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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5년 12월 2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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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정리해 안내드립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집회 3,2-6.12-14)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제2독서
    (콜로 3,12-21)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복음
    (마태 2,13-15.19-23)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집회 3,2-6.12-1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콜로 3,12-21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2,13-15.19-23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5년 12월 28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7:3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의 말씀 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 바로가기</bㅔ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난민의 길에서 드러난 성가정의 순종과 사랑

주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실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 가정은 위협과 적대감에 쫓기며 두려움, 불확실성, 시련으로 이어지는 난민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놓치고 나서 바로 포기하지 않고 군사들을 보내 줄곧 이 가족을 추격하였다고 합니다. 이 가족은 헤로데의 군사들을 피하여 여기저기서 몇 시간, 하루, 며칠, 길게는 6개월을 머물렀고, 때로는 나무 밑에서 때로는 어느 집에서 머물렀으며, 때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가정은 이집트에서 3년 11개월 정도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낯선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하였던 이 부부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께 순종한 결과는 이렇게 시작하여 평생 이어집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결과를 감수하면서 늘 하느님께 충실하였고, 이 가족의 순종은 우리를 모두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성가정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이주민과 난민들의 현실을 떠올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되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발걸음에는 수많은 발걸음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가족의 발자취를 봅니다. …… 많은 경우, 이 떠남에는 생존이라는 한 가지 이름만 있습니다. …… 이 시대의 헤로데들로부터 살아남으려는 것입니다”(2017년 성탄 전야 미사 강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주민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위험에 놓인 곳, 거부와 적대적 위협을 경험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로 힘을 얻고 덕들로 중무장하고 

1인 가구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 생각에 1인 가구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정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가정에 대한 사전의 정의를 보면 부부를 중심으로 그 부모나 자녀를 포함한 집단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가구는 집안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 5인 가구는 다섯이 한집에 살아도 가정이라고 할 수 없고, 1인 가구는 더더욱 가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이 36%나 되는데 왜 1인 가구가 이렇게 늘어날까요? 제 생각에 같이 사는 것이 싫기 때문이고, 같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이 살기 싫고 같이 살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어찌 사랑이 없고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집단/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던 건강한 개인주의가 차츰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개인주의로 병이 들고, 완전한 나의 자유 공간 곧 자기의 사적 영역(Privacy)을 고집하게 되면서 이웃을 침범자 또는 간섭자로 여기게 되고 관계 맺기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실로 많은 사람이 관계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맹수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인간이 두렵고 그래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관계 두려움이 큰 사람은 1인 가구를 이루거나 그래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반려동물과 대체 가정을 꾸립니다.

관계 두려움-대체 가정, 이것이 오늘날 우리 자화상이거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인데 우리 신앙인들과 공동체는 성가정에서 뭘 배우면 좋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두렵기에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두려워 인간을 피해 자기 안으로 숨어드는 것이 보통 인간들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두려울 때 하느님께로 피해 가서 숨는 존재들입니다.

물론 숨기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세벨이 두려워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는 엘리야가 천사의 음식으로 힘을 얻고 동굴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듯, 두려운 형과의 만남을 앞두고 야곱이 하느님과 밤새 씨름하여 힘을 얻듯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힘을 얻고 하느님의 덕들로 중무장을 하는 겁니다. 이 중무장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오늘 이렇게 묘사하며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1단계: 관계가 두려울수록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2단계: 기도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중무장하고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3단계: 만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사랑의 가정과 사랑의 군대를 이룰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에 합당하게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주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이다(콜로 3,12-14 참조). 또한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콜로 3,15 참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하며,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고(콜로 3,16-17 참조),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다(콜로 3,18-20 참조).

한편, 이를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곧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아야 할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자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주인이요 중심이 되는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활기 찬 가정이 되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딸 가진 부모님들 필독: 사윗감 고를 때 '이것' 하나만 확인하세요.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본래 교황청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앙보다 더 거대한 집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왕조의 보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그는 하느님의 법을 자신의 뜻에 맞게 고치기로 결심합니다. 교황청이 혼인 무효를 허락하지 않자, 그는 "내 가족과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법도 필요 없다"며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어 이혼을 감행합니다. 그는 이것이 가문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가장의 선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가정은 피바람 속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쫓겨나 외롭게 죽었고,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들은 죽거나 버림받았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녀들이었습니다.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처형되거나 쫓겨나는 것을 보며 공포 속에 자랐고, 훗날 서로의 종교를 탄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 불리는 살육의 역사를 썼습니다. 

헨리 8세는 임종 순간, 자신이 세운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가톨릭 사제를 찾으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그가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튜더 왕조는 결국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가장이 하느님의 뜻(혼인의 신성함)을 버리고 인간적인 계산(아들 욕심)을 선택했을 때, 그 가정은 가장 화려한 왕궁에 살면서도 가장 비참한 지옥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는 말년에 하느님의 보호하심보다 자신의 '외교술'을 더 믿었습니다.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고 가족(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이방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가족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인간적인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진노하셨고, 그의 사후 나라는 남북으로 쪼개져 서로 칼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들여온 우상이 자식들의 미래를 찢어놓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아버지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방식, 그 '설계도'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단순히 남녀가 만나 이룬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정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이 땅 위에 구현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랑을 주는 이(Lover, 성부), 사랑을 받는 이(Beloved, 성자),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랑(Love, 성령)." 가정도 이 모델을 따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Love, 성령)을 주는 존재(Lover)이고, 아내는 그 사랑을 받아(Beloved) 순종하며, 그러면 그 삼위일체 사랑이 완성된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자녀)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엄마는 자녀와 또 이런 삼위일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질서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성령을 통한 사랑 안에서 교회가 탄생한 것과 같고, 그렇게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선교를 통해 새로운 자녀를 탄생시키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델이 가정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사랑을 주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도꼭지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물을 줄 수 없듯이, 아버지도 하느님께 연결되어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강요뿐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왕이기 이전에, 하느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신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에 '천명(하느님의 뜻)'이 머뭅니다. 

