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하느님, 성자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 어머니요 모후로 모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보호를 받아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룻기 1,1.3-6.14ㄴ-16.22)
나오미는 모압 출신 룻과 함께 돌아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 오늘 복음
(마태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룻기 1,1.3-6.14ㄴ-16.22
오늘 제1독서
나오미는 모압 출신 룻과 함께 돌아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서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4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두 사람도 죽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게 되었다.
6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4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입 맞추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15 나오미가 말하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말하였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마태 22,34-40
오늘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2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6
✚ 강론시작 08:54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반드시 거창하고 훌륭한 것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고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22,37-40).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머릿속 계산기를 돌려 이익과 손해를 따져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둘째, 믿음은 실천으로 커 갑니다. 내 삶을 바꾸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기도만 더 한다고 하여 하늘에서 굳센 믿음이 ‘툭’ 떨어질까요? 믿음과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 실천은 언제나 꼭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믿음과 실천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비록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성장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믿음이 부족하거나 신앙생활이 회의적으로 느껴진다면, 내 마음속 믿음과 실천이라는 성적표가 현재 몇 점 정도일까 고민해 봅시다. 반드시 거창하고 훌륭한 것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소박하게 실천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의지와 사랑의지
오늘 복음은 제일 중요한 율법의 계명이 무엇인지에 관한 얘기인데 얘기의 시작은 이 중요한 계명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있는지 바리사이들이 시험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는 것을 시험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시험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면 지식이 이것저것에 대해 많이 알거나 정확히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서 어떤 게 더 중요한지 아는 것인데,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묻는 것은 율법들 가운데서 어떤 계명이 제일 중요한지 묻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뭔지를 아는 것이고,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많고 많은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참사랑인지 아는 것이고, 알뿐 아니라 참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반드시 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혜가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리 알아도,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리 알아도, 실천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도 왜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지 그것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인 줄 알면서 왜 실천치 않습니까?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만 할 뿐 사랑 의지와 행복 의지가 약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가 작지 않습니다. 감성적인 사랑만 좋아하고 의지적인 사랑은 싫어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좀처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을 좋아하고 싫은 것을 좀처럼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고 싫은 감정에서 좀처럼 헤어나려 하지 않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불행 앞에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계속 행복하지 않고 불행할 것인가?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를 이제 가져볼 것인가? 그러나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를 가지더라도 욕심부리지 말 것입니다. 작은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로부터 겸손하게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한 계단밖에 오를 수 없는 행복 의지와 사랑 의지로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원수와 동거하겠다고 억지 부려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며, 조금 싫은 사람부터 조금씩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고 또한 지혜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고,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마디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는,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며,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 곧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2,39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
이웃을 남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내 몸을 사랑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왕후가 되거나, 원수가 되거나!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여왕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를 기념합니다. 혹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라고 칭하는 것을 못마땅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냥 훌륭한 인간이지, 천상에서 여왕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성모님처럼 당신의 모후가 되게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오늘 방법에서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가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 즉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가르침과 성모님의 ‘모후’ 기념일이 같은 날에 만나는 것은 우연일까요? 교회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왕, 진정한 여왕을 만드는 것은 혈통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두 가지 사랑’을 얼마나 온전히 살아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은 임금이시니, 그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칭호가 부여되는지 살펴봅시다. 세종의 아내, 소헌왕후입니다. 그녀의 삶은 시작부터 눈물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어머니와 친족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갓 즉위한 남편 세종을 향해 신하들은 소리쳤습니다. “전하! 역적의 딸을 어찌 국모로 삼으시려 하나이까! 당장 폐위하소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죽여 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했다 해도 누구도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임금 사랑’은 이 모든 비극과 고통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세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전하의 어깨에는 이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으니, 부디 저의 일로 옥체를 상심하지 마옵소서. 신첩은 전하의 아내이자, 이 나라의 국모이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피눈물을 삼키고, 남편이 한글 창제와 같은 위대한 업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궁궐의 안정을 완벽하게 책임졌습니다.
이 위대한 첫사랑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사랑으로 흘러넘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에 갇혀있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삶을 돌보았습니다. 궁궐의 여인들에게 직접 누에치기를 가르쳐 길쌈을 장려하고, 그 생산물을 백성들의 살림에 보탰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안위보다 동족을 위해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라고 외쳤던 에스테르 왕비와 같았고, 빵이 장미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했던 엘리사베타 성녀의 사랑과 닮아있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세계 역사에 남은 왕후들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드님을 세상 구원을 위해 바치시기까지 하셨는데, 하늘의 모후라고 불리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요?
