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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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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18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판관 2,11-19)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오늘 복음
    (마태 19,16-2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판관 2,11-19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무렵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9,16-22
오늘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8일
신현학 에라스토 신부

 

✚ 미사시작 00:33

✚ 강론시작 07:5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판관기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이번 주간에 독서로 판관기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은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뉘고,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뉩니다. 전기 예언서에서 여호수아기 다음이 판관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열두 지파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그리는 판관기는 시기상 이집트 해방부터 가나안 땅 정착을 거쳐 왕정 출현까지를 다룹니다.

판관기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개별 판관들 시대의 전통과 그들에 관한 전설과 자료로만 구성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집니다. 곧 ‘죄-벌-회개-구원’의 논리 구조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같은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에 빠지고, 이는 하느님의 ‘징벌’을 불러옵니다. 어려움에 놓인 이스라엘의 ‘회개’는 판관으로 표현된 ‘구원자’의 파견을 부릅니다. 이는 왕정이 나타날 때까지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된 기본적 신학입니다.

그렇지만 판관기는 어떠한 역사적 연대도 직접적이거나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단순한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없지만, 판관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사료와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관기가 전하는 전통들은 기원전 1200년에서 1020년 사이에 있던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주인공들은 흠 없는 인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도덕한 모습이나 당시의 현실은 독자에게 충격과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판관들의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주님의 영을 받는 임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다양한 은사와 주님의 영을 충분히 받게 될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곧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구약의 메시아를 향한 기대는 마침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보다 완전해졌는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주님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두 복음은 오늘 주인공을 그저 어느 부자라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복음만 부자가 젊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완전한 자가 되려면 이렇게 하라고, 곧 포기-나눔-따름을 완전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제 젊은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복음의 젊은이와 비교해서 그리고 저의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완전해졌는가? 완전해지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을지라도 좀 나아지기는 했는가? 묵상했습니다.

첫째 포기 면에서 나는 완전해졌는가? 옛날과 비교하여 외형적으로는 제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유 욕심 차원에서 소유하지 않고, 필요하기에 소유하고 있는데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합리화 때문인지 전에 비해 저는 필요를 엄격히 제한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고 있으며 완전 면에서 오히려 퇴보했습니다.

둘째 나눔 면에서 나는 완전해졌는가? 앞서 포기 면에서 저는 전보다 퇴보했다고 했는데 제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된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곧 저는 내가 가지고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나눌 수 있는 제 것이 제게 어디 있습니까? 다 여러분이 주신 것이고 그것을 돌리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제게 주신 것이고 그것을 돌리고 나누는 것이지요.

이 면에서 저는 옛날보다 완전해졌는지 분명치 않지만 나아진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셋째 따름 면에서 완전해졌는가? 앞서 봤듯이 포기 실천과 나눔 실천 면에서 주님을 잘 따랐다고 할 수 없고, 나아졌다고도 할 수 없지만 더 문제는 인격적인 따름입니다.

