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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3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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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3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3,17-18.20.28-29)
    너를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 제 2독서
    (히브 12,18-19.22-24ㄱ)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7-14)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집회 3,17-18.20.28-29
오늘 제1독서

너를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18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20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28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9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히브 12,18-19.22-24ㄱ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4,1.7-14
오늘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31일
최정열 안드레아 신부

 

✚ 한국외방선교회 소개 00:20

✚ 미사시작 01:20

✚ 강론시작 16:4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겸손은 참된 지혜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서 드러나는 주제는 ‘겸손’과 ‘보상’입니다.

제1독서는 격언입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주님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3,29). 이는 경청으로 겸손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의 저자는 옛 계약보다 새 계약이 우위에 있음을 밝혔습니다(히브 3―10장 참조). 이제 12장은 그 정점에 이릅니다. 옛 계약인 시나이 계약과(탈출 19장 참조) 대조적으로 새 계약은(히브 12,22-24 참조) 영적이며 천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한 계약의 장소는 “시온산”,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12,22)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비유”(루카 14,7)는 지혜가 담긴 문장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지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11)로 요약됩니다. 사회적 계급과 신분에 대한 유다인들의 집착과 바리사이들의 교만을 단죄하시며 경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참된 지혜인 겸손을 지니도록 권고하십니다.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14,13)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행과 사랑 실천은 마침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14,14)라는 말씀에 따라 참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룩한 낮춤

오늘 연중 제22주일은 자신을 낮추라는 가르침을 받는 주일입니다. 제1 독서와 복음 모두 낮추라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제 생각에 낮추기는 낮춰야 하는데 왜 낮춰야 하는지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관계적인 차원과 하느님과의 관계 차원 말입니다. 인간 관계적인 차원은 그래야 관계가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보다 높은 사람이나 높아지려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높아지고 싶어도 그런 표를 보이지 말아야 하고, 표를 보이지 않으려고 해도 표가 나니 더 근본적으로는 진정 마음을 다하여 낮아지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낮춘다면 어디까지 낮춰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 발밑까지 낮춰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위치까지 낮춰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위치까지 낮추는 것이 그래도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 낮추는 것은 나도 할 만하고 다른 사람도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너무 자기를 낮춰도 상대방은 불편합니다. 친구처럼 평등해야 좋지 어떤 식의 상하관계도 불편합니다.

내가 높아도 불편하고 네가 높아도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불편하지 않게 다른 사람보다 낮추는 것은 인간적인 낮춤이 아니라 거룩한 낮춤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낮춤이란 어떤 것입니까?

다 하느님과 관련한 낮춤인데 첫째는 하느님 앞의 낮춤이고 거룩한 겸손의 낮춤입니다. 이는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라는 프란치스코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자기를 높일 수 없을뿐더러,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 위에 있지 아니할뿐더러, 한없이 자신을 밑으로 또 밑으로 내려보냅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도록 자신을 낮춥니다. 이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셋째는 사랑의 낮춤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서 낮추는 것은 사랑 아닌 다른 것이 아니듯 사랑만큼 낮추는 법이기에 사랑하면 할수록 자신을 낮출 것이고,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으로 낮추면 불행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낮추기에 불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총애를 하느님께 받기 때문입니다. 총애를 하느님께 받는 거룩한 낮춤을 살기로 다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겸손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서는 모든 악이 나온다.

오늘은 연중 제22주일 입니다. 가을의 길목입니다. 햇살과 바람이 벌판을 휩쓸고, 벌판의 벼들이 익어갈수록 고개를 깊이 떨구어가는 계절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햇살과 영의 바람으로 익어가고, 익어갈수록 고개를 푹 숙이고 낮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우리를 ‘겸손’으로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8-10)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첫째 관심은 ‘윗자리’ 입니다. 그 자리가 중요한 사람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모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섬김 받고 대우 받는 자리이고, 자신이 드러나는 자리, 곧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초대받은 이의 관심의 초점이 초대 해준 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대한 대우’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초대해 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혼인잔치의 기쁨은 어느 자리에나 다 차고 넘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기쁨에 있어서는 윗자리와 맨 끝자리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리가 기쁨이 되고 있으니, 분명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높고 낮음’은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고,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존에 대한 깨달음과 태도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요, 둘쩨 미덕도 겸손이요,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겸손한 사람, 우리의 사부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올리베따노 연합회 창설자)는 말합이다.

