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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2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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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복된 베르나르도를 지식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게 하셨네.

하느님, 복된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하느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불타는 열정으로 언제나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2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판관 9,6-15)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

  • 오늘 복음
    (마태 20,1-16)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판관 9,6-15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0,1-16
오늘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0일
전승환 세례자요한 신부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5

✚ 강론시작 08:5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혼인잔치에 걸맞은 준비를 하고 있나요?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포도밭 일꾼을 사려고 집을 나선 밭 주인의 이야기에 빗대고 있습니다(마태 20,1 참조). 그리고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라는 복음 마지막 절은 덧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19장 30절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는 포도밭 주인이 맨 나중에 온 일꾼들부터 맨 먼저 온 일꾼들까지 차례로 품삯을 주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일꾼이 같은 액수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해 봅니다. 나중에 신앙을 받아들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그들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긴장 관계가 이 비유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 같은 금액의 품삯, 곧 하늘 나라를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한편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20,13)에서 “친구여”로 옮겨진 그리스 말은 가까운 벗이나 상대방을 점잖게 부를 때 쓰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에는 이 호칭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처신을 잘못한 사람, 곧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과(22,12 참조), 스승을 배신할 유다를(26,50 참조) 부르시는 대목에 쓰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친구여”라는 부름은 묵상 거리를 줍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워 다른 이에게 시기와 질투를 드러내지는 않나요?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우리는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하고 있나요? 혹시 유다처럼 나의 명예나 이익만을 찾으며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지는 않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악한 자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의 품삯은 하느님 포도밭에 온 순서와 상관없습니다. 곧 세례를 받은 순서와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포도밭에 오기만 하면 똑같은 품삯을 주십니다.

많이 일하고 적게 일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신다는 주님의 비유를 우리에게 떠올리는데 주님의 두 비유는 사실 같은 맥락이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신다는 주님 말씀을 선한 사람이 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나올까요? 나와 똑같이 주시는 하느님은 진정 자비로우시다고 할까요?

오늘 비유의 먼저 온 사람들처럼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불평을 분명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선하다고 하는 너 인간아! 너는 진정 내 앞에서 선한 존재냐?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선하다고 할 수 있느냐?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오리까?”라는 시편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 인간처럼 죄악을 보시면 아무도 죄인 아닌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느님은 죄를 보지 않으시고 자비를 보이시는데 죄인인 인간은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한 죄인들처럼 죄를 봅니다. 자기 안의 죄로 죄를 보는 것이고, 자기 죄를 감추려고 남의 죄를 들추고 자기 죄를 합리화하려고 남의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포도밭에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일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 내가 하느님 앞에서 셈할 때 그때 나는 할 만큼 일했다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일을 잘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으니 세례를 나보다 늦게 받은 저 인간보다는 많이 했다고 주장하고, 많이 한 것을 가지고 잘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실상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일을 많이 하긴 하는데 하는 짓이 실은 다 자기 과시이고 분탕질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죄를 따지시면 그나 나나 똑같이 벌주실 텐데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똑같이 천국 행복을 품삯으로 주시면 왜 저 인간에게도 나와 똑같은 품삯 주시느냐고 따지고들 것입니다. 사실 선을 보지 못하는 인간이 악한 자이고, 특히 하느님의 선과 자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 악한 인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선한 포도밭 주인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대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속에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세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릅니다.

사실, 주인은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기보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어진 ‘은총’입니다.

<둘째>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와 자비입니다. 사실, 그들은 능력이 없는 까닭에,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셋째>는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이 주어집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 온 품꾼에 대한 부당한 대우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는 계약을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고,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사실, 주인은 품삯을 셈 해줌에 있어서,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었습니다. 이러한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유’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자,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3-14) 

