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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1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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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1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38,4-6.8-10)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 제 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오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레 38,4-6.8-10
오늘 제1독서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히브 12,1-4
오늘 제2독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2,49-53
오늘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7일
황병철 대건안드레아 신부

 

✚ 사제평생교육원 소개 00:35

✚ 미사시작 01:38

✚ 강론시작 17:2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끝까지 전력 질주하라.’입니다.

제1독서의 배경은 기원전 605년부터 587년으로 추정됩니다. 유다 임금 치드키야와 바빌론 임금이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유다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시고 새로운 구원 계획을 세우실 테니 지금의 정치적 정세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는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넘어온 이들 가운데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들에게 쓴 서간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12,2).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12,4).

이와 같은 권고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아직 전력 질주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사명을 전합니다. 성경에서는 ‘물’과 ‘불’이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쓰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하는 ‘불’의 이미지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세례와 성령 강림 때에 나타난 ‘불’을 연결합니다.

게다가 가정 분열이라는 주제도 가져오는데, 가까운 이들의 분열은 예언 전통에서 종말에 일어나는 환난의 특징입니다(미카 7,6; 하까 2,22; 말라 3,24 참조).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종말론적 심판과 더불어 가까운 이들과 멀어질 수 있다는 절박감도 가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여정은 선택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이제 전력 질주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끝까지 달리는 데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령의 불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평화를 주러 오신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정반대의 말씀 곧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인데 제 생각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열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분열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로서는 감히 하지 못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분열이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심지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분열 곧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말에 많은 분이 의문을 표할 것입니다.

원치 않고 두려워하는데 왜 우리 안에 분열이 그리 많냐고? 실로 우리는 일치를 원하고 그래서 일치하려는데도 일치가 되지 않아 분열을 하는 것이고, 일치를 원하는데도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일치가 내 맘에 드는 일치 곧 자기중심적인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같이 좋아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너도 같이 가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우리 공동체가 같이 원하는 그런 식의 일치와 불일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치와 분열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이고 그 기준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같이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에 우리가 일치해야 하는데, 누군가 하느님 뜻 따르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분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뜻과 다를 때는 잘도 분열하면서 하느님 뜻과 다를 때는 엘리야나 오늘 독서의 에벳 멜렉처럼 불같이 일어서지 못하고 과감히 분열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불의를 불살라버리는 정의의 불,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해 나를 불태우는 사랑의 불이 우리에게 타오르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기를, 그 불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타오르는데 공동체가 같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반대로 공동체는 타오르는데 내가 젖은 짚단처럼 타오르지 않습니까?

이럴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한다면 그 불이 성령의 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령의 불이 내게서 타오르길, 내게서 타올라 네게도 옮겨붙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대신들의 요청으로 죽음의 저수동굴에 던져져 박해받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제2독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히브 12,2)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는”(히브 12,1) 일이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2)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20,9;23,29)과 엘리야 예언자의 말(집회 48,1)을, 신약에서는 세상에 대한 종말심판(마태 3,11;7,19;마르 9,48;루카 3,16)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불”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불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결국 예언자는 더더욱 박해받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새 생명(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이요, “불”로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파괴하고 분쇄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표지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피가 불이 되게 하는 법: 내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며 당신 사명을 조금은 강렬한 말투로 선포하십니다. 이 ‘불’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님은 불을 지르기 위해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하시며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미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을 통해 어떤 불을 지르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선생님의 눈물’이라는 사연이 이 진실을 보여줍니다. 반에서 왕따 당하던 정태. 정태를 때려 징계를 받게 된 가해자 아이들은 이번에는 상처가 남지 않도록 정태의 머리를 화장실 변기에 처박고 물을 내리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또 징계위원회가 열렸지만, 담임 선생님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아이들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가해자 세 명 중 한 아이가 울며 선생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안아주며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지. 정태는 여기에 머리가 박혔는데… 선생님이라도 이 더러운 변기를 깨끗하게 닦아 놓아야 가엾은 정태가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해도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눈물을 흘렸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 아이는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피는 누군가의 가슴에 들어가 불이 되어 그 아이의 자아를 태웁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구리뱀을 매달아도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누군가의 피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새로 태어나게 만들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는 피의 순수성이고 또 하나는 자아를 태우려는 의지입니다. 피가 순수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자기 자아를 죽이기 위한 피 흘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 그 진실을 보여줍니다. 늙은 리어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세 부분으로 세 딸에게 내어주겠다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해 보라 합니다. 첫 두 딸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막내는 그렇지 못합니다. 리어왕은 분노하여 셋째 딸의 땅까지도 첫째와 둘째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을 받자 마음이 변합니다. 자신에게 온 늙은 아버지를 쫓아냅니다. 나중에 가난하게 사는 셋째만이 아버지를 받아줍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자녀들의 죽음으로 끝나고 맙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이 며느리를 괴롭혀 며느리가 죽었음에도 아들이 자신을 보려 하지 않자 “내가 평생 너만을 위해 살았는데,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니?”라고 한탄합니다. 과연 그 피 흘림이 순수했을까요? 리어왕은 자녀들을 미래를 위한 보험쯤으로 생각하였기에 그 재산을 내어주는 피 흘림이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자녀 자아를 죽이는 불이 되려면 그 피가 내 자아의 죽음이어야 합니다.

