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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0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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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기리며 살았네.

하느님, 하느님 백성을 자비로이 돌보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시니 복된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구를 들으시고 교회의 목자들에게 지혜의 성령을 내리시어 그들이 백성을 올바로 가르치고 거룩해지도록 이끌며 자라나는 그 양들을 보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콜로 1,1-8)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4,38-44)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콜로 1,1-8
오늘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2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형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6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7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8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4,38-44
오늘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3일
최동석 안드레아 신부

 

✚ 성 대 그레고리오 소개 00:06

✚ 교황님 9월 기도지향 01:30

✚ 미사시작 01:49

✚ 강론시작 08: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예수님께 이끄는 선한 이웃이 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은 심한 열에 시달리던 시몬의 장모를 위하여 예수님께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응답하시고자 그 부인을 고쳐 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 부인이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표현하며,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열이라는 악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인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 표현에서 유추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인보다 위에 계시기에 부인에게 몸을 숙이시는, 곧 당신을 낮추시어 상대에게 맞추시는 사랑의 모습으로 치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십니다. 이렇게 부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이제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섬김의 삶, 시중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선물을 시몬의 장모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이에게도 베푸십니다. 당시에는 병을 앓는 것이 하느님 벌로 여겨졌기에, 그리고 마귀 들렸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기피 대상이 되었음을 뜻하기에, 이 고통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는 저녁 무렵에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여기서도 이들은 시몬의 장모처럼 그들을 예수님께 이끌어 주는 착한 사람들 덕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법처럼 뚝딱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구원을 체험합니다. 우리도 주위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을 예수님께 이끄는 선한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희망부터 천상에 두는

우리 전례는 어제까지 테살로니카서를 읽고 오늘부터 콜로새서를 읽습니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칭찬한 바오로 사도가 콜로사이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칭찬하니 읽는 저도 마음이 한결 편하면서도 정말 좋은 자극을 받는데 오늘은 이렇게 칭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면 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콜로사이 신자들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 곧 이웃 사랑이 아주 훌륭한데 그것은 그들이 천상 것에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완벽한 향주삼덕(向主三德)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삼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에서 삼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복음삼덕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전서 13장 사랑의 찬가에서 모든 덕 가운데 이 향주삼덕이 뛰어나고 그중에서도 사랑이 으뜸이라고 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천상적이어야 합니다.  

지상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과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불완전하다고나 할까 천박한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복 주시는 하느님으로 철석같이 믿지만 하느님의 그 복이 고작 재물이거나 건강이거나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명예 직위이고 이런 축복을 삼박자 축복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사랑은 또 어떻습니까? 이웃 사랑은 어떻고 하느님 사랑은 어떻습니까? 나와 내 가족만 사랑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겠다는, 하느님 사랑의 경지까지 올라야겠다는 마음은 도무지 없습니다.  

하느님도 나와 내 가족을 잘 되게 해주시는 하느님만 사랑합니다. 고난을 통해 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은 철저히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입니다.  

연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내 땅에 곤두박질치듯 희망이 믿음과 희망을 데리고 저 하늘까지 오르지 못하고 날개 잃은 천사처럼 믿음과 사랑을 동반하여 이 세상에 처박힙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부터 천상에 두는 우리여야겠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43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 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왜 생존 지옥의 삶으로 떨어지는가?

찬미 예수님
제가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 유학 온 지 며칠 만에 집시들에게 주머니를 몽땅 털린 적이 있었습니다. 엉겁결에 그들 중 한 명의 팔목을 잡고는 “경찰, 경찰!”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며칠 전에 배운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집시들은 나에게 잡혀 있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고 자신들이 가진 돈들을 땅에 떨어뜨리며 “여기 있잖아, 네 돈?”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팔목을 잡은 채 그 돈들을 주워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잔돈만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더 “경찰, 경찰!”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더 큰 액수의 돈들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집시를 턴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경찰을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들은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한 것처럼 의심만 되어도 길에서 바로 그들을 구타합니다. 그들은 불법 체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살 수 없어서 몰래 이 나라로 숨어든 이들입니다.

