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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5 성탄절 낮미사 실시간 생중계|12월 25일 명동성당 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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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성탄절 낮미사 실시간 생중계는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낮 12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봉헌되며 평화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 아침을 미사와 함께 시작하고 싶은 분들, 현장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운 분들도 생중계를 통해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낮미사는 밝은 시간 속에서 성탄의 의미를 차분히 되새길 수 있는 미사라면, 전날 밤 봉헌되는 밤미사는 어둠 속에서 시작해 빛으로 나아가는 성탄의 상징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미사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울림을 전해줍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성탄절 밤에 봉헌되는 미사가 궁금하다면 2025 성탄절 밤미사 실시간 생중계도 함께 참고해 보세요.

이 글에서는 명동성당 성탄절 낮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정보를 안내드립니다.

 

 

2025 성탄절 낮미사 실시간 생중계|12월 25일 명동성당 평화방송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이사 52,7-10
오늘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히브 1,1-6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1,1-18
오늘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성탄절 낮미사 실시간 생중계

2025년 12월 25일 명동성당 성탄절 낮미사 평화방송 생중계

 

2025년 12월 25일 낮 12시
명동성당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2025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주님성탄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3

✚ 강론시작 17:4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함께 사는 하느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라 하겠습니다. ‘로고스 찬가’로 알려진 이 서문은 창조 이전의 “한처음”(1,1.2)에서 시작하여 창조를 거쳐(1,3 참조) 여러 세기에 걸쳐 준비된 말씀의 육화 사건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라는 구절은 이 찬가의 핵심으로, 그리스 말을 그대로 옮기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입니다. ‘살’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자 피조물로서의 특성을 가리키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는 교리에는 익숙하지만, 그분의 몸이 우리의 몸처럼 피로를 느끼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죽을 몸이요 냄새가 날 수도 있고 더러워지기도 하는 살이라는 사실에는 당혹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화의 진실입니다.

육화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이요 사랑 고백이라고 신학자 칼 라너는 말합니다.

“‘영원이신 분’이 ‘시간’이 되셨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현실에 대한 마지막 설명이신 분이 육신이 되셨다. ……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말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말씀을 세상에 보내셨다. …… 바로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오시면서 하시는 말씀, ‘세상아, 너를 사랑한다, 사람아, 너를 사랑한다. 바오로야, 데레사야,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하기에 너와 같이 되었다. 네가 되었다. 너의 그 비참함, …… 너의 죽을 운명까지도 나의 것으로 삼아 너와 일치되고 싶었다’”(『소 전례력, 기도의 길』, 15-16).

이는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너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구원이 무엇일까? 반대로 비 구원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제 생각에 비 구원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는 것 자체가 비 구원이고, 가장 쓰라린 비 구원이며 비 구원의 종합입니다.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외롭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마음이 어두우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배고프고,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불안하며, 엄마가 안 계시기에 무섭고 두려우며 엄마가 있는 아이는 활기차고 의기양양한데 엄마가 안 계시기에 아이는 시들시들합니다.

여기서 외롭고 어둡고 배고픈 것은 비 구원의 현상들이고, 엄마가 안 계신 것은 비 구원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 구원을 얘기할 때 현상을 얘기하지만 원인인 엄마가 안 계신 그 비 구원을 더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가 굶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 엄마가 없는 것에 더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인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우리가 불안하다면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하다고 믿어야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불안한데 식량이 떨어져 가기에 불안하다고 생각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독히도 고독한 비 구원 상태에 내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안 계셔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고독하다고 하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행복하게도 우리 신앙인에겐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주님의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구원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분을 구원자로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이고 그것이 비 구원입니다. 이것을 오늘 요한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죄에서 구원된 사람입니까? 이 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까?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저이고 여러분입니다. 이 구원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자축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축하합니다.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왜 성탄인가? 다른 탄생과는 어째서 다른가? 이를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난 존재’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존재’입니다. 곧 ‘온갖 피조물’과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두 존재 차원을 함께 갖고 계신 유일한 분이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하느님이시면서 건네 오시어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성탄’이라 부르며, 동시에 ‘강생’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탄생’일뿐만 아니라 ‘강생’이라는 ‘내려오심’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참한 ‘내려오심’입니다. 그것은 전능하고 무한함에서 무능하고 허약함으로 내려옴이요, 높고 존귀함에서 낮고 비천함으로 내려옴이요, 온전함에서 결핍과 의존함으로 내려옴이요, 자유와 다스림에서 예속과 지배로의 내려옴입니다. 바로 이 내려오심 안에 ‘구원의 신비’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에 사는 가난한 부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탄생된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드러내줍니다.