“성인들의 가르침 전부가 가리키는 것이 겸손이며, 갖은 말로 설득하고 요청하는 것도 바로 겸손이다. 우리가 들은 이 겸손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서는 모든 악이 나온다.”(편지 1)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이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이 밥상은 하느님이신 분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래서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어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도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이들이 있기에 더 큰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자신을 내놓으시어 당신의 몸으로 밥상을 차리시고 섬기시면서 아버지 앞에서 높여지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놓아 온 몸을 낮추어 형제들의 밥이 되는 본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초대하는 이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초대하는 이에게도 역시 ‘겸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먼저 가닿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베푸는 것 역시 단순히 시혜를 베풀거나 기대나 계산, 혹은 자신의 필요와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겸손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을 베푸는 것도 ‘겸손’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생명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오타니가 경기 도중 쓰레기를 줍는 이유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아주 이상하고도 강력한 법칙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낮아지려는 사람은 반드시 높아지고, 높아지려는 사람은 반드시 낮아진다’는 법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바로 이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 ‘여보게, 더 높은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모든 손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그저 ‘겸손은 좋은 것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권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느님께서 설계하신 이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세상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을 높여주고 싶어 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싶어 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정의 시스템’의 비밀을 좇아가 보려 합니다.

먼저, 이 정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아주 감동적인 실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콜롬비아 부카라망가의 거리에서 사는 초코(Choko)라는 이름의 한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의 학대로 집을 도망쳐, 자신처럼 오갈 데 없어 걷어 키운 늙은 개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생일도 아닌, 반려견 ‘섀기’의 생일을 축하해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며칠간 구걸하여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작은 케이크와 초 두 개, 그리고 파티용 고깔모자를 샀습니다.

길모퉁이 계단에 앉아, 그는 고깔모자를 쓴 두 마리의 개 앞에서 촛불을 켰습니다. 그리고는 서툰 솜씨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내 사랑… 너를 사랑해.” 

노래가 끝나자 그는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잘라 가장 먼저 두 마리의 개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한 조각 먹으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처럼 개들을 쓰다듬었습니다. 그는 보답할 능력이 전혀 없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것입니다.

이 장면을 우연히 한 시민이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렸고,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감동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정의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대가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마땅히 보상받아야 한다!’ 전 세계에서 후원금이 쏟아졌고, 초코는 이제 더 이상 노숙자가 아닌, 동물 보호소를 운영하며 더 많은 유기견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개들과 겸상했던 그를,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로 밀어 올려준 것입니다.

이 법칙은 우리 주변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국민 MC라 불리는 유재석 씨는 1년에 수십억 원을 버는 최고의 스타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행기 1등석을 타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천만 배우 황정민 씨는 그 엄청난 수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세에 살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수입의 상당 부분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합니다. 왜 우리는 이들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려주고 싶어 할까요? 그들의 겸손이 우리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 시스템은 반대의 경우에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정글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고, 가장 큰 놈이 모든 것을 독차지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법칙, 즉 ‘사랑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혼자만 정글의 법칙처럼 강해지려 하고, 교만하게 군림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독재 체제가 되는 것을 막고, 모두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입니다. 그는 고환암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 권위의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서 7번이나 연속 우승한, 인간 승리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승리’라는 왕좌를 지키기 위해, 금지된 약물을 사용했고, 동료 선수들을 협박했으며, 자신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을 거짓말로 공격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나만 이기면 된다’는 정글의 법칙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의 교만과 거짓말은 세상에 드러났고, 세상의 반응은 냉혹했습니다. 그가 쌓아 올렸던 모든 우승 기록은 박탈되었고, 그를 후원하던 모든 기업들은 등을 돌렸으며, 그를 영웅으로 여겼던 팬들은 그를 사기꾼이라 비난했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던 그를,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내장된 ‘정의 시스템’의 무서운 힘입니다.

