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테살 4,13-18)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4,16-30)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1테살 4,13-18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루카 4,16-30
오늘 복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일
김진호 비오 신부
✚ 교황님 9월 기도지향 00:06
✚ 미사시작 00:40
✚ 강론시작 07:18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처럼 아끼시는 사랑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이 공생활의 첫걸음은 갈릴래아에서 하신 전교, 특히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이 예식에 독서자와 설교자로서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61장 참조) 찾아 읽으신 다음,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왔으나 폐허가 된 도시와 이방인 차지가 된 땅을 보면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였던 예언자의 모습을 몸소 실행하시며, 당신 사명이 바로 그 예언자의 사명과 같음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당신 공생활 전체의 청사진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나 죄인도 하느님께서 환대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당신 말씀과 삶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기심과 욕구와 죄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이 선물로 거저 주어집니다. 삶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빚이 탕감되고 노예살이가 끝나며 정의가 올바로 세워지는 기쁨의 해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해는 하느님의 보복의 날이기도 합니다(이사 61,2 참조). 잘못한 이에게 벌을 주는 보복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괴롭히던 가난과 억압과 고통이라는 악에게 하시는 보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처럼 아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의 희망은 무엇이고, 너희 기도는 무엇인가?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조숙했는지 어른들이 부르던 <희망가>을 곧잘 따라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가사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이 가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나의 희망은 뭐였고, 지금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저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 중간에 제가 프란치스칸이 되었지만,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기에 어림없다고 생각되어 잠시 수도원을 나갔을 때는 신문 기자를 하면서 소설 쓰는 사람이 되는, 그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 후엔 꼭 짚어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던 같지는 않고, 굳이 얘기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처럼 사는데,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 하기 시작한 점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아닙니다. 이전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 곧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제가 들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저의 희망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저의 흔들림 없는 희망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이제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꿈꾸다가는 도리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저는 제 건강을 근근이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이때 제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없기에 그러기에 도리어 저세상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 희망만이 절망이 아니라 저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뭘 달라는 기도는 줄어들겠지요. 건강을 주십사 기도하기보다는 아프더라도 하느님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플 때 프란치스코처럼 백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 하고 청하진 못하더라도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때도 늘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기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선포는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희년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혹 오늘 우리도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30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을 가두는 것은 지금 당신이 가장 익숙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가슴 아픈 장면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감탄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러나 그 감탄은 순식간에 차가운 의심과 경멸로 바뀝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눈앞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낡은 상자 안에, 살아있는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가두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익숙함은 분노가 되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고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해야 할 ‘고향’이, 종종 진리를 죽이려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성장을 위해 우리가 떠나야 할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성공 경험일 수도 있고, 나의 지식, 혹은 나를 규정하는 세상의 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천재’라는 이름의 가장 화려한 고향에 갇혀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William James Sidis)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IQ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생후 18개월에 뉴욕 타임스를 읽었고, 11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천재 신동’이라는 타이틀이 바로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향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엄청난 기대와 압박 속에서, 그는 점차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익숙한 ‘천재 신동’으로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그는 교수직을 거부하고,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허드렛일을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1944년, 46세의 나이에 그는 보스턴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라는 안락한 고향을 떠나, 수십 년간 ‘중간계’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창조하는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페이팔 매각으로 얻은 ‘안락한 백만장자’라는 고향을 떠나, 파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테슬라와 스페이스X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칙이 우리의 신앙생활, 특히 기도의 여정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영적인 성장이란 끊임없이 과거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박차고, 새롭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저 계속 염경기도, 묵주기도, 혹은 뜨거운 심령기도에만 머물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더 높은 기도’라는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장해야 합니다. 염경기도나 심령기도의 은총을 충분히 체험했다면, 이제 그 익숙함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독서기도’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독서기도가 편안해졌다면, 그 말씀을 나의 삶으로 가져오는 ‘묵상기도’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이 익숙해질 때, 마침내 모든 생각과 말을 내려놓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향심기도’와 ‘관상기도’라는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 고향을 떠나야 할 때라는 신호입니다.
위대한 영성의 대가들은 모두 이 ‘떠남의 여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장을 일곱 개의 궁방을 차례로 통과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묘사하며, 영혼이 안락한 ‘고향’에 머무르려는 위험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제삼 궁방에서 누리는 평화와 위안에 만족하여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녀는 각각의 궁방에서 얻는 은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마침내 일곱 번째 궁방에서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을 오르는 영혼에게, 우리가 이전에 느꼈던 기도의 달콤함과 위로라는 ‘영적 고향’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맛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소유하려면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라는 말은 어찌보면 ‘고향에서 계속 환영받으려면 예언자가 되기는 포기하라.“라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해졌다면 지금 자리를 박차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성장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어느 신부와 쇼핑몰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간 것은 아니고, 쇼핑몰 안에 있는 어느 식당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상점이 있었는데, 그 신부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더니 “저것 너무 멋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명품을 좋아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 명품 가게 안의 진열이 너무 멋있지 않냐면서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때에 지어진 ‘석보상절’이라는 불경 해설서에서는 아름다움의 ‘아름’을 ‘나’로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아름다움은 곧 ‘나다움’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명품이 아니라 상품을 진열하는 방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남들은 모두 별로라고 말하는 것을 아름답다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는 다른 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며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일부를 봉독하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말씀에 군중들은 놀라워했지만,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의문을 표시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익숙함과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모습이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자기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길 원합니까? 주님과 언제나 함께해야 우리의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익숙함과 선입견으로 자기만 맞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양방향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과 같다 (데이비드 비스코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그들의 용기와 믿음을 기리며 마음을 모읍니다. 오늘이라는 이 선언은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현재가 이미 가장 좋은 은총의 시간임을 알려줍니다.
오늘은 곧 우리 안에서 말씀을 살아내는 날입니다. 말씀은 책 속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사건이 되어 길을 엽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몸과 삶을 통해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간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현재가 바로 진리와 구원의 자리가 됩니다.
참된 말씀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존재를 바꾸는 변화이며 삶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의 작은 응답조차 은총의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 민족만의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의 "오늘"은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구원을 드러냅니다.
성령 안에서 시작된 복음 선포는 역사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현되는 은총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말씀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길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작은 실천 안에서 세상에 퍼져갑니다.
순교자들의 믿음과 용기를 떠올리며, 우리도 오늘을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의 순간으로 살아내는 새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의 가장 큰 핵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오늘입니다.
테살로니카1서 4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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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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