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콜로 1,15-20)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5,33-39)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콜로 1,15-20
오늘 제1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루카 5,33-39
오늘 복음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5일
왕원동 대건안드레아 신부
✚ 교황님 9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40
✚ 강론시작 07:2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왜 묵주 기도를 걸어 다니면서 해야 하나요?
제가 있는 수도회에는 수련 수사들이 저녁 식사 뒤에 성모상 앞뜰을 거닐며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수련 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묵주 기도를 걸어 다니면서 해야 하나요?”
그 순간 저는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졌고 대답을 못 하였습니다. 그제야 묵주 기도를 걸으면서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관습을 따를 때 그 행동의 목적과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관습이니까’라며 무작정 따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5,34)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기도와 자선과 함께 유다인들의 중요한 신심 행위였습니다. 이 행위들로 유다인들은 경건함과 거룩함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이기에 결국 이 행위들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신 새로운 때입니다. 또한 혼인 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곁에 함께하시는 기쁜 때입니다.
단식의 근본 목적이 하느님을 닮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지금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참된 거룩함입니다.
언제나 기준은 하느님입니다. 깨어 있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새로 사랑하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왜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으셨을까? 이는 당신의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수 있도록 부대가 새로워지길 바라시지만 부대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셨다는 방증이 되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시지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이것을 저에게 적용하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저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이 고루하고 낡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저를 아예 존재조차 없애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저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낡은 정신이 새로워지길 바라실 겁니다. 회개를 바라시고 쇄신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라시는 회개와 쇄신도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회개와 사랑의 쇄신을 바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찌 새 계명이겠습니까? 이미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이것을 까먹거나 놓치지 않는 편이지만 전에 자주 이것을 까먹고 놓칠 때는 이렇게 저 자신에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다시 사랑하자! 새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래전에 하셨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듣는 것이고 새롭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제가 들은 것도 오래전부터 수없이 들은 말이지만 오늘 처음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가 새롭게 들으면 그리고 새로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저는 새 부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콜로 1,16-18)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서 함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루카 5,34)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6-38)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시대’, 새로운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준 ‘이 하늘나라’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과 더불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5,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사는 제사인가, 잔치인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져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는 방종한 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온 신랑, 즉 메시아와 함께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차가운 율법의 잣대만 들이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잔치의 본질’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잔치의 본질은 ‘기쁨’과 ‘사랑의 나눔’입니다. 잔치의 모든 규칙과 예절은 바로 이 기쁨과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잔치인 ‘미사 성제’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잔치의 본질인 기쁨과 사랑은 잃어버린 채, 차가운 규칙과 형식에만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강론은 우리 전례가 왜 점점 형식화되고 유연성을 잃어가는지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 니콘이 당시 오역과 오류가 많았던 전례서를 그리스 원문에 가깝게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성호를 그을 때 손가락 두 개를 쓸 것인가, 세 개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옛 예법’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던 수많은 신자들, 이른바 ‘옛 신자들(Old Believers)’은 이 개혁을 악마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에게 전례의 형식은 사랑과 일치라는 목적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이 사소한 규칙의 차이는 교회의 대분열을 낳았고, 수많은 옛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시베리아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배교하느니 죽겠다’며 마을 전체가 불속으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은 오늘 우리 본당 안에서도 작은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작은 실수를 참아내지 못해, 아예 신자를 냉담 시키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대부분 전례를 ‘잔치’가 아닌 ‘제사’로 보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제사에서는 실수하면 안 되지만, 잔치는 기쁨이 목적이기에 어느 정도 실수는 품어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가 세운 장애인 공동체 ‘라르슈(L'Arche)’의 이야기는, 사랑이 어떻게 딱딱한 전례 규칙을 생명의 예식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미사는 종종 소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발달 장애를 가진 한 형제가 갑자기 제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하고, 누군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엄격한 전례 규칙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 바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전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가장 약한 이들이 환대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예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율법과 단식 규정들은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아래에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는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포도주’, 즉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 새로운 사랑은 더 이상 낡은 제사의 부대에 담길 수 없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이제 전례가 슬픔의 제사에서 기쁨의 ‘혼인 잔치’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의심하며 겉돌던 시절, 어머니께서 주시던 단팥빵과 흰 우유는 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바로 그 기쁨 뒤에 순종이 따라왔습니다. 기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전례가 계속 규칙만을 강조하며 이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사랑으로 순종하고 세상으로 파견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사도’, ‘기쁨의 성인’이라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St. Philip Neri, 1515-1595)의 삶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딱딱하고 엄격해진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사 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소풍을 가고,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미사를 집전하기 직전에 우스갯소리가 담긴 책을 읽으며 웃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사제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딱딱한 규칙보다, 살아있는 기쁨과 사랑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린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미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목록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 예수님과 나누는 가장 친밀하고 기쁜 사랑의 대화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신자들과의 미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여러 교황님들께서 그의 성덕과 로마에서의 영향력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하셨습니다.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t VIII)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습니다. 그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galero)를 가져온 사절 앞에서 그 모자를 공중으로 휙 던지며 “천국, 천국, 저는 천국을 더 좋아합니다!(Paradiso, paradiso, preferisco il paradiso!)”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 신자들과의 미사는 바로 이 천국의 혼인 잔치와 같았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서, “100억과 너의 인생 30년을 바꾸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 저는 무조건 받지 않을 것입니다. 100억을 받고 30년을 빼앗긴다면 거의 90세 가까이 되니 당연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20대 청년들은 어떨까요? 30년 동안 100억을 도저히 모을 수 없으니 기꺼이 바꾸겠다고 하는 청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50대가 되어서 남은 인생을 펑펑 놀면서 마음껏 살겠다고 말이지요.
어느 신문에서 본 설문 조사가 생각납니다. 고등학생 대상으로 10억 원을 준다면 1년간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고 말했을까? 자그마치 55%가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돈을 시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즉 집값, 취업 등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램프의 요정 지니에 의해 인생 30년을 팔아 100억을 벌었지만, 기억에 없는 젊음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지금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정말로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그밖에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로 인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커다란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큰 기쁨과 행복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이나 전통적인 기도 관습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먹고 마시며 지내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다인에게 단식은 중요한 종교 행위였기 때문에, 예수님 공동체의 자유로운 모습은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종교 행위는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서 옳지 않게 보는 모습이 어떻게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 잔치의 손님’으로 비유하시지요. 혼인 잔치가 기쁨의 자리인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바로 주님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 옷 조각과 헌 옷의 비유, 새 포도주와 헌 부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단순히 옛 제도와 율법적 틀 안에 끼워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정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경쟁의 라틴어 어원 ‘competere’는 ‘함께 추구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리카르도 페트렐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멈춤을 모르는 강물처럼 늘 새로이 다가와 굳은 틀을 깨뜨립니다. 새 포도주가 은총이라면, 새 부대는 그 은총을 받아들일 우리의 내적 태도 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먼저 우리 마음이 새 부대로 변해야 합니다.
은총은 항상 새로움을 가져오고, 그 은총을 수용하기 위해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삶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내용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새로운 형식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형식은 하느님 앞에서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결단입니다. 복음은 늘 새롭고, 그 새로움을 담아낼 새로움이 필요합니다. 낡은 습관과 편견을 버리고 변화와 유연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초월을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낡은 부대에 집착하면, 새 포도주는 향기를 잃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새 은총을 담기 위해, 날마다 마음을 새 부대로 빚어가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오늘도 새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새 마음이 은총입니다.
루카복음 5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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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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