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손수 그를 대사제로 뽑으시고, 당신의 곳간을 여시어 온갖 복을 베푸셨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판관 11,29-39ㄱ)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판관 11,29-39ㄱ
오늘 제1독서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그 무렵
29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길앗 미츠파로 건너갔다가, 길앗 미츠파를 떠나 암몬 자손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30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31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32 그러고 나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건너가 그들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33 그는 아로에르에서 민닛 어귀까지 그들의 성읍 스무 개를, 그리고 아벨 크라밈까지 쳐부수었다. 암몬 자손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큰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굴복하였다.
34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35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36 그러자 딸이 입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들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37 그러고 나서 딸은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십시오. 동무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이 몸을 두고 곡을 하렵니다.”
38 입타는 “가거라.” 하면서 딸을 두 달 동안 떠나보냈다. 딸은 동무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자신을 두고 곡을 하였다.
39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마태 22,1-14
오늘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1일
신현학 에라스토 신부
✚ 성 비오 10세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2
✚ 강론시작 10:14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같이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앞부분에서(마태 22,1-10 참조)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임금은 고을을 불사른 다음 고을 어귀로 종들을 보내어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옵니다.
뒷부분은(22,11-13 참조) 사뭇 당혹스럽습니다. 임금의 말에 따라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데려왔지만, 그들 가운데 예복을 갖추지 않은 이가 있었기에 임금은 그를 끌고 가서 어둠 속에 던지게 합니다(22,13 참조).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에 이어지는 14절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고 결론 내립니다.
비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교 전통은 하느님을 보통 ‘임금’으로 표현하였지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마태오 공동체에게 이 비유는 이해할 만하였습니다.
둘째,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고을을 파괴하는 장면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습니다.
셋째, 임금은 종들을 보내 길거리에 있던 이들을 모두 초대합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까지 하느님 나라에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까지 당신 나라의 기쁨으로 초대하심을 암시합니다.
넷째, 먼저 구원의 길로 초대되었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아 구원의 잔치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간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여정을 먼저 시작하였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초대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합당한 예복을 갖추지 않는 듯한 모습을 우리 안에서도 발견하지 않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바쳐야 할 제물은?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입다는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정확하게 한 주일 후 저는 온라인 신학원에서 <미사의 신비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강의에서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입다 얘기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전쟁에 나가면서 서원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처음 환영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런데 처음 환영나온 사람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
제가 미사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의 예배와 우리 미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개신교의 예물과 우리 제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배와 달리 우린 왜 제사인 미사를 봉헌해야 하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희생제물을 꼭 원하시는가? 이 질문은 오늘 입다가 왜 굳이 서원하고, 희생제물을 봉헌하려고 했는지에 관한 질문과 일치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희생제물을 봉헌하지 않으면 구원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은 번제물도 희생제물도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희생제물을 원하고, 희생제물을 바쳐야 원하는 것을 들어줍니까? 우리 부모만 해도 그러지 않고 오히려 반대지요. 자녀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부모님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뇌물을 바쳐야만 원하는 것을 주는 권력자로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으로 바치는 것을 부모는 기뻐하지 않고 극대노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하고 올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부모의 사랑에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부모님께서 가장 좋아하실 만한 것을 사랑과 정성을 담아 드릴 것입니다. 입다가 번제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고 하느님께서 희생제물을 원하시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사실 봉헌으로 치면 하느님의 봉헌이 우리의 봉헌보다 먼저이고 더 큰 사랑과 더 큰 희생의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제물인 성체를 모시기 전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하며 노래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입다가 희생제물을 바친 것은 하느님의 요구 때문이 아닙니다. 입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곧 정성 어린 희생제물입니다. 이런 입다에 비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이 너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매일 받아먹으면서 감사하는 마음과 나를 봉헌하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거나 있더라도 제물이 아니라 예물로 때우려고 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거룩한 덕행의 ‘예복’을 입어야 해
어제 복음인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자만과 보상에 대한 기대에 차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16)라는 말씀이라면, 오늘 복음인 ‘혼인잔치의 비유’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 역시 하늘나라에 대한 것으로,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마태 22,1)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말합니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이는 복음이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선한이나 악한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 누구든지 응하기만 하면 잔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적인 기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 부당성이나 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초청을 받고도 응답하지 않은 불응답과 거부와 배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으면 쫓겨나게 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은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의 표시였으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감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응답과 함께 응답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이미 응답한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예복’을 갖추어야 할 일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거룩한 덕행의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또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그리스도의 갑옷을 ‘예복’으로 차려입어야 할 일입니다. 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구원의 ‘예복’, 삶으로 실현된 복음의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는 먼 훗날의 나라가 아니며, 그 ‘초대’ 역시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곧 지금 당장 응답하고 실천해야 하는 촉박하고 긴급한 요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 우리의 일상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 현장, 여기 이 공동체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2,12
그대는 혼인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주님!
잔치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찬미와 감사의 거룩한
예복을 갖추게 하소서.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당신의 갑옷을 차려 입게 하소서.
당신 진리의 옷을 입고,
빛을 살게 하소서.
