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테살 5,1-6.9-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4,31-37)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1테살 5,1-6.9-11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9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루카 4,31-37
오늘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일
오세찬 스테파노 신부
✚ 교황님 9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40
✚ 강론시작 07:26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
나자렛 회당에 이어 카파르나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놀랐습니다. 그분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루카 4,32)이라고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권위를 지니셨을까요?
우리말로 ‘권위’라고 옮긴 이 그리스 말은 ‘권한’ 또는 ‘권능’으로도 옮겨지는 낱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도 내쫓는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그분 말씀에 놀랐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은 그분 말씀에 담긴 권위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1,22)라고 말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권위자들이었음에도 마르코 복음서는 마치 이들에게 권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를 뜻할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이 아닌 경우가 꽤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 직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 앞에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권위는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선과 같은 인류 보편 가치를 훌륭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 존재에서 나오며, 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맑은 정신으로 살기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맑은 정신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이 뭘까 생각해 봅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잠에 취해 있지 않고 술에 취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맑은 정신이란 잠과 술에 취해 있지 않은 정신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더 큰 맥락은 빛과 어둠, 낮과 밤의 맥락입니다. 정신이 빛 안에 있고 낮의 상태여야 하고, 어둠의 밤 중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하느님이고 낮이란 빛이 있는 상태 곧 은총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밤과 어둠이란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아니하여 은총 가운데 머물지 않고 죄의 어둠 가운데 머무는 상태입니다. 어두운 밤에 우리가 하는 것은 잠자는 것이고, 잠자야 할 밤에 잠자지 않으면 욕망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요즘 특히 젊은이 가운데 거꾸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야 할 밤에 뭘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일해야 할 낮에 잡니다. 암약한다고 하는데 암약(暗躍)이란 말이 밤에 활발히 활동하는 거지요.
중독자일 경우 낮술을 먹기도 하지만 밤에 술을 먹고, 술에 취해 밤에 욕망을 실현하고, 밤에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밤과 어둠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밤과 어둠 가운데 있는 정신을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썩은 겁니다. 올바른 정신은 나간 겁니다. 바오로 사도와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일컬어 육의 정신(spirit of the flesh)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과 반대되는 정신입니다.
어제부터 루카 복음을 읽는 우리가 어제는 성령이 주님 위에 내리셨다는 복음을 읽고 오늘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는 복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마귀의 영(spirit of an unclean demon)이란 어떤 영입니까?
세속에 점령당한 영이고, 당연히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맑은 영이 아닙니다. 빛이신 주님의 진리와 주님의 영 가운데 있지 않고, 빛이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며 세속의 어둠에 머물고 안주하려는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프란치스칸들을 재속프란치스칸이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재속프란치스칸들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어렵고 깨어 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무척 존경스럽고 그분들에게 많이 도전받는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정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권위있는 말씀의 힘
“희년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에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예고 장면’(1,32.35)과 ‘세례 장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이었습니다.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권위”(exo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34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이 변해야 당신의 말도 변합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크게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권위는 단순히 목소리가 크거나 논리가 정연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힘(Dynamis)’이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더러운 마귀의 영조차도 굴복시키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예수님께 말을 걸던 마귀는 즉시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권위 있는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그리고 저 역시 신자분들에게 제 말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소리를 높여도, 내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내 말에는 권위가 실리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다른 이에게 “조용히 하여라!” 하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어두운 영의 목소리부터 잠재울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떠드는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걱정, 불안, 욕망, 판단… 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우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영혼의 수준이, 창세기의 하와처럼 ‘뱀과 대화하는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 열매를 먹어도 정말 죽지 않을까?”, “하느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메커니즘입니다. 내 안의 뱀(자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말에 일일이 대꾸하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하와는 자기 안의 뱀의 목소리를 잠재울 힘이 없었기에, 결국 그녀 자신의 목소리마저 아담을 유혹하는 ‘뱀의 목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해 자신의 권위를 모두 잃어버린 비극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입니다.