‘나자렛’은 올리브나무 뿌리에서 나온 ‘네째르’에서 온 말로, ‘볼품없고 형편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보통의 가지는 줄기로부터 나오는데 비정상적으로 뿌리에서 삐져나온 볼품없는 가지라서 발로 밟아 꺾어버리거나 칼로 쳐서 제거해버리는 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의 경외함이다.”(이사 11,1-2) 

그리고 흔히 메시아 장으로 일컬어지는 53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라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3,2)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 곧 ‘강생’은 참으로 무참합니다. 여느 인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밀려나 마구간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로 세상에 옵니다.

그리고 이 ‘탄생’, 이 ‘오심’은 꼭 필요한 한 분이 없이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함께 있으니,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없이는 탄생할 수도,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무력한 아기로 오는 까닭입니다.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요 또 세상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곧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을 필요로 하는 존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존재!”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기’의 약한 존재로 탄생하셔야 했어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동시에,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여야 사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이 무력하고 약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약하기에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고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 사는 존재”,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살아야 할 참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오니, 주님!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이처럼, ‘성탄’은 “우리가 타인의 약함을 받아들여야만 살 수 있는 존재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임을 가르쳐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취약함을 거부하고 자력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높아지려고 했던 ‘옛 아담’이 범한 죄를, 이제 ‘새 아담’이 취약함을 받아들여 낮아지고 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밤 내내 야간철야 근무를 하고 있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 사실을 두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도 2,11)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이 복된 날, 축하에 축하를 드립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12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구유의 아기 예수여!

높은 곳에서 지고한 사랑으로 찾아오시어 
밀리고 밀려 떠밀려난 마구간 구유에 
진리의 자리를 깔고 누운 빛, 아기 예수여!
비추신 당신의 신비, 
강생의 도를 가르치소서.

무능해지고 
무력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밀려날 줄을 알게 하소서. 
제 몸을 누인 그 어디든 
밥이 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먹힐 줄을 알게 하소서. 
내어줄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짐이 내어주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주고, 
생명이 되어주기를 배우게 하소서.

어둠을 뚫고 광야를 건너
죄를 부수고 장벽을 넘어
멀고 먼 길을 달려온 빛, 아기 예수여!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내려가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것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약해져,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약하기에,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신뢰에 내맡겨져 부서지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부서져 사라지는 
그 아름다움을 지니게 하소서.

진리의 빛, 아기 예수여!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상대의 구원을 돌볼 줄을 알게 하시고 
사랑으로 벌어지는 
보살피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양식이 그리스도가 되게

찬미 예수님. 거룩하고 복된 성탄 밤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빕니다.

그러나 오늘 모두가 다 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밤, 저는 한 가지 질문으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먹고 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먹는 것엔 다 그 본래의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 깊은 산속 바위 밑에 홀로 사는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주식은 사람이 먹는 밥이 아니었습니다. 소에게 주는 사료였습니다. 그는 매끼 사료를 씹어 먹으며 무려 50년을 넘게 살아왔습니다. 제작진이 경악하며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습니다.

"밥 해 먹기 귀찮아서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가정 폭력의 공포가 그를 산속으로 도망치게 했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인간으로서의 존엄인 따뜻한 밥마저 포기하고 짐승의 사료로 연명했던 것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소는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산에서 내려오게 한 것은 경찰이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갓 찐 따뜻한 고구마와 쌀밥을 들고 찾아간 이웃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이웃의 간곡한 권유에 10년 만에 사료 대신 따뜻한 밥을 입에 넣었습니다. 순간, 그의 얼어붙은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사료의 텁텁함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와 달콤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맛있네... 사료보다 낫네." 