왜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랑’은 반드시 ‘정의’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맹목적인 집착이거나 위험한 동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 안에는 이 정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받았다. 그러니 주어야 한다.”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분들께 생명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받았으니 갚아야 한다’는 정의로운 마음이 바로 관계를 형성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이 정의 시스템 안에서 제대로 성장한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 즉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려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참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잔치에 가서 상석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 때는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조 원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내어주어라. 그러면 세상의 정의 시스템, 즉 하느님의 정의가 너를 기억하고, 마지막 날에 너를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성공 법칙입니다.

미국 미시시피 주에는 오세올라 매카티(Oseola McCarty)라는 흑인 세탁부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녀는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7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옷을 빨고 다림질하며 살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낡은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고, 은행에 차곡차곡 돈을 모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삶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95년, 그녀가 87세의 나이에 평생 모은 15만 달러, 우리 돈으로 수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지역 대학교에 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치는 흑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가장 가난해 보였던 그녀가, 가장 부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녀에게 대통령 시민 메달을 수여했고, 유엔은 그녀를 시상식에 초대했으며, 하버드 대학교는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했지만, 세상의 정의 시스템은 그녀를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로 밀어 올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높여 주는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유명한 야구 천재 오타니 선수가 아직도 몸을 굽혀 땅의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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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애완견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만 있으니 외로워 보였는데, 마침 친한 친구가 애완견 한 마리 더 키워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양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입양한 그 조그만 애완견이 먼저 있던 애완견에게 사납게 대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재롱을 부리면서 ‘예쁨’ 받지만, 먼저 온 애완견만 보면 사나운 개로 변신했습니다. 항상 싸우니 같이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따로 방을 만들어 주고, 서로 만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야 집이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애완견을 준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싸우게 놔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말을 듣고 다시 이 두 마리를 같이 있게 하자, 역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나중에 온 강아지가 지면서 서열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뒤로 전혀 대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들 때가 많지 않나요? 왜 이런 시련과 아픔을 주시느냐고, 왜 정의롭지 못하시냐고, 정말로 사랑 그 자체인 분이 맞냐고 대듭니다. 이렇게 대드는 이유는 앞서 애완견들이 서열 다툼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자기 밑 서열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아는 사람은 절대 대들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까불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시고, 또 명령하신 겸손의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당시 식사 자리는 사회적 명예와 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자리인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곤 했지요. 이 모습을 보시고 “윗자리에 앉지 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면서 겸손한 이를 오히려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유다 사회에서는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을 초대해서 서로 보답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세속적인 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부정한 이들’로 취급되는 사람으로, 보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으로 보답할 수 없는 사람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 진정한 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편견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을 때도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정관념은 보는 대상과 생각하는 방식,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제니퍼 에버하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 마음이 조금 더 낮아지면 조금 더 깊어집니다. 낮아짐은 의존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낮아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겸손과 공감을 낳습니다. 낮아짐 속에서 참된 고귀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위대함은 소유와 과시가 아니라, 비움과 겸손 속에서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인간의 교만이 무너지고, 겸손한 마음이 오히려 높아집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쁨입니다. 낮아짐은 결핍이 아니라 더 큰 충만을 향한 여정입니다. 낮아짐은 섬김으로 구체화됩니다.

겸손의 길은 자기를 버리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실 공간을 여는 길입니다. 비움 속에서 자유를 찾고, 섬김 속에서 존엄을 배웁니다. 인간은 높아지려 할 때 교만에 빠지고, 낮아질 때 은총을 경험합니다. 인간적 기준으로 배제된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의 식탁에서 가장 큰 자리됩니다.

낮아짐은 자기 중심적 집착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길입니다. 겸손과 낮아짐의 은총이 우리의 하루를 비추는 가장 좋은 사랑의 길입니다. 낮아지는 사랑의 길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십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낮아지는 충만한 삶입니다.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갑시다.

 

 

 

집회서 3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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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씀,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말씀이 평화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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