그는 20대에 현대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내쉬 균형’ 이론을 정립한, 세상을 바꾼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대학 시절의 룸메이트, 어린 소녀, 그리고 정부 비밀요원이라는 환상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비밀 임무를 부여하고, 그를 위협하며,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존 내쉬는 이 내면의 목소리가 거짓임을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그들과의 대화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로 그 생각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의 위대한 수학 이론을 설명하던 목소리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혼잣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재갈을 물리지 못했기에, 세상에 대해서도 말의 권위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뱀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까요? 요즘 유행하는 명상이나 마인드풀니스가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노력만으로 생각을 없애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나는 너와 대화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시끄럽게 떠드는 자아를 ‘뱀’으로 인식하고, 나는 세례를 통해 더 이상 흙으로 빚어진 아담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 안의 뱀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입니다.
여기, 바로 이 정체성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준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도 절망과 죽음, 복수심이라는 ‘뱀의 목소리’가 매일같이 속삭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러 가던 길에,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거룩한 체험을 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생각했다… 내 앞에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진리가 나를 관통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인간 존재의 가장 큰 비밀을.”
바로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잃은 수감번호 119,104’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이 지옥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 가르쳐야 할 사명을 받은 의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습니다. 이 정체성의 변화는 그의 내면에서 울리던 절망의 목소리를 잠재웠고, 그에게서 그 어떤 고문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이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창시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에서 구원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침묵시키는 권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의 본질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모신 ‘성전’으로 변화합니다. 하느님께서 뱀과 대화하시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내 생각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세기, 위대한 설교가이자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는 이단이 들끓던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연구하며,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지쳐 성당에서 기도하던 그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묵주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네 말이 아니라, 이 기도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도미니코 성인은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유창한 말이나 논리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말을 멈추고 하느님의 말씀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기도와 그를 통해 얻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음을 모아 할 때 대화의 상대로 자아가 절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설교는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권위는 우리 시대의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한번은 한 기자가, 캘커타에 병원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성녀에게 비꼬는 투로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2페니뿐인데, 어떻게 이 큰 병원을 짓겠다는 겁니까?” 그 기자는 마치 뱀의 목소리처럼 마더 데레사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조용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권위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2페니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난하지 않으십니다.”
기자는, 아니 뱀과 같은 자아는 마더 데레사의 대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는 생각은 모조리 ‘하느님이 되어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조용히 하여라! 내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되려는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비로소 멈추게 할 수 있고, 그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그들의 뱀들도 입을 틀어막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신부 되기 전,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방학 때, 신학생으로 여름 캠프에 가면 어떻게 하면 수영장을 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영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고, 나도 수영을 얼른 배워서 멋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상상만 계속했었습니다.
신부가 되자마자 수영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해서 이제 남 부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영을 포기했습니다. 수영하면서 비염이 생겼고, 이에 따라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수영은 제게 맞지 않는 운동이었습니다. 지금도 멋지게 수영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상상하지 않고 있으며, 수영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도전해 본 경험만으로도 제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갖게 되었고,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 도전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따라서 다른 새로운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도전을 통해 반드시 어떤 목표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 그 자체로라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각종 이유를 만들면서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다면서 처음부터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참 많아 보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 따르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요? 주님을 따르는 그 시작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특별한 권위가 있었기에 모두 놀라지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인용해서 해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권위로 직접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가 드러나는 장면이 곧바로 나옵니다.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마귀가 먼저 알아보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정체는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마귀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직접 악의 세력을 지배하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신 분인에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안에 머물 때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라. 당신이 사랑하는 것,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이 남을 때까지 천천히 다듬어가면서 말이다(리오 바바우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앎과 믿음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앎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만남이며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존재 전체를 걸고 드리는 응답입니다.
악령조차 거룩하신 분의 현존 앞에서는 두려움 속에 고백합니다. 이처럼 거룩함과 악은 양립할 수 없으며, 악은 언제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우리를 억압하는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힘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해방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로만 안다는 것, 단순한 지식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짧은 지식이 하느님조차 가둘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방은 우리를 본래의 우리로 되돌려 놓는 자유의 사건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깊은 믿음입니다.
살아내는 믿음은 불안과 상처, 집착과 욕망을 치유하며 우리 삶을 진정한 자유 속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래의 우리로 살아가며, 아는 것을 넘어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고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테살로니카1서 5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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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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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동성당 미사시간 (0) | 2025.09.01 |
25/09/0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9.01 |
25/08/3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31 |
25/08/30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30 |
25/08/2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9 |
25/08/28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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