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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5년 12월 2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5.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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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정리해 안내드립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1요한 1,1-4)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복음
    (요한 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요한 1,1-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20,2-8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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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7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성 요한 사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8:3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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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탄생과 순교가 만나는 자리, 성탄의 진짜 의미

성탄 팔일 축제 기간의 전례에는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나옵니다.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26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28일),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29일)이지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태어나신 분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얼핏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생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인 오늘, 복음은 요한 사도를 엊그제 태어나신 주님의 무덤으로 데려갑니다. 무덤과 수의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자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당신 몸을 먹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님께서 짐승의 밥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사실에 담긴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누이신 구유는 죽은 이를 넣는 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동방 교회의 성탄 이콘 가운데 루블료프의 성화에서는 아기가 누워 있는 구유가 마치 작은 관처럼 보이는데 그 관은 저승처럼 깊은 어둠 속에 놓여 있지요. 아기의 옷 또한 신생아의 배내옷이라기보다 시신을 싼 수의처럼 보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위하여 태어나셨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돌아가셨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가장 먼저 알아볼(요한 21,7 참조) 만큼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누렸던 요한 성인은 이 모든 진리의 생생한 증인입니다(1요한 1,1 참조).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끝까지 증언한 사랑의 성 요한 사도의 말을 새겨들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의 말씀을 같이 나누는 친교

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복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는데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를 통해 심오한 말씀의 신비를 깨달아야 하는데 요한이 복음과 서간을 통해 전한 말씀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서간에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관해 이렇게 전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말하는 말씀은 귀로 듣는 말 이상의 것이고, 있어 온 것 곧 존재자이며 요한복음의 첫 구절의 그 말씀이십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말씀의 심오함을 전하는데 이렇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여기서 ‘한처음’은 천지가 창조되던 그 처음보다도 앞선 처음이며 그러니까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창세기 1장에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천지를 같이 창조하신 말씀께서 이 세상에 육을 취하여 오셨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사도 요한은 이 분을 귀로 듣고 눈으로 봤으며 손으로 만져봤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왜 합니까? 그분 말씀을 나는 내 귀로 직접 들었으며 너희가 못 본 분을 나는 직접 보고 만져봤다고 뽐내려는 것이고 자랑하는 겁니까? 사도 요한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고 우리도 자기와 같이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며 그가 초대하는 친교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초대하는 우리의 친교는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이며 우리끼리만 나누는 인간적인 친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빼놓고 우리끼리 친교를 나누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친교도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친교는 주님 말씀을 같이 듣는 친교,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을 같이 바라보는 친교, 진리의 길이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께 같이 가는 친교,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같이 나누는 친교여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빈 무덤과 구유, 같은 한 자리

우리는 성탄 8일 축제 안에서, 요한 사도의 축일을 맞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구약성경의 ‘새로운 벤야민’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곧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벤야민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신명 33,12)였듯이,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도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요한 13,23;19,26;21,7;21,20)라 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이 도착하였지만, 먼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도착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기만 하지만, 요한은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빈 무덤’과 ‘구유’는 예수님께서 몸을 눕혔던 ‘같은 한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침’, 곧 오실 때와 가실 때에 머무른 땅의 자리입니다. 그분은 ‘구유’로 우리의 출생을 성화시키시고, ‘빈 무덤’으로 우리의 죽음을 성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탄생이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실 때도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통과해서 지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간 첫날 아침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무덤은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마태 28,2)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고 통과하셨습니다. 곧 “당신 어머니의 동정성이라는 봉인을 뜯지 않으셨듯이, 무덤의 봉인을 부서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포대기’가 구세주 ‘탄생의 표시’가 되듯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아마포 수의’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부활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포’는 놓여있었고, ‘수건’은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수동태는 ‘하느님의 개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의 ‘강생의 표시’와 ‘부활의 표시’를 동시에 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으로 ‘들어가고’,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세를 낮추어 더러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울고 있고 지친 이들이 있는 곳, 춥고 배고픈 이들이 있는 곳, ‘세상 속의 마구간’과 자신의 악취에 찌든 ‘우리 자신의 마음 속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가져다 준 ‘구유’의 아기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빈 무덤’을 동시에 봅니다. 우리 안에 더없는 사랑으로 들어오시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봅니다.

하오니,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비워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맑은 눈으로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생명과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누구의 기쁨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가?

