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으리라. 아들들이 그를 기리고, 남편도 그를 칭송하리라.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시는 하느님,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을 위하여 애태우며 눈물 흘린 복된 모니카를 자비로이 굽어보셨으니 이 어머니와 아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죄를 뉘우쳐 용서의 은총을 받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모니카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테살 2,9-13)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23,27-32)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1테살 2,9-13
오늘 제1독서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12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태 23,27-32
오늘 복음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7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 성녀 모니카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8
✚ 강론시작 08:07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위선자인 이유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위선자인 이유를 두 가지 듭니다.
첫째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마태 23,27).
둘째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입니]다”(23,29-30).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비판에서 ‘무덤’과 ‘묘’를 활용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우연히 또는 억울하게, 일회적이거나 단편적으로 ‘위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조상과 가지는 연속성을 짚어 볼 때 그들의 위선이 조목조목 밝혀지고 증명된다는 논리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예수님 시대에는 무덤으로 동굴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무덤들 위에 회칠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순례에 참석하는 이들이 잘못하여 무덤에 몸이 닿아 부정을 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당시 유다인들은 조상들의 잘못으로 처형된 위인들, 이를테면 예언자들의 무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단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점을 짚으시며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23,32)라는 말씀으로 당신께서 겪으실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현재 저마다의 삶에서 받아들여야 할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바오로 사도와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관계는 아주 모범적입니다. 코린토 신자들과의 관계와 비교할 때 더 그러합니다. 우선 바오로와 동료들은 복음을 선포하면서 신자들에게 아무런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에게도 모범이 되어서 초기 프란치스칸들은 바오로와 동료들처럼 일하면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저도 여러 차례 시늉으로 그런 적이 있었지요. 바오로 사도는 또한 신자들에게 자부다운 사목 면에서 모범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난 며칠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겐 무거운 짐을 지워주면서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았고, 윗자리와 존경받는 것만 좋아하면서 군림하는 지도자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복음을 선포할 때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격려했지만 신자들 가운데서 그저 생활할 때는 어머니처럼 지냈다고 어제 서간은 얘기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다운 처신과 아버지다운 가르침 덕분에 갈라티아 신자들은 신앙적으로 훌륭한 태도를 보였다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칭찬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스승에 훌륭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신자들은 어땠습니까? 코린토 서간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여러 가지로 그들을 매우 나무라지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코린토 신자들이 가르침을 잘못 받은 것이지요. 더 정확히 얘기하면 가르침을 받지 않거나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의 수도 생활 대부분은 형제들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얘기해도 알아듣는 형제가 있고 못 알아듣는 형제가 있으며 똑같이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는 형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형제가 있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가 있지요. 받는 것을 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안 받거나 잘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을 줘도 받지 않고 미움으로 바꿔 받습니다. 상처는 잘 받고 가르침은 안 받습니다.
아무튼 갈라티아 신자들은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고나 할까, 바오로 사도의 말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의 모범에서 도전과 자극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오늘 <복음>도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그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선으로 꾸며진 위선” 입니다. 마치 자신이 “선”인양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선’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은 악취가 더 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혹은 미사나 전례나 성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단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올가미에 씌우기도 합니다(예레 18,18). 실제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러했습니다(마태 22,18). 또한, ‘위선’은 자신을 완고하게 하고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로 삼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루카 18,9;20,20), 그래서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 가르치는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지만 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 해도, 진리는 가리고 있는 허울을 어김없이 벗기고 말 뿐입니다. 어둠이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할지라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우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더러운 속을 감추고,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3,31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이라는 여행 전날의 설레는 오늘의 삶
오늘 복음은 뭣이 중한지를 모르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라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지금은 잘나 보이지만, 언젠가 그 속이 드러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섬겨 눈이 먼 이들은 뭣이 중한지 모르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분을 죽이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세속과 육신, 마귀는 눈을 멀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을 모기로 만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피를 빼앗는 살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죽인 자를 나중에 심판관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에 나오는 용병이자 노예상인 ‘로드리고 멘도사’가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는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사냥하여 노예로 팔아넘겼고, 심지어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친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히 ‘빼앗고 소유하는’ 생존의 법칙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글에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닦아주며, 그들과 함께 먹고 자는 ‘사랑의 법칙’으로 살았습니다. 멘도사의 눈에, 이 선교사들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음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을 경멸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위협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가리옷 유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이라는 세속의 욕망 때문에,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삼구에 빠진 영혼은 결국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박해하며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자신들 죽음 뒤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심판이 있음을 직감합니다. 어떤 것도 저절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게 만든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만들었을까요? 반드시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려는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담기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들어진 것은 결국 그 주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바로 깨버리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자기 명예도 있지만, 불완전한 것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법칙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날 용기를 얻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심판관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1990년 10월,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복녀 키아라 루체 바다노(Chiara Luce Badano, 1971-1990)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평범하고 활기찬 소녀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하고 노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 되던 해, 골육종이라는 끔찍한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두 다리가 마비되었고,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절망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하느님?”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를 통해, 이 고통이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의 병실은 더 이상 절망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찾아오는 친구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고통을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봉헌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결혼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입을 하얀 웨딩드레스를 골라달라고 부탁했고, 장례미사 때 부를 노래를 직접 정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엄마, 안녕.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하니까요.” 그녀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을, 사랑하는 신랑을 만나러 가는 신부의 설렘으로 준비했던 것입니다.