사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이와 나중 온 이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첫째라고 뻐기거나, 혹은 꼴찌라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포도밭에 와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0,4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시니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당신은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시고 
똑같이 품삯을 주시니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이토록,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요,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오니 
진정,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이토록,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오니
오, 나의 주님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Soli Deo Gloria : 가장 위대한 장인의 비밀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감정을 마주합니다. 바로 ‘불만’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땀 흘려 일한 품꾼들은,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자 주인에게 거세게 항의합니다.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너무나 인간적이고,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항의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포도밭에서 매일 고되게 일합니다. 가정을 위해, 직장을 위해,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것뿐일까?’, ‘왜 나의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거룩한 ‘일’이,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불만’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늘 나라의 가장 마지막 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불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두 명의 ‘첫째’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위대한 영웅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불평하며 가장 비참한 마지막 자리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을 아십니까? 그는 전쟁 초기,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조지 워싱턴이 가장 신임하는, 모두가 인정하는 ‘첫째’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로에 비해 충분한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조국을 위한 ‘봉사’는 점차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불만은 더 큰 명예와 돈을 갖고 싶다는 ‘소유욕’과 ‘집착’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조국을 배신하고 중요 기밀을 영국군에게 팔아넘기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될 수도 있었지만, 감사 없는 그의 마음은 그를 가장 수치스러운 반역자, 즉 ‘꼴찌’의 자리로 추락시켰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섬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탕자였던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에 휩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종처럼 섬기며 단 한 번도 분부를 어긴 적이 없는데,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오랜 섬김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을 계산하는 ‘노동’이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내 몫’을 소유하려는 집착이 되었고, 결국 그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꼴찌’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늘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중세 프랑스의 전설, '노트르담의 광대' 이야기를 아십니까? 가난한 광대 바르나베는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학문도 예술도 아는 것이 없어 성모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쓸모없는 ‘꼴찌’ 수도사라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결심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가장 잘하는 곡예를 성모님께 바치기로. 그는 성모님 상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땀 흘리며 자신의 모든 재주를 선보였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이 신성모독이라며 그를 꾸짖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 상이 살아 움직여, 그의 땀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어 보인 것입니다. 그의 봉사는 너무나 짧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었지만, 받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순수한 감사의 마음은, 그 어떤 위대한 신학 강의보다도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첫째’의 예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병원의 구두닦이, 앨버트 렉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30년 넘게 미국 피츠버그 어린이 병원에서 구두를 닦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그저 평범한 구두닦이, ‘꼴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픈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평생 구두를 닦으며 받은 팁을 단 1센트도 쓰지 않고 모았습니다. 

그가 은퇴하던 날, 그가 병원에 기부한 총액이 공개되었습니다. 무려 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습니다. 그 돈은 모두 가난한 아이들의 치료비로 쓰였습니다. 그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이 가진 가장 작은 것을 나누었고,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한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첫째’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불평하는 첫 품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냐?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의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은 ‘일의 양’이나 ‘노력의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가, 아니면 ‘품꾼의 마음’에 머무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베네딕트 아널드와 큰아들은 ‘품꾼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그 대가를 계산하며, 주인의 후함(은총)을 시기하고 불평했습니다. 반면, 광대 바르나베와 구두닦이 앨버트는 ‘주인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일할 기회를 주신 것 자체에 감사했고, 자신의 품삯을 계산하기보다 주인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에게 봉사는 노동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시간은 고역이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을 만든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이야기로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억 원을 호가하며 최고의 소리를 냅니다. 그는 단연 악기 제작 분야의 ‘첫째’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싶어 했지만, 그는 침묵했습니다. 훗날 그의 바이올린 내부를 수리하던 장인들이 그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이 만든 모든 바이올린의 가장 깊숙한 곳, 아무도 볼 수 없는 안쪽에 라틴어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느님께 영광)’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는 대신, 자신에게 이런 재능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악기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봉사와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장 평범한 일 하나—설거지, 운전, 서류 작업—를 할 때, 불평 대신 스트라디바리의 마음을 품어봅시다. ‘주님, 이 일을 할 수 있는 재능과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당신께 바칩니다.’ 이 작은 감사의 실천이, 고된 노동의 시간을 기쁨의 축제로 바꾸고, 우리를 하늘 나라의 ‘첫째’ 자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콜로 3,1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15살 때,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오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 병원에서 좋은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무엇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이 아이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성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기까지 했던 이 아이는 특별히 하느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면서 변화되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은 제가 살면서 받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악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큰 병에 걸렸을까?’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병은 악이 아니라 그냥 시련이고 고통일 뿐입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높일 수도 있고, 그 영광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물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또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도 고통과 시련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열심히 생활했어도 하느님의 특별 대우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더 큰 은총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았는데 왜 은총을 주십니까?”라고 속으로 불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은총이 우리의 계산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포도밭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일꾼을 불러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합니다. 그 후 9시, 12시, 3시, 5시에도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들입니다. 문제는 품삯을 지급하는데,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5시부터 일한 사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받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며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기준에서는 은총은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일찍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똑같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위반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비교와 시기 때문에 약속을 위반한 것처럼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내가 노력한 만큼 더 받아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논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올리브 웬델 홈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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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20장 14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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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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