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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23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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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23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룻기 2,1-3.8-11; 4,13-17)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 오늘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룻기 2,1-3.8-11; 4,13-17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3,1-12
오늘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3일
유경선 첼레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1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지름길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유다교 회당에서 갈등을 빚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 복음사가가 그들과의 논쟁에 유용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편집한 점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23장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묘사(1-12절 참조), 그들에 대한 탄식(13-31절 참조), 두 가지 질책(32-33절 참조),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 닥칠 심판 예고(34-36절 참조), 예루살렘을 향한 꾸짖음으로(37-39절 참조) 구성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의 행태를 살펴봅시다.

첫째,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는 모세의 정통성을 상속받았다고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데 이 ‘짐’은 율법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 규정의 수호자이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예외를 허용합니다.

셋째, ‘성구 갑’은 율법의 핵심을 적은 양피지를 담은 상자이며,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 것은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넷째, 그들은 잔칫집에서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잔칫집의 윗자리는 좋은 음식을 먼저 받는 것을, 회당의 높은 자리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다섯째,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함은 공적 공간에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좋아함을 뜻합니다.

여섯째, 스승이나 선생이라는 호칭은 마태오 복음서에서만큼은 예수님께 적용됩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직무 자체를 못 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권위를 자신들의 것인 양 행사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보인 모습은 ‘열등감의 연대’로 풀이됩니다. 자신의 내면은 볼품없으면서 자기보다 수려하고 뛰어난 이들은 깎아내리거나 뽑아 버리려는 태도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지름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에서 작고, 모두에게 형제들인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라면 아버지나 스승이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도 당신 제자라면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려고 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길 좋아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저를 아버지나 스승으로 대우해 주시고, 특히 젊은이들은 아버지라고 부르곤 하는데 인간적으로는 듣기 싫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불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는 인간적 성숙과 지혜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 차원입니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다가 불리지 않을 때 불행해질까 봐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실은 불리어도 불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불리지 않아도 행복해야 하고, 행복하면 불리기를 굳이 바라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닌 신앙의 이유이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이 말씀은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불리지도 말라는 말씀인데 그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유일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승도 같은 이유인데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겸손도 해야 하고 자부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겸손은 감히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늘 하느님 앞에 있는 자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늘 사람 앞에 있는 세속적인 사람과 달리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늘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의 겸손입니다. 이 겸손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겸손 때문이라면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아무나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자부심입니다. 교만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자녀이고 형제라는 영적 자부심입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그에게서 상속권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 말씀대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얼마 안 가 그가 자기 재산을 거덜 내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세속 법정에서 재판받으려고 했는데 프란치스코는 교회 법정에서 굳이 재판받겠다고 고집하고는 주교 앞에서 속옷까지 돌려주며 이제부터 하느님만이 자기 아버지라고 선언했지요.

그리고 훗날 세상의 작은 자들이고 모두의 형제들이라는 뜻에서 작은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세우고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느님 자녀라는 자부심, 이것이 지금 내게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23,3-4)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23,5)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잔치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23,6-7)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흔히, 오늘날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에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3,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어느 대기업 회장님이 아들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세 명의 며느리 후보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1억씩을 주고는 마음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번째 며느리 후보는 그 돈으로 명품을 샀습니다. 자기를 아름답게 치장해야 며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며느리 후보는 은행에 모두 저금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생각에, 가장 안전한 은행에 보관한 것입니다. 마지막 며느리 후보는 그 돈으로 요리와 예절 등을 배우면서 좋은 신붓감이 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회장님은 누가 아들의 아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마지막 여인이 회장님의 며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세상 안에서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꾸미는 등 외적인 모습만 가꾸면 될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저절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할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주어집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그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마태 23,3)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실행하고 지켜라.”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이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말씀과 삶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사람만이 적합한 곳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이려는 위선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도 있었는데, 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루이스 E 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낮추며 영글어가는 곡식입니다. 낮아짐이 곧 높아짐입니다.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 높임은 무너짐을 낳고, 자기 낮춤은 참된 존엄과 높임을 가져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높아지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 욕망이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결국 자기 중심성에 매여 있는 교만입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은 하느님처럼 되려는 시도이며, 이것은 불안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낮은 자리에 설 줄 아는 지도자만이, 진정 공동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낮아짐은 소멸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깊이의 아름다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낮아짐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낮아짐은 사라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높여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낮아지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또 다시 낮아지십니다. 오늘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은 낮아지는 진실한 실천입니다. 그 실천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충만한 날 되십시오. 낮아짐이 충만한 길임을 믿습니다.

 

 

 

마태오복음 23장 1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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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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