이 얘기는 이런 뜻입니다. 제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닮고 주님께서 실천하신 것을 따라서 실천하는 것도 따름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절실한 것은 실천을 따라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을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 마침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따름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름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따라서 저세상에 가는 것이 이제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제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너무 제 얘기를 한 것 같아 죄송한데 그래도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루카복음>(10,25)에서는 율법학자가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생명을 얻는 길이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곧 ‘주님께 속한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은 ‘행위’를 하는 데 달려 있기보다 ‘존재’가 되는 데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러한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이 말씀은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이 가진 재산을 팔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그리고 “당신께로 오라”,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네 가지 행동의 실행으로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더 깊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곧 네 가지의 ‘행동의 전환’을 말씀하기보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이 문장의 핵심은 뒤 구절에 있습니다. 뒤 구절은 당신께로 와서 당신을 따르는 존재, 곧 ‘당신께 속한 사람’, ‘당신의 소유’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부자청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의 재물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고, 재물을 따랐던 것입니다. 곧 자신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 속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적 전환’을 요청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무슨 위대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소유’, ‘주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9,21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주님!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례의 목적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계명만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못 하겠다며 슬픈 얼굴로 돌아갑니다. 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잘 지킨다고 하면서 실천은 이토록 어려울까요?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잘 못 뛴다면 그건 평소에 연습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197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소년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납치범들은 소년의 할아버지에게 1,7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2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 석유왕 J. 폴 게티였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과연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돈을 낼 것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게티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내가 한 푼이라도 주면, 나머지 열네 명의 손주들도 똑같이 납치될 것이다.”라는 냉정한 이유였습니다. 몇 달 뒤, 소년의 잘린 귀가 신문사로 배달됩니다. “할아버지,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쓴 손자의 애절한 편지와 함께였습니다. 그런데도 게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편지를 찢습니다. 결국 아이 아버지에게 마지못해 세금 감면이 가능한 일부 금액만 ‘빌려주고’, 나중에 아들에게 이자까지 받아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냉혹해질 수 있을까요? 왜 그는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피붙이인 손자와 그 아버지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는 ‘포기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폴 게티에게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며 아들에게 자선과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게티는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업수완만을 물려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더 큰 부를 이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신 ‘근원’, 즉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그들이 믿었던 하느님께 감사하며 작은 것이라도 되돌려 드리는 ‘봉헌의 연습’을 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 봉헌의 연습이 우리가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게티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붕어빵 부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동현, 원강희 부부는 희귀병을 앓던 아들 민우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10년이 넘게 매일같이 붕어빵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아들을 위해 모았던 3천만 원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아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된 순간, 그들의 봉헌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향해 매일같이 바치던 그 사랑의 ‘연습’은 부부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위해 모았던 돈 전액을, 아들의 이름으로 다른 희귀병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아들 한 사람에게 향했던 사랑의 봉헌은, 방향을 바꾸어 이 세상의 모든 아픈 아이들을 향한 더 큰 사랑의 강물이 되었습니다. 하루 만 원씩 매년 365만 원을 15년 이상 기부한 붕어빵 아저씨도 있습니다.

예배는 이와 같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들의 아이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 돈을 모은 것은 그 아이에게 봉헌하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더 쉽게 자신들의 아이에게 해 주었을 것을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꾸준한데 바뀌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어쩌면 J. 폴 게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배가 없는데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봉헌의 연습’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 곧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는 바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총과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말씀은 우리 마음에 자연스러운 ‘감사’를 솟아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제가 받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께 기꺼이 돌려드립니다”라는 봉헌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이 연습이 이웃에게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내가 무언가를 청하는 것이 아닌 이웃 사랑을 위한 연습을 하는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 정도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넘으면 이제 쉽게 이웃 사랑으로 실천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곧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항상 선악과 다음에 성취됩니다. 예배, 곧 전례의 목적은 봉헌하는 연습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덩치 큰 사람들도 자기 덩치에 맞지 않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벌레입니다. 이 벌레보다 엄청나게 큰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레 한 마리 나타나면 황급히 도망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커다란 거미를 보여 주고는 “이 징그러운 거미가 당신에게 뛰어오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미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거미는 벼룩처럼 뛰어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뛰어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귀여운 거미는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고 했습니다. 
 
어떤 이름표를 다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름표를 붙이곤 합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어, 돈이 최고야, 일등을 해야 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해.’ 등의 이름표로 삶 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표를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이런 이름표가 잘못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를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곧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지키는 신앙인이었지만, 더 완전한 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으로는 완전한 평화와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관심사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름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슬퍼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표에는 ‘재물’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던 것이지요. 
 
이름표에 주님의 뜻이 가득 담긴 사랑이 적혀 있어야 했습니다. 사랑이 적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름표에 적혀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 의지하고 있습니까? 재물인가요? 아니면 주님인가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 말씀을 기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살아 보니 인생에는 그런 게 중요하다. 버리는 것 말이다. 선입견을 버리는 것, 상식을 버리는 것, 과거를 버리는 것 (김성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함'은 흠 없는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갈라지지 않은 마음을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는 완전함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규칙 수행의 총합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추상적 질문이나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 선택 속에서 드러납니다.

집착과 자기중심적 삶을 비우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을 위해 붙잡힌 것들로부터 자유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모든 비움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이어집니다.

"팔아라"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가 핵심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눌 수 있을 때, 하늘의 보화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의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재산은 언제든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산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가짐'이 아니라 '나눔' 속에서 진정한 '따름'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비움으로써 충만해지고, 비움 속에서 완전함을 발견합니다. 내려놓음은 자유를 열고, 자유는 곧 주님을 따르는 길이 됩니다.

오늘, 가득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 참된 자유와 충만함을 누리는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온전함의 진정한 길입니다.

 

 

 

마태오복음 19장 1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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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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