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정리해 안내드립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1요한 2,12-17)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복음
(루카 2,36-40)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요한 2,12-17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루카 2,36-40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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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성전에서 울려 퍼진 기쁨
한나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뜻이고, 한나의 아버지 이름 프누엘은 ‘하느님의 얼굴’ 또는 ‘하느님을 만남’을, 지파 이름 아세르는 ‘행복’을 뜻합니다. 평생 성전에서 단식과 기도로 일편단심 하느님만을 섬기고 봉사하며 구원자를 기다리던 한나의 삶은 오늘날의 관상 수도자의 삶과도 비슷합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한나의 꾸준한 인내와 충실함은 마침내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은총과 행복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드디어 만난 아기 구원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루카 2,38 참조). 기쁨 가득한 눈으로 성전 안을 돌아다니면서 ‘드디어 구원자가 오셨어요. 저 아기예요, 저 아기! 아기를 보러 가세요!’라고 외치는 노파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슬픔을 성전에서 봉사하는 기쁨으로 바꾸고,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 온 한나의 신실함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과부의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홀로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1티모 5,5). 한나의 인내와 횃불처럼 깨어 있는 정신은 그 긴 세월의 기다림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지킴으로써, 희망을 ‘은퇴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자렛의 평범한 삶 속에서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는]”(루카 2,40) 어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도 자라시기를, 우리 또한 나날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자라면서 신앙이 튼튼해지기를 꾸준함과 기도와 희망으로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욕망 대신 갈망으로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과 욕망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욕망에 관해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간이 사랑과 욕망을 동의어처럼 쓰고 있는데 왜 그런 겁니까? 사랑과 욕망은 동의어가 아니고 그러니 같은 뜻처럼 쓰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랑이 참사람이라면 욕망과 같은 뜻일 리 없고 같이 써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서간이 얘기하는 사랑은 하늘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 사랑이고 이때의 세상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그런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하느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곧 세속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좋다고 하신 세상이 아닐뿐더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그 세상도 아니며 그래서 오늘 서간의 말처럼 지나가고 사라지고 말 세상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 성탄 시기에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구원하러 오셨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도 본래 그대로 만드시고 욕망 때문에 이 세상을 집착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는 우리도 지나가고 말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저세상으로 데려가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묵상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는 것은 욕망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려는 것은 갈망입니다.
복음의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주님께 달려왔지만 이 세상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이 세상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래서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거부했으며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잃었지요. 그러니 이 성탄 시기 욕망 대신 갈망으로 진정 나를 사랑하는 내가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참된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성탄 팔부 축제 제6일입니다.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 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했듯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한나’는 시메온처럼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대체 참된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묻게 합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9,10)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대체 나는 ‘존경받기 위해 공부하는가? 존경하기 위해 공부하는가?’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영광을 드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한나’처럼 밤낮으로 기도하고 성전에 머물며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37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상처 난 굴이 진주를 품습니다.
찬미 예수님.
1013년 독일, 알츠하우젠 백작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축복이어야 할 탄생은 곧바로 가문의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척추가 뒤틀린 꼽추였고, 입천장이 갈라진 구개열이었으며, 뇌성마비로 혼자서는 설 수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헤르만 콘트랙투스(Hermannus Contractus)', 즉 '비틀린 헤르만'이라 부르며 혀를 찼습니다.
7살 때,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라이헤나우 수도원에 맡겨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유배'였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초대'였습니다. 수도원의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헤르만은 매일 밤 자신의 몸에 갇힌 영혼의 비명과 싸워야 했습니다. 건강한 수도자들이 노동하고 찬미할 때, 그는 뒤틀린 손가락으로 간신히 펜을 잡거나,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더듬거리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자, 끊임없이 고통을 생산하는 고문 기계였습니다.
어느 깊은 밤, 고통 때문에 잠들지 못한 헤르만은 십자가 곁에 있는 성모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모든 이가 걷고 뛸 때, 평생을 누워있거나 기어 다녀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사무치게 서러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는 왜 이렇습니까? 왜 저를 이 고통의 감옥에 가두셨습니까?"
그 절규의 끝에서, 헤르만은 기적처럼 성모님의 눈물을 마주합니다. 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신 어머니, '비탄의 성모'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헤르만은 깨닫습니다. 자신의 이 으스러진 육체야말로 세상의 위로가 틈탈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이 채워질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빈방'임을 말입니다. 건강한 다리로 세상 쾌락을 좇아다니는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골방의 신비'가 그에게 열린 것입니다. 그 밤, 그의 영혼에서 터져 나온 노래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살베 레지나(성모 찬송)』입니다.
"하와이 그 자손들이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탄식하며 우나이다."