그 밥 한 숟가락이 그를 짐승의 삶에서 사람의 삶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바로 먹는 것을 바꿈으로써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오십니까? 밥으로 오십니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구유가 무엇입니까? 여물통, 즉 소나 말이 밥을 먹는 밥그릇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짐승의 밥그릇에 당신 몸을 담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세상의 욕망, 돈, 쾌락이라는 '사료'를 먹으며 영혼이 짐승처럼 변해가지 않았느냐. 이제 그 썩어질 사료를 치워라. 그리고 이 구유에 담긴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밥을 먹어라. 나를 먹고 제발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우리는 엄마를 먼저 만날까요, 엄마가 주는 양식을 먼저 만날까요? 갓난아기가 엄마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믿어서 젖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배고프니까 본능적으로 먹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그렇게 엄마 젖을 먹다 보면 엄마의 냄새를 알게 되고, 눈을 맞추게 되고, 결국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성체를 먹다 보면, 내 안에 들어오신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목자들은 바로 하늘의 것을 먹고 하늘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곧 ‘착한 뜻’을 지닌 이들에게 평화를 선포합니다. 사랑이라는 좋은 양식을 먹고 자라야 내면에도 착한 뜻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료를 먹으며 좋은 것을 줄 착한 뜻이 생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밥이나 고구마를 먹는데, 다른 사람은 여전히 사료를 먹고 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먹는 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먹느냐는 내가 무엇을 나누고 싶으냐와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성탄절 밤, 독일 아르덴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독일군을 피해 숨어든 미군 부상병 셋을 주인 아주머니가 숨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길 잃은 독일군 넷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총구가 서로를 겨누고, 방 안에는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증오'와 '살기'라는 사료를 먹으며 서로를 죽이는 괴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성탄절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총을 밖에 두고 들어오세요. 따뜻한 수프가 준비됐습니다." 

아주머니의 그 말에, 기적처럼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끓여준 수프와 빵을 나누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수프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평화를 나눌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에 ‘평화’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밥을 나누자 그들은 적군이 아니라 배고프고 추운 '형제'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먹기로 선택한 것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독일 군의관은 미군 부상병을 치료해 주었고, 미군은 아껴둔 초콜릿을 꺼내 독일군과 나누었습니다. 그날 밤, 그 오두막은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거룩한 베들레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것은 빵이 아니라 '평화'였고, 그 자리에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사료를 먹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준은 간단합니다. '오늘 이것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은?' 물어보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에게 매일 1시간의 성체조배를 의무화했습니다. 일거리가 쏟아지는 빈민가에서, 봉사자들은 "수녀님, 환자들이 죽어갑니다. 기도할 시간을 줄이고 일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마더 데레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일이 많을수록 기도는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으면(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빈 깡통으로는 아무도 먹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의 양식은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는, 성체 조배를 하지 않고는 내 영혼이 숨을 쉴 수 없다." 이런 절박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짐승의 밥그릇에 오신 주님을 찬미하며,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밥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도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마음은 살짝 쉬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즐거운 성탄입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제가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 나왔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1) 직원을 불러 항의해서 나온 음식을 되돌려 보내고,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받는다.

2) 그냥 먹는다.

3) 항의 후, 기분 나쁘다면서 나가 버린다.
 
뭐, 답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2번을 선택합니다. 착해서가 아닙니다(실제로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음식도 괜찮기 때문입니다(이 점은 부모님께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편식하지 않고 어떤 음식이든 다 잘 먹으니까요). 솔직히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런 부분에 제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부정적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까다롭고 완벽한 척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화합하지 못하니 당연히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느끼기에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려는 마음이 아닌, 그냥 불편함만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소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그리고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불편한 자리가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고, 이를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취해서 우리 역사 한복판으로 오신 것입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철저하게 불편한 길이었고, 또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탄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 수도 또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랑을 치료한다. 받는 사람, 주는 사람 할 것 없이(K.A.매닝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은 일상이 곧 거룩함의 자리임을 일깨워 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생활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일상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삶으로 말씀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사람 안에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사람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낮아지기를 선택하신 사랑입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신 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신 사랑이 시작된 은총의 날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 축하드립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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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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