우리는 누구나 하늘의 모후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면 어떨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것은 모후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세상에 살 자격까지 잃게 됩니다. 모후가 되지 않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살 자격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내린 궁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임금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마침내 아들을 낳아 국모의 자리에 오른 기쁨과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그녀가 바로 희빈 장씨입니다. 그녀의 첫 번째 사랑, 즉 ‘임금 사랑’은 불꽃처럼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나라의 안녕을 비추는 횃불이 아니라, 모든 정적을 불태우려는 질투의 화염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런 속삭임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 것이어야만 해. 이 권력, 이 아들, 이 나라의 미래가 모두 나의 것이 되어야 해!’ 이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의 발현이었습니다.
이 왜곡된 첫사랑은 끔찍한 두 번째 사랑의 실패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백성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끝없는 피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정적인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그녀의 질투는 극에 달합니다.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처소 깊숙한 곳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모습을 한 인형에 밤낮으로 화살을 쏘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말입니다.
구약의 이자벨 왕비가 아합 왕을 타락시켜 무고한 나봇의 피를 흘리게 하고 포도밭을 빼앗았던 것처럼, 희빈 장씨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공동체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사랑은 한 나라를 품는 사랑이 아니었기에, 차가운 사약 한 사발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늘의 왕후가 된다는 것은 교만이 아닐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했던 성녀 베르나데트는, 훗날 수녀원에 들어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며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한 수녀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성모님을 직접 뵌 사람으로서, 교만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요?”
그러자 베르나데트 성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제가 왜 교만해져야 하죠? 성모님께서는 저를 그저 ‘빗자루’처럼 사용하셨을 뿐이에요. 청소가 끝나면, 빗자루는 다시 문 뒤에 놓이는 법이랍니다.”
성모님도 당신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지 않고, 모든 것을 “전능하신 분께서 저에게 큰일을 하셨으니”(루카 1,49)라며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오히려 모후가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려면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소헌왕후가 왕후가 되기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요? 임금을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로 여기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새끼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물었습니다. 엄마 호랑이는 당황해하며 “아니, 왜?”라고 묻자, 새끼 호랑이는 “나, 개랑 달리기했는데 졌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호랑이는 “내가 너를 낳았는데, 너 호랑이 분명해.”라고 말하면서 안심시켰습니다.
다음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 나 개가 맞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니, 또 왜?”라고 묻자, “개랑 씨름했는데 졌어. 개보다 힘이 없는데 호랑이일 리가 없잖아.”라는 것입니다. 엄마 호랑이는 “너는 아직 어려서 그래. 어려도 호랑이는 호랑이지. 언젠가 동물의 왕이 될 거다.”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또 다음 날, 새끼 호랑이는 울면서 엄마 호랑이에게 “나, 개랑 싸웠는데 졌어. 여기 이렇게 상처도 났어. 나는 분명히 개가 맞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엄마 호랑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 이 개**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형편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며 삽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이런 우리의 모습을 좋아하실까요? 자신감 있게 살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특히 사랑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남들처럼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교 전통으로 알려진 613개의 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이 더 중요하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어떤 율법 교사도 명쾌하게 답하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율법 논쟁 안에 가둬서 공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를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신명기 6,5의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6)를 인용하고, 레위 19,18의 말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를 인용하면서 답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신앙의 수직적 차원인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둘째 계명은 수평적 차원인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꿈을 단단히 붙들어라. 꿈을 놓치면 인생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와 같다 (랭스턴 휴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높이 앉아 계신 모후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품어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께 대한 공경은 곧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그분의 모후됨은 세속적 권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영광이며, 그리스도와 일치된 모후의 자리입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의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봉사, 강압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모성적 사랑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돌보시는 분, 바로 마리아 모후이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영광의 여왕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고통에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살며, 고난과 희망을 동시에 품어 내신 분, 끝까지 신뢰 속에서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모후이시며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시고,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중재자의 삶을 사십니다.
우리의 길 위에서 언제나 먼저 기다리시며, 교회의 자녀들을 끝까지 품어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이십니다. 마리아의 삶은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참된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오늘,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희망을 바라보게 하시는 좋은 길잡이, 마리아 모후께 전구를 청합시다. 마리아 모후는 끝까지 사랑으로 자녀들을 품어 주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룻기 1장 1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8/2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1 |
---|---|
25/08/2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20 |
25/08/1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8.19 |
25/08/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8 |
25/08/1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7 |
25/08/1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6 |
25/08/15 (금) 성모승천일 미사와 말씀 묵상 (0) | 2025.08.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