여행은 가서 보다 가기 전에 더 행복하고 설렙니다. 죽음이 행복한 것이 되지 못하면 절대로 오늘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학을 가기 싫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이탈리아어로 읽을 수 있고, 성체 성혈 기적이 일어난 란치아노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유학은 부담스럽지만, 그런 기대감이 있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앞에서 칭찬받을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는데 오늘을 기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칭찬받을 일이 있다면 죽음이 기다려집니다. 이것이 매일 행복하게 사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삶. 바오로 사도도 이것을 기대하며 평생 행복하게 산 사람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2티모 4,7-8)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예전부터 꼭 다녀보고 싶은 학원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학원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학원은 힘 빼는 학원입니다. 왜 이렇게 힘 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예방주사 맞을 때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힘 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나름 힘을 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힘 빼~”라고 하십니다. 운동 배울 때도 코치는 꼭 힘 빼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전 베트남에 가서 마사지를 받았는데, 마사지사가 제 등을 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힘 빼~”
힘 빼고 있는데도 또 무슨 힘을 빼라는 것인지. 그런데 그 깨달음을 미용실에 갔다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발을 마치고 머리를 감을 때, 미용사 편해지라고 머리를 살짝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겁니다. 그냥 기대고 계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기댔습니다. 머리를 이쪽으로 움직이면 그냥 미용사의 손에 기대서 그 움직임에 맡겼습니다. 힘 빼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믿고 맡기니 진짜 힘을 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늘 믿지 못하고 또 맡기지 못하니 힘을 꽉 주고 있으면서 힘든 시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힘을 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편안한 삶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비로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불일치시키는 위선을 불행의 이유로 이야기하십니다. 당시의 이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킬뿐이고, 이로써 그들 삶을 경직하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힘 빼는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꾸짖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마태 23,27)이라고 하시지요. 무덤은 부정함의 상징이었기에, 실수로 밟아서 부정해지지 않도록 회칠을 한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그 안은 썩은 시신으로 가득한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겉치레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예언자들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지금 주님을 믿지 않고 온전히 맡기지 못함을 이야기하십니다. 겉모습보다 마음을 꾸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빼야 온전히 자기를 내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위선과 완고함을 가지고 온 힘을 꽉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인생은 언제나 스스로 부딪혀 경험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을 안겨준다(J. 허슬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사랑은 인내하는 기다림이고, 기도는 희망을 여는 샘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삶 전체는 기도 안에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족의 회심과 구원을 위해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기도는 집착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며 묵묵히 기다리는 기도였고, 마침내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인내는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사랑은 혈육에 매달리는 집착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려 가도록 돕는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가족의 행복을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치안에서 찾았던 사랑이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그 은총은 우리의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방황하는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모니카처럼, 교회는 죄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끝까지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성녀 모니카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내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깊은 지혜이며 구원으로 가는 길임을 가르쳐 줍니다. 기다림 속의 사랑이 마침내 구원을 이끕니다.
오늘 우리는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조급함을 내려 놓고, 모니카처럼 사랑으로 기다릴 줄 아는 희망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성녀 모니카와 함께 희망을 배우는 기도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시편 139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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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씀,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말씀이 평화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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