이 가사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신학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의 비참한 침상, 그 '슬픔의 골짜기' 바닥에서 길어 올린 처절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저주하지 않고, 그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빨아들이는 펌프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그의 뒤틀린 입에서 나온 이 마지막 구절은, 육체의 감옥이 무너지고 천상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환희의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을 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노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의 상처가 입을 벌리자 그 틈으로 하느님이 들어오셨고, 그가 내뱉은 숨결은 교회의 영원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언자 안나의 삶도 헤르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안나는 결혼한 지 일곱 해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큰 결핍이자 '상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만약 남편과 백년해로하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평범한 아낙네로 살았을 것이고, 성전에서 84년을 머무는 '사명'을 수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결국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나에게 남편의 부재라는 텅 빈 공간은,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결핍이 곧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통로였습니다. 자연계에도 이와 똑같은 이치가 있습니다. 진주조개의 이야기입니다. 조개 속에 날카로운 모래알이라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는 극심한 통증을 느낍니다. 매끈한 속살에 박힌 모래는 뱉어낼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조개는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체액인 나전질을 분비해 모래를 감싸고 또 감쌉니다.
오랜 시간 고통을 감싸 안은 결과, 그 거친 모래알은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상처가 없었다면 진주라는 보석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나의 84년 기도는 상실이라는 모래알을 예수님이라는 진주로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에는 '킨츠기(Kintsugi)'라는 독특한 도자기 공예 기법이 있습니다. 아끼던 도자기가 깨졌을 때, 그것을 버리지 않고 깨진 틈을 옻으로 붙인 뒤 그 위에 금가루나 은가루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깨진 상처(금)는 감추어야 할 흉터가 아니라, 도자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황금빛 선이 되어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그 그릇은 깨지기 전보다 더 비싸고 귀한 예술품으로 재탄생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깨진 마음을 버리시는 게 아니라, 그 틈새를 당신의 은총(금)으로 채워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만드십니다. 상처 없는 매끈한 그릇보다, 은총으로 떼운 상처 입은 그릇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성경의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 자신의 힘과 잔머리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환도뼈)가 위골됩니다. 이제 그는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엉덩이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야곱은 형 에사우 앞에 무릎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교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 힘으로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 온전히 자신을 낮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리를 절게 된 순간, 그는 비로소 제 힘으로 걷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놓지 않겠습니다."
육신의 힘이 꺾인 그 자리에 하느님의 권능이 들어왔고,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상실의 아픔이나 치유되지 않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아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부족함이 없는 이들은 주님을 간절히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으로 배를 채우며 자신의 영혼을 더 병들게 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받아들이기에 가장 완전한 장소는, 바로 나의 상실의 공간과 상처입니다. 복자 헤르만처럼, 예언자 안나처럼, 그 상처의 빈방을 하느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가장 따뜻하고 거룩한 구유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일본의 유명 백화점 중의 하나가 있는데, 이 백화점의 영업 방침이 모든 백화점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전까지 매장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화점은 관점을 바꿔서 ‘고객이 물건을 사시는 곳’으로 본 것입니다. 즉, 고객 중심으로 신경을 쓰게 해서 마케팅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모든 곳이 고객 중심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성당은 과연 어떤 곳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연히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신 내용으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 외의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곳일까요? 이도 아닙니다. 바로 내가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는 하지 않고 다른 것만 하려는 우리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곳에서 남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만 바라보는 것인데, 주님이 아닌 사람만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을 더 앞세우고 있습니다.
앞서 백화점에서 ‘마케팅 혁명’을 일으켰던 것처럼, 우리에게 ‘신앙의 혁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금의 모습에서 오로지 주님 중심의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어제(5일째) 시메온의 예언에 이어, 오늘은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깁니다. 보통 15세에 결혼했던 당시를 떠올리면, 50년 넘게 과부로 지냈습니다. 당시 여자 혼자 살기 힘들었던 사회 구조를 떠올리면, 한나는 세상에 의지하면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녀의 삶은 고독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먼저 구세주를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하느님과 함께했던 그녀였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제 복음에 나왔던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찬미가를 불렀던 시메온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최초의 복음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성전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가난한 부부의 품에 안긴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아본 사람은 시메온과 한나뿐이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이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알아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연 시메온과 한나처럼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있을까요? 복잡한 세상 안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분주하게만 사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신앙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세상 중심이 아닌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배우기를 멈출 때, 당신은 죽어가기 시작한다(블레즈 파스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깨닫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의 삶으로 말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오랜 기다림 자체가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말은 설득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바로 그녀의 실천이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삶의 언어로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나누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한나는 아기 안에서 그 징표를 알아본 사람입니다. 같은 기다림 속에 있는 우리들을 위로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며 하느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한나는 이 속량을 평생 기다려 온 사람으로서, 아기 안에서 그 약속의 시작을 알아봅니다.
연약함 속에 숨은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아는 성탄의 기쁜 날 되십시오. 구원은 이야기로 태어나고 속량은 우리 마음을 조용히 일으켜 세웁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조용한 구원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희망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가장 살아있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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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2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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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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