찬미 예수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본능일까요, 아니면 학습된 것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톰과 제리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30년대 심리학자 징양 쿠오(Zing-Yang Kuo)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지요. A그룹은 어미가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라게 했고, B그룹은 쥐와 한집에서 친구처럼 자라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사냥을 보고 자란 A그룹은 85%가 쥐를 사냥했지만, 쥐와 함께 자란 B그룹은 쥐를 사냥하지 않았고 심지어 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는 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 아니라, 어미를 보고 배운 '문화'였던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기술은 철저한 조기 교육의 결과입니다. 사막의 파수꾼 미어캣을 보십시오. 그들은 독이 있는 전갈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새끼가 처음부터 전갈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미는 단계적으로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죽은 전갈을 주고, 다음에는 독침을 뺀 산 전갈을 주고, 마지막에는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되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끼는 야생에서 전갈을 건드렸다가 쏘여 죽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존하는 법을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존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법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그 유명하고도 슬픈 '원숭이 실험'을 아실 겁니다. 그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우유가 나오는 차가운 철사 어미와 우유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어미 인형을 넣어주었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만 잠시 철사 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종일 천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따뜻한 접촉, 즉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식욕보다 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모조품 어미 밑에서 자란 원숭이들은 나중에 무리에 넣어주어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짝짓기도 거부했으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해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의 모델이 부재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의 절규가 바로 이 지옥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행복한 가족을 훔쳐보며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고,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에게 사랑받기를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박사는 흉측한 그를 혐오하며 버렸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상실한 괴물은 결국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창조주에게 소리칩니다. 

"나는 뼛속까지 외롭다. 나의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러면 나도 다시 선하게 될 것이다."

괴물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보고 배울 사랑의 원본이 없었기에, 그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려면 더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와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나 또한 기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보보 인형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한 모방의 존재인지를 증명합니다. 어른이 인형을 발로 차고 때리는 영상을 본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똑같이 인형을 폭행했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인형을 안아주는 것을 본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내가 보여주는 대로 상대방은 배웁니다. 내가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어야만 상대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사도는 바로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사랑의 모델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나누시는 그 완벽한 삼위일체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벅차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기쁨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들이 그 사랑을 몰라주면 요한과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편지를 씁니다.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Koinonia)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3-4)

요한이 사랑을 가르치려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가 본 그 사랑의 원본을 너희에게도 보여줄게. 너희도 이것을 보고 배워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서로 삼위일체처럼 사랑하며 내 기쁨도, 너의 기쁨도 꽉 차게 될 테니까." 

상대방을 사랑의 기술자로 만들지 않으면, 나도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외로워집니다. 기쁘려면,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교과서는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 13장, 최후의 만찬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Model)'을 보여 준 것이다."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살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발 씻겨주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 밤 그 수건과 대야를 보았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스승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미어캣이 전갈 잡는 법을 가르치듯, 우리가 죄의 독에 쏘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려면 스승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만 챙겨라, 이겨라, 밟아라"는 잘못된 사냥법을 가르칩니다. 그 영상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길 뿐, 결코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의 시선을 세상이라는 TV 화면에서 돌려, 예수님이라는 원본에게 고정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배워 누군가의 발을 씻겨줍시다. 내가 사랑을 보여주면, 그도 사랑을 배울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요한 사도가 약속한 '충만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가 자기는 전혀 기초가 없다면서 중학교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친구는 성적이 올라갔을까요? 아닙니다. 기초가 쌓이고는 있었겠지만, 쉬운 문제만 풀다 보니 어려운 문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수학을 포기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어려운 문제를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아이는 도저히 못 하겠다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쉽고 편하게만 살겠다는 지향으로는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을 통해 쉽지 않은 주님의 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일, 쉬운 일만을 하면 그 자리에 맴돌 뿐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분명 성장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일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사랑만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와 맞는 사람만,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과연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 될까요? 
 
오늘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가장 심오한 신학적 깊이를 지닌 요한복음서와 서간들을 집필한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만큼 그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는 장면입니다. 같이 달렸지만,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하지요. 이를 ‘사랑이 권위보다 더 빠르다’라고 주석가들이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그를 더 빨리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는 초대 교회 안에서 베드로가 지닌 수위권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고 질서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뒤따라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빈 무덤과 정돈된 수의만을 보고도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표징만으로도 진실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가집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일상의 작은 표징을 통해서도 주님을 알아보고 있나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원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미래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은 현재와 다르리라는 것뿐이다(피터 드리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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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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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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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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