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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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1,17-19)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오늘 복음
(마르 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레 1,17-19
오늘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마르 6,17-29
오늘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9일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01
✚ 강론시작 07:05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날 헤로데와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은 누구인지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과 관계 없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과 연결하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마태 14,12)라고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견주어 보면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요한의 죽음은 중요합니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마르 9,12-13)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관점에서 구약의 엘리야는 신약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러나 그는 화해의 직무를 완성하지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신약의 인물이면서 구약의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을 살펴봅시다. 평소 요한을 의인으로 생각하여 그의 바른말을 불편해하면서도 의식하던 헤로데는, 생일잔치 때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한편 교활하게 자신의 딸에게 요한의 머리를 청하라고 이른 헤로디아는 목표를 이루려고 온갖 수단을 정당화하는 인물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요한의 목이 베이는 데 자기 잘못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참극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라고 읊조리는 헤로데는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우유부단함과 두려움이 특징인 비겁한 인물입니다.
오늘날 헤로데와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은 누구인지요? 이 셋 가운데 내 안에서 누구를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헤로디아라는 한 여자의 앙심 때문에 죽었을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소녀의 그까짓 춤 값 때문이었을까? 이 축일을 지낼 때마다 드는 의문입니다. 왜냐면 세례자 요한이라면 더 큰 사명을 수행하다가 죽어야지 이까짓 여자들의 앙심에 의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맞는 생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여자들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은 것이고,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구자라는 그의 운명에 따라 죽은 겁니다. 이런 면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 독서를 보면 베다 성인도 같은 의문을 가졌으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의미를 타당하게 부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목숨까지 바치게 된 것은 우리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박해자가 그를 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라 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 말라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나는 진리이다.’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면에서 주님과 세례자 요한은 샴쌍둥이입니다만 같은 운명의 쌍둥이일지라도 순서 면에서는 같지 않고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면에서는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다른 점은 먼저가 아니라 그 모범을 따라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의 용기와 사랑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주님이 말씀하시듯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을 용기는 세례자 요한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지만 사람들 앞에 서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는 그에게, 하느님 앞에 서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안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그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때문에 죽고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의 용기를 본받기 위해 용기를 주십사고 기도하는 한편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필리 1,29 참조)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떠올리면, 금세기의 의인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당시의 국가교회를 탈퇴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1945년,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 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 의식’으로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옥중서간>에서 썼던 이런 말이 적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을 위하여 바쳤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예수님처럼 죽음을 통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폭군이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 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가르쳐줍니다. 곧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목숨을 바쳐 우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6,18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
제 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혀가 헛된 맹세와
거짓의 덫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을 말하게 하소서.
불평과 비난이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을 증언하게 하소서.
제 혀를 말씀에 묶어 두고,
온 몸이 혀가 되어
삶으로 외치게 하고서.
온 몸으로 외치는
십자가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이 죽어갈 때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다.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한 의로운 예언자의 참혹한 죽음을 기억합니다.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대가로, 한 소녀의 변덕스러운 요구에 의해, 진실을 외치던 거룩한 예언자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바쳐졌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6,17-29)을 들으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도대체 누가 요한을 죽였는가?” 답은 명확해 보입니다. 부도덕한 욕망에 사로잡힌 헤로디아, 그녀의 유혹적인 춤으로 어머니의 증오를 실현시킨 딸 살로메, 진실이 두려웠지만 체면 때문에 악을 허락한 비겁한 왕 헤로데, 그리고 칼을 휘두른 이름 모를 군사. 이들이 바로 살인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뿐일까요? 그 연회장에 함께 앉아 있던 수많은 신하와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한 예언자의 목이 아무렇지 않게 베어지는 그 끔찍한 광경을, 술잔을 든 채 침묵하며 지켜보았던 그들은 아무 죄가 없을까요?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불편한 진실이니 모른 척하자”며 외면했던 갈릴래아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그들이 한목소리로 “예언자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외쳤다면, 헤로데는 과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오늘 기념일은 우리에게 무서운 진실을 상기시킵니다. 정의가 죽어가는 순간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共謀)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진실을 뼈아프게 보여주는 두 개의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다른 하나는 한적한 시골길 위에서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1964년 3월, 미국 뉴욕 퀸스의 한 주택가에서 일어났습니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젊은 여성이 새벽 3시경,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괴한의 칼에 찔렸습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오, 하느님! 저 사람이 저를 찔렀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파트 몇몇 집의 불이 켜지고, 창문으로 사람들이 내다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저 여자를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자, 범인은 잠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범인은 다시 돌아와 그녀를 또 찔렀습니다. 키티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지만, 범인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가 세 번째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끔찍한 살인은 30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 38명의 이웃이 그 비명 소리를 듣거나 공격 장면을 목격했지만, ‘내가 나서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 신고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저 침묵하고 방관했습니다.
