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9,13-18)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제 2독서
(필레 9ㄴ-10.12-17)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지혜 9,13-18
오늘 제1독서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필레 9ㄴ-10.12-17
오늘 제2독서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루카 14,25-33
오늘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7일
김지민 야고보 신부
✚ 한국외방선교회 소개 00:20
✚ 미사시작 01:20
✚ 강론시작 16:3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직 예수님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과 함께 길을 가는 중에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군중은 아마도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 능력에 이끌려 함께 길을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 곧 수난과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하는 길이며, 이를 위해서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리는 길입니다. 구체적으로 먼저, 가족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관계가 끊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을 선택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 곧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을 바라십니다.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고통의 원인을 캐물으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계속 그 안에 머물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차츰 내면에서부터 바뀝니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고통도 하느님 계획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고통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법,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기에 우리도 고통 속에서 당신 운명에 함께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꼭 필요한 자유를 지니려는 태도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모두 하나의 말로 귀결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하루하루 삶에서 무엇인가를 포기할 때 이 말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포기와 선택으로 우리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헤아릴줄 아는 지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면밀하게 살필 때 오늘의 주제는 잘 헤아려서 하라는 것인 것 같습니다. 덧붙인다면 무턱대고 하지 말고 잘 헤아려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턱대고 하지 않고 잘 헤아리며 뭘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먼저 앉아서 헤아리지 않겠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앉아서 따지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지혜로운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무턱대고 하는 사람이지 잘 따지고 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사랑의 일이라면 재지 않고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지혜서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저의 경우 저의 무모함을 보완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입니다. 따지지 않는 저의 옆에서 따져주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없이 저지른 경우에는 실패한 뒤에 하느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잘 헤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로 잘 헤아려야 할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이 오늘 지혜서에 있습니다.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저처럼 옆 사람에게 묻기 전에 주님께 지혜를 청하는 것이고 그것이 기도입니다. 앉아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묵상도 하고, 거룩한 지혜의 영을 보내주십사고 청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지요.
둘째로 그것이 하느님 뜻일지라도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것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자기 능력을 헤아림,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아는 것, 이것이 지혜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잘 헤아리고 안다는 것은,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있는지 헤아리는 것과 밀접합니다.
내 능력으로 곧 내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헤아려야 할 세 번째 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이 곧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예로 드신 것은 건물을 짓는 데 내 힘으로 질 수 있는지, 전투를 하는 데 내 병력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지 헤아리라는 것이고, 당신을 따르는 일에서도 따를 수 있는 것인지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이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따르려는 열망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무턱대고 주님을 따라나서지 말고 그 어려움들을 헤아려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일이냐 하면
ㅡ 부모와 형제와 자녀와 심지어 자신까지 미워해야 하고,
ㅡ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ㅡ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따르기 전 아직 열망이 있을 때는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망이 클 경우에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다 이겨내고 오히려 더 큰 열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열망이 작을 경우에는 어려움이 열망을 식게 하고, 열망이 식으면 조그만 십자가도 지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는 마치 불과 물의 관계와 같습니다. 강원도 산불처럼 워낙 센 불은 물을 갖다 퍼부어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거세게 타오르게 되지만 불길이 작고 약한 불은 한 동이 물로도 꺼지지요.
그러니 우리는 따르고자 하는 우리 열망이 얼마나 큰지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열망이 그리 크지 않다면 주님 따르기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을 청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
순교자 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벌판에 곡식은 익어가고, 산천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들려줍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로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 9,18)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의 <필레몬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여지도록 신자로서의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십자가의 지혜’로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그 길을 함께 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지혜’를 세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는 것이요,
둘째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는 것이요,
셋째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동사는 행동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9장 13절의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하였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라는 표현이 그렇고, <루카복음> 16장 13절의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과 가족들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두고 앞세워 흠숭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짐을 덜어주시기는 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두 개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곧 탑을 세우는 건축가가 소요경비를 미리 계산하는 것과 같으며, 또 자기보다 더 강한 임금과 전쟁을 할 것인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지 미리 따져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처지와 실상을 알고 자의로 소중히 책임을 지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바친다.’, ‘가납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쓸 데가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요, 돌려드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자가 아니라,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자임을 깨달을 때라야 바쳐지고 비워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바로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 신앙인이 되는 유일한 길: 그리스도의 제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거대한 군중을 향해,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러 오신 분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것은 문자 그대로 부모를 증오하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단 하나의, 타협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순위를 정하라는 뜻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심을 느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지만, 주님의 부르심보다는 위에 둘 수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버지의 뜻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의 우선순위는 ‘자기 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필름 카메라의 제왕, 코닥(Kodak)’을 생각해 봅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이름표는 ‘필름의 왕’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표를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했다면, 디지털카메라라는 새로운 기술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필름의 왕’이라는 낡은 이름표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괴할지 모르는 미래를 미워했고, 결국 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를 인정하지 못해, 2012년 파산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종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군단의 창설자’라는 거룩한 이름표를 달았던 사제, 마르시알 마시엘 데고야도입니다. 그는 20세기 가톨릭교회에서 살아있는 성인처럼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름표 뒤에는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신학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했고, 심지어 여러 명의 여성과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까? 그분을 스승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는 아마 “나는 그리스도의 군단을 이끄는 사람입니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런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낡은 이름표들을 미워하고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이름표 앞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를 먼저 붙이는 것입니다.