자연계를 보면 이 원리가 더 명확해집니다. 아프리카의 군대개미는 눈이 퇴화하여 앞서가는 개미가 남긴 냄새(페로몬)만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선두 개미가 길을 잃어 냄새를 놓치고 자기 꼬리를 따라 돌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뒤따르던 수만 마리의 개미 떼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뱅뱅 돌다가 집단으로 탈진해 죽습니다. 이를 '앤트 밀(Ant Mill, 죽음의 소용돌이)'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하느님이라는 영적 방향(냄새)을 놓치고, 자신의 꼬리(욕망이나 불안)를 물고 돌기 시작하면, 그를 믿고 따르던 온 가족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공멸하게 됩니다. 

반면 철새들의 이동을 보십시오. 기러기 떼가 V자로 수만 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는 것은, 맨 앞의 리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자기장'을 느끼며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날면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자기장)에 순종할 때 무리 전체가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자기장)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따르는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가정의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피뢰침은 벼락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맞았을 때, 그것을 품고 있지 않고 땅으로 안전하게 흘려보내 건물을 보호합니다. 아버지가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련과 스트레스라는 벼락을 맞았을 때 그것을 가족들에게 폭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아버지는 그 고통을 하느님께로 흘려보내(Grounding) 가정을 안전하게 지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바로 이 '자기장을 읽는 아버지'이자 '가정의 피뢰침'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 할 때, 요셉은 꿈을 꿉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한밤중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이집트로 가라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식보다 하느님의 꿈(계시)을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했기에,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맑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노아는 산 꼭대기에서 거대한 배를 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조롱했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여 배 짓는 일을 도왔습니다. 노아의 권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가 맑은 하늘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하는 아버지 덕분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정한 가장의 권위는 큰 목소리나 경제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그 모습에서 나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도 어린 시절, 미사 중에 기도하는 아버지 루이 마르탱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빠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인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얼굴에는 천국이 비치고 있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훈계로 자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그 '등'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안정감이요, 따라야 할 이정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의 가장 여러분, 그리고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의 신심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군대개미의 죽음'을 막고, '기러기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가장의 기도는 가정이라는 배의 키를 잡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딸이 있고 딸을 시집보내려고 할 때, 그 사위가 될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자기 뜻대로 가정을 이끌 것인지, 아니면 하늘의 뜻을 찾는 기도하는 사람인지. 그것에 따라 딸과 손주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물론 딸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생명을 낳는 지혜로운 여인으로 키워야 합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묻고 듣는 '요셉 같은 가장', '요셉 같은 신앙인'이 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 무릎 꿇는 아버지라야 가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육아 전문가가 나오는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의 일상을 관찰하고, 육아 전문가가 아이의 기질과 부모의 양육 태도를 분석하여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또 이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에 ‘더 아이를 낳기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부모의 부족함으로 자기 아이가 비뚤어져서 실패자, 낙오자, 소시오패스, 우울증 환자 심지어 범죄자가 되어버릴까 두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임지지 못할 거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나오는가 봅니다. 
 
물론 “그냥 대충대충 키우세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 탓만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되는 이 세상 탓이 더 크지 않을까요? 특히 육아는 어떤 대가나 특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즉, 세상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사랑의 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또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종’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 다른 감정들이 들어가게 되면,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곤 합니다. 물론 사랑의 실천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주님께 맡기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16명이 한방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불을 끄면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문제는 성호경을 긋고 사도신경을 하기 전에 잠들어 버립니다. 아침이 되면 항상 이 친구의 묵주는 아침에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 친구에게 “그냥 잠들어 버리는데, 왜 묵주기도를 하려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묵주기도 하다 잠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 주신대. 내가 하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더 효과가 있잖아.”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냥 고상하고 평온한 이상적인 가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살해 위협을 피해 밤중에 국경을 넘어야 했던 ‘난민’이었습니다. 즉, 아무런 ‘문제없음’으로 성가정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성가정이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부모 공경과 자녀 존중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대하고, 자녀는 부모를 통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곧바로 따랐던 요셉 성인의 모습이 모범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트리지만, 많은 사람이 부러진 그곳에서 더 강해진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는 가정입니다. 예수님의 성가정은 불안정한 삶, 낯선 땅, 힘겨운 가난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그 가정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정입니다. 성가정의 신앙은 계산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입니다. 흔들리되 중심을 잃지 않는 믿음의 가정입니다. 높아지려 하지 않고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낮은 자리를 택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서로의 존재 방식을 열어 주는 자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성가정의 안전은 구조가 아니라 관계의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옳음의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고 존엄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성가정이란 이상적 모델을 흉내 내는 가정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에서 가치를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매 순간의 위기 속에서도 사랑을 살리는 삶의 자리, 성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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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새서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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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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