이 차가운 대도시의 침묵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습니다. 중국의 단편 영화 ‘버스 44’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버스에 올라탄 강도 두 명이 승객들을 위협하고, 젊은 여성 운전사를 버스 밖으로 끌고 나가 풀숲에서 겁탈하기 시작합니다. 운전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만, 버스 안의 승객들은 창밖을 외면하거나, 못 들은 척 눈을 감아버립니다.
바로 그때, 안경을 쓴 한 젊은 남자가 소리칩니다. “당신들 뭐 하는 거야! 그만둬!” 그는 버스에서 내려 강도들에게 달려들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는 강도의 칼에 다리를 찔리고, 길가에 버려집니다. 잠시 후, 운전사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버스에 돌아옵니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외면했던 승객들을 훑어봅니다.
그때, 다리를 절뚝이며 버려졌던 젊은 남자가 버스 문을 두드리며 태워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운전사는 그를 향해 소리칩니다. “내려요!” 그리고는 문을 닫고 그 영웅을 길에 내버려 둔 채, 버스를 출발시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는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하여 강물 속으로 추락해버립니다.
키티의 비명을 외면한 38명의 이웃과, 운전사의 고통을 방관한 버스의 승객들. 그들의 침묵은 운전사의 존엄성을 짓밟았고, 그녀의 영혼을 죽였습니다. 도울 수 있었으면서 돕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소극적인 형태의 가장 잔인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빌라도와 로마 군인, 율법 학자들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라바를 풀어주시오!”라고 외쳤던 군중들, 그리고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살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하거나 악에 동조했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문제 앞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살리려 하지 않는 자는, 소극적으로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삶은 ‘살리는 일’에 대한 적극적인 투신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결코 ‘방관자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불의 앞에서, ‘나는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수많은 민주화 시위가 피로 진압된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공포와 침묵에 잠겨있던 그 순간, 장안대로(長安街) 위에 한 줄로 늘어선 탱크 대열 앞으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거대한 강철 괴물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탱크가 오른쪽으로 피하려 하자, 그도 오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탱크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도 왼쪽으로 따라 움직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탱크 위로 올라가, 조종석을 향해 무언가 말을 건넸습니다.
전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탱크맨(Tank Man)’으로만 불릴 뿐입니다. 그는 이름도, 권력도 없었지만,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를 짓기를 거부했고, 침묵하는 다수가 아닌 행동하는 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야고 4,1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학창 시절에 누가 취미를 물으면 ‘영화감상’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실제로 중고등학생 때 시간이 나면 무조건 극장에 갔고, 돈이 부족할 때는 동시상영 극장에 갈 정도로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현재는 극장에 가게 되면 함께 간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코를 골며 잡니다. 이렇게 잠을 푹 자고 오니, 영화 보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안 간지가 벌써 15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그리고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하지 않았던 공부에 충실하면서 많은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다가 찰스 다윈의 고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서른 즈음만 해도 문학, 그림, 음악 등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학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좋아했던 취미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정신은 그저 온갖 사실을 분쇄해 그곳에서 일반 법칙을 끄집어내는 기계가 된 것만 같다. 미적 감각을 관장하는 뇌의 한 부분이 왜 퇴화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삶을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짧게라도 시를 읽고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음악을 들을 것이다. 진작 그렇게 했다면 그 방면에서 퇴행된 뇌가 건강하게 유지되지 않았을까? 심미적 취향을 잃은 것은 단지 즐거움을 잃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도덕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무디게 만드는 탓이다.”
행복한 사람은 후회를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집중하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 복음은 세레자 요한의 순교를 전해줍니다. 헤로데는 당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갈릴래아 지역을 다스리던 왕인데,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이 공개적으로 꾸짖습니다. 그리고 투옥되지요. 여기서 특이한 점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알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큰 환심을 사게 되었고, 헤로데는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과도하게 맹세합니다. 권위를 과시하는 모습입니다. 이때 요구했던 것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데는 자기 체면 때문에 살인을 명령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무엇이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과 약속 때문에 악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는 나중에 나오지만, 예수님의 출현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 압력과 체면 때문에 악을 선택한 결과는 고스란히 자기의 불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후회할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꽃잎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았다. 그 향기가 세상에 남아, 우리의 기억 깊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하이바이, 마마!’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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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서 1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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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씀,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말씀이 평화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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