은 넘어졌을 때가 아니라, 일어서는 것을 포기했을 때 실패하는 것이다.’(박용후)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는 만남을 포기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만큼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건네진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으십니다. 바로 당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자리에 앉으신 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오늘’은 단순히 시간적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때가 지금 예수님을 통해 왔다는 ‘종말론적인 지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으로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바로 ‘오늘’ 여기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랑 안에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자신이 찾는 것만 보고, 자신이 아는 것만 찾으려 한다(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은총이 머무는 시간은 오늘이며, 말씀은 오늘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경청은 말씀이 머무를 공간이고, 성취는 말씀이 삶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일상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참된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과 만난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말씀은 오늘을 떠나면 단순한 지식이 되고, 오늘은 말씀 없이 참된 방향을 잃습니다. 말씀은 오늘을 통해 현실이 되고, 우리의 오늘은 말씀을 통해 구원이 됩니다.
말씀을 만난 오늘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이 하루는 비교와 평가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가 존중받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은 소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은총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한번 이루어진 말씀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며 다른 오늘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 나갑니다. 오늘을 이끌어가는 말씀을 진실로 믿습니다. 말씀은 오늘, 우리가 듣고 살아내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믿음은 삶이 되고, 오늘은 은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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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4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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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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