기쁨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혼인 예복 : 빚진 자의 마음
찬미 예수님
며칠 전에 어떤 다른 교파의 신자 한 분이 면담을 청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다니던 두 곳의 교회에서 모두 쫓겨났고, 이제는 가톨릭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고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런 마음 상태로는 저희 성당에 나오셔도 누구와도 섞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특별한 계시를 받는다고 믿었고, 자신이 보는 환시나 꿈을 완전한 사실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어둠’으로, 오직 자신만을 ‘빛’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 어둠을 쳐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었으니, 교회 처지에서는 자신들을 사탄 취급하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벗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못 하였다.” 그렇습니다. 그가 쫓겨난 이유는 단 하나, 합당한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옷은 값비싼 비단옷이 아니라, 그 잔치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과 기쁘게 어울릴 수 있는 준비, 바로 ‘겸손’이라는 마음의 예복입니다. 혼자만 빛이고 다른 사람은 어둠이라는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겸손이라는 예복은 어떻게 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길거리로 종들을 보내 “악한 이들이나 선한 이들이나 만나는 대로” 모두 잔치에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길거리에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이, 오직 주인의 자비로 이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게 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에 빠집니다. ‘주인이 손님이 없어 곤란했는데, 우리가 와서 자리를 채워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주인이 우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준비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낡고 더러운 옷이 가장 멋진 옷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페르시아의 옛 우화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눈 속에서 얼어 죽어가는 뱀을 발견하고, 불쌍한 마음에 자신의 품에 넣어 온기로 살려줍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린 뱀은 온기를 되찾자마자 자신을 살려준 나그네를 물어버립니다. 죽어가던 나그네가 “왜 나를 물었느냐?”고 묻자, 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감사하지 않는 영혼은 뱀과 같습니다. 그 영혼은 끊임없이 불만을 자아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그랬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음에도, 그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불평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인 의사 히사마츠 긴이치는 ‘신의 발’이라 불리며 40년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자신은 낡은 진료소에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왜 이토록 힘든 일을 평생 계속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저를 살려준 것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눠준 피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생명의 빚’을 평생 갚으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입어야 할 혼인 예복,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신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해드리는 시혜가 아닙니다. 길거리의 먼지 같은 우리를 불러주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갚을 길 없는 은혜의 빚을, 기쁨으로 갚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이 마음으로 봉사할 때, 우리의 봉사는 결코 지치지 않는 기쁨의 축제가 됩니다.
아르스의 본당 신부였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이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학습 능력이 부진하여 사제품을 받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제로 불러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 16시간 이상을 고해소에 앉아 수많은 영혼들을 돌보았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그의 성덕을 보러 몰려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르스로 오려고 하지만, 아르스에는 죄인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봉사를, 자격 없는 죄인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어제 90세로 돌아가신 루치아 자매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며느리가 세례를 받고 아들이 그 며느리와 혼배미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정상 며느리가 세례를 받지 않으면 둘은 교회법상 혼배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교리를 이후에 받는 조건으로 며느리에게 세례를 주고 혼배까지 시켜드렸습니다.
고인은 의사가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성당에 나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기뻐하셨습니다. 정말 돌아가시기 직전의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동안 온갖 봉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아직도 하느님께 가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장례미사 당일에 후손 1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고인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 열심히 살아도 그분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뭔가 내가 그분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져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끝까지 혼인 예복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숨이 멎는 그 날까지 일해도 합당하지 않다는 마음으로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이 작은 감사의 연습이, 우리를 교만한 손님이 아닌 겸손한 자녀로 만들어주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8)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예전에는 귤을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비닐하우스 덕택에 사시사철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귤은 품질이 좋습니다. 단맛도 좋고, 모양이 균일해서 상품성이 좋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조금 싱겁습니다. 노지 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야외 밭에서 햇빛, 비,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자란 귤입니다. 당도도 좋지만, 비닐하우스 귤과는 달리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좋은 자연스러운 맛과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충해나 태풍 등 자연재해에 취약해서 못생긴 귤이 많습니다. 그만큼 상품성은 떨어집니다.
이 노지 귤이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삶에서의 고통과 시련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갖게 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하여 갑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맛을 내게 됩니다.
화려하고 멋진 삶을 원하는 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겉보기에 좋은 사람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또 실제로 이런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겉으로 보이는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 길이 가장 필요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하지만 성숙하지 않고 자기 고유함이 없다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싱거운 귤처럼 의미 없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은 결코 화려하고 멋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라해 보이고 또 어렵고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초대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이야기해 줍니다. 첫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는 등 관심이 없습니다. 또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는 적대적인 마음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보다 세상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사랑보다는 적대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이제 아무나 잔치에 초대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라고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잔치에 왔는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쫓겨나고 말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외적인 모습을 보신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복은 단순한 옷이 아닌 내적인 준비, 회개와 믿음을 의미합니다. 즉, 부르심을 받았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는 예수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겉보기에 좋은 세상일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성숙하게 해줄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큰 기쁨의 잔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공정함이란 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많은 이들이 부르심을 받지만, 그 부르심에 끝까지 응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잔치의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합당한 옷을 입고 들어서는 이는 적습니다.
부르심은 은총이고 선택은 응답입니다. 누구나 길 위에 서 있지만, 끝까지 걸어가는 이는 드뭅니다.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실현은 오직 응답한 이의 몫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오늘도 작은 '예'를 드리며 걷고자 합니다.
선택된 이는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날마다 자신을 내어 사랑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선택이 완성됩니다.
부르심은 외적 조건이지만, 선택은 내적인 결단에서 비롯됩니다. 선택은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정체성을 이루는 길,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입니다.
가능성과 실현, 자유와 책임, 부르심과 응답의 긴장 속에서 진정한 선택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택은 자기 존재를 걸고 응답할 때 빛을 발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 주어진 작은 부르심 속에서,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는 선택된 소박한 하루 되십시오. 응답 없는 은총은 흩어지는 구슬과 같습니다.
마태오복음 22장 14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8/2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2 |
---|---|
25/08/2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0 |
25/08/1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8.19 |
25/08/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8 |
25/08/1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7 |
25/08/1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6 |
25/08/15 (금) 성모승천일 미사와 말씀 묵상 (0) | 2025.08.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