경상남도 진주에는 ‘남성당한약방’이라는 작은 한약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주인인 김장하 선생은 평생을 ‘가난한 학생들의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수백억 원의 돈을, 단 한 푼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모두 가난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의 청빈은 지독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낡은 자전거로 출퇴근 했고, 흔한 자가용 한 대 없이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진주의 부자’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실천한 정의였습니다.
그의 장학금을 받고 성장한 수많은 아이들 중 한 명이 바로 문형배 헌법재판관입니다. 그는 판사가 된 후에도 늘 김장하 선생을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날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어른’이셨습니다. 돈만 주는 그런 분이 아니고… 그 돈을 받으면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나도 저분을 닮은 삶을 살아야겠다.’ 그걸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냥 장학증서만 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너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향을 심어주셨어요.”
그는 평생 ‘김장하의 제자 재판관’이라는 이름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복을 입고도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스승이 보여주었던 정의를 실현하는 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의 제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세속적 욕망을 ‘미워하고’ 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탑을 세우거나 전쟁을 하기에 앞서 비용을 계산해보라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 영광스러운 이름표를 지키기 위해, 과연 내가 그토록 아끼는 세상의 낡은 이름표들을 기꺼이 ‘미워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계산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는 우리에게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헨리 8세의 깊은 신임을 받던,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이혼을 위해 교회를 거스르려 하자,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헨리 8세의 충신’이라는 이름표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표를 지킬 것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그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으로서는 먼저입니다. (I die 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우리에게 세상 모든 이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온전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이름표들 앞에 “그리스도의 제자”를 붙여봅시다. 알베리오네 복자께서는 “스승 예수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야 잘못된 길로 빗나가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이 있다면, 당당하게 고백합시다.
“나는 많이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군대에서의 생활이 다 힘들지만, 그중에서도 힘든 것을 꼽으라고 하면 ‘행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어둠 속에서 완전 군장을 하고 걷기만 하는 ‘야간 행군’은 입에서 단내가 나오고 숨을 헐떡이면서 ‘죽겠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합니다. 어떤 병사가 이 ‘죽겠다’라는 말을 계속 되뇌면서 힘들게 걷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걷던 동료 병사가 이상한 것입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병사는 생각했지요.
“드디어 미쳤구나.”
그래서 “너 미쳤어? 난 힘들어 죽겠는데, 힘들지 않아? 뭐가 좋다고 싱글벙글한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이 동료 병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나도 힘들지. 그런데 ‘죽겠다, 죽겠다’라고 말하다 보니, 내가 하는 말이 ‘주께 있다. 주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의도적으로 ‘죽겠다’라는 말보다 ‘주께 있다’라고 말했지. 이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웃음이 나오고 힘이 나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죽겠다’라는 말만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발음을 바꿔서 ‘주께 있다’라고 말하니 덜 죽을 맛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렵고 힘들면 더 기도도 하지 않고 주님도 찾지 않습니다. 힘듦 자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힘을 얻게 되고 그 힘듦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죽겠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주께 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선택에 따라 지금을 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의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이고, 둘째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시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과 놀라운 기적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이런 구경꾼의 마음으로는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께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주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진지한 결단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죽겠다’만을 말하게 되는 세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께 있다’라고 말하게 되는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명언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이전과는 다른 눈을 갖게 해준다. 이전과는 다른 입술과 귀도 준다. 그로 인해 마치 외국어 하나를 더 구사하듯 새로운 언어를 얻는다(김신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잡으려 할수록 더 빨리 사라지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버림은 자유를 회복하는 참된 길입니다. 소유는 늘 인간을 지배합니다. 내 것이라 고집할 때 우리는 자유를 잃습니다. 자유는 소유를 버린 이들의 가장 아름다운 몫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소유가 아니라 만남과 공존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유한한 소유는 결국 무너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따르는 삶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길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보다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십자가와 함께 낮아져야 우리는 버릴 수 있습니다. 버림은 곧 참된 자유의 참된 시작입니다. 버림을 통해 완성되는 하느님 자녀의 참된 삶입니다.
루카복음 14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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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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