저는 그들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하라고 보내서 왔고 그 값도 다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당했습니다. 물론 유학을 가기는 싫었습니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학위를 따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탈리아에 머물 것이면 생존만이 목적인 삶이 아니라 그런 사명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집시들처럼 생존만을 위해 살고, 누구는 하늘에서 사명을 지니고 파견을 받았음을 믿고 그 사명을 완수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파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먼저,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았던 한 인물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 작가 중 한 명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헤밍웨이는 그 누구보다 강인한 남성이었고, 치열한 ‘생존’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고,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에서 사자와 버펄로를 사냥하며 생존했고, 깊은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소설들은 모두 이 ‘치열한 생존 투쟁’을 예찬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땠을까요? 그는 평생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더 강하게, 더 유명하게, 더 부유하게. 이 생존에 대한 집착은 그를 알코올 중독과 극심한 우울증의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안정된 사랑을 찾지 못했고, 동료 작가들을 향한 끝없는 질투와 경쟁심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자신을 감시하는 그림자가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링 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으려는 챔피언처럼 살았지만, 정작 그 싸움의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남는 것’ 외에 목적이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그에게 더는 살아갈 이유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결국 1961년 7월 2일 아침,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평생을 ‘생존’하기 위해 싸웠던 영웅의 마지막은,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의 비극은 그의 부모님들 탓이 큽니다. 어머니는 헤밍웨이에게 여장을 시켰습니다. 아들인 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조울증으로서 헤밍웨이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모를 증오하였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순종하면 행복하다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부모의 사랑을 받아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행복임을 알았더라면, 글을 싸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고 그래서 그 일로 파견받았다고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절대 자살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공부를 끝내고 학위를 가지고 비행기를 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열심히 사명을 수행하여 마지막 날 주님께 갈 때의 그 행복과 기쁨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세 명의 석공’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중세 시대의 어느 공사장에서 똑같이 돌을 쪼고 있는 세 명의 석공을 만났습니다. 나그네가 첫 번째 석공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석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그냥 돌 쪼고 있소.”

그는 ‘자기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두 번째 석공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소.” 

그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목적은 땅의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나그네가 세 번째 석공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대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돌아갈 하늘이 있다고 믿어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전부라고 여기며 생존 욕구에 찌들어 살아갈 것인가.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기념품 테스트’가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티셔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티셔츠를 외출할 때도 자랑스럽게 입을 수 있다면, 이 로고는 이제 자기 정체성과 신념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반면, 이 티셔츠를 잘 때 입거나 작업할 때 입는 옷으로만 쓴다면, 이는 그저 아무 의미 없는 기업 로고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몸에 인호가 새겨집니다. 지울 수 없는 영적 표지, 즉 영혼에 새겨지는 성령의 도장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몸에 주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자기 정체성과 신념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어서 숨기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분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주님의 자녀임을 사람들이 모르게 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선행 실천에 관한 것이고, 주님을 자랑스러워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을 자랑스러워하고 함께함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 정체성과 신념에 주님이 계신 지를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기쁘게 지금을 살고 있습니까? 
 
시몬(훗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 당시 열병은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심각한 병으로 인식했었습니다. 지금이야 항생제나 해열제가 있지만, 당시는 그런 약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열이 며칠 지속되면 죽음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 역시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발열이 아닌, 죽음에 가까운 위중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병을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뒤 장모의 행동이 인상적입니다. 복음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9)라고 말합니다.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깨어났다고 곧바로 정상적으로 생활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의 치유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치유는 회복과 섬김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치유는 단순한 건강 회복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봉사와 사랑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확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을 자랑스러워하고 함께함에 기뻐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만 머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외로움 속에서도 혼자 서는 사람이다(헨릭 입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한결 날씨가 시원해진 걸 보니, 계절이 성큼 바뀌었음을 느낍니다. 하느님 나라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치유와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을마다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신 모습은, 신앙이 고정된 장소나 형식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늘 길위에서 만나고 나누는 여정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보편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참된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공유의 선물입니다. 여기에만 머무르려는 안주가 아니라, 복음 선포의 여정과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만나고, 배우며,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복음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더 머물고 싶은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는 새로운 장(場)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안주함이 아니라 나아감이며, 안전지대가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나만의 영적 체험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익숙함을 벗어나시는 예수님을 따라 새로움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새로운 날 되십시오. 사명은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길 위의 삶이며, 복음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쁜소식입니다.

 

 

 

루카복음 4장 4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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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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