제 책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두 아이가 일찍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큰아버지 집에 맡겨집니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아이들을 짐으로 여기고 학대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도망 나와 멀리 부산에 있는 선생님에게 전화합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맡이 키우기로 합니다. 누나는 엄마의 말을 잘 따랐지만, 동생은 끝까지 선생님을 엄마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하자, 부모 생각이 났는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선생님에게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그렇게 많아요?”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행복했고 아이들은 훌륭하게 잘 자랐습니다.

그냥 부모라고 불러주는 것에 만족할 수 있는 피 흘림, 이것만이 삼구가 빠져나가 누군가의 가슴에서 그 자아를 태우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 사명에 참여하기 위해 그런 작은 불쏘시개가 되라고 파견받습니다. 상대가 자기 자아를 죽이기를 원한다면, 오직 나의 자아를 죽인 피만이 상대의 자아를 불사를 수 있습니다. 불쏘시개, 곧 엄마가 되는 것만으로 행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 싫어하는 색이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색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색일까요? 녹색입니다. 그렇다면 이 녹색을 모든 사람, 그러니까 100% 다 좋아할까요? 대부분 좋아한다는 녹색이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는 6% 그리고 여자는 7%가 이 녹색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90% 이상이 이 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여기서 학자들의 연구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녹색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전형적인 녹색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군복, 유리병 등에 쓰는 어둡고 탁한 녹색을 말했습니다. 반대로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전형적인 녹색을 물었습니다. 신록의 녹색, 에메랄드, 그리고 녹색 바다를 꼽았습니다. 맞습니다. 녹색을 싫어하는 사람과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녹색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하긴 녹색도 다르게 많이 표현합니다. 초록색, 연두색, 청록색, 풀빛색, 비취색, 그 밖에도 푸르스름한 색, 초록스름한 색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또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함께하는 사람은 무조건 하느님을 좋아하고 환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잘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거부하는 이유를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알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좋아할 수도 또 싫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어떤 면을 바라보고 있고, 또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도 또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예수님과 맞지 않는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불길을 붙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태워 성화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 살지 않으면서 성화되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자기 욕심과 이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세상 것만을 바라보려는 마음을 접어야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과 세속적인 기준의 충돌에서 이루어지는 분열인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끊어야 할 것은 과감하게 끊을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불길이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보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 분 안에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선택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 대가를 받는다 (레프 톨스토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거짓된 평화를 깨뜨려야만 비로소 참된 평화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열'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사랑을 향한 필연적 갈등을 뜻합니다.  

복음 앞에서 일어나는 분열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하느님의 손길이 됩니다. 믿음의 길은 거짓 평화에 안주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위해 때로는 갈등과 대립을 감수하는 용기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익숙한 질서와 부딪히면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는 세상의 거부와 갈등을 낳지만, 바로 그 길을 통해 부활과 참된 화해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갈등과 분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진통이며,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자유와 평화로 이끄는 하느님의 과정입니다.  

주님은 가짜 평화와 가짜 질서를 거부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며, 거짓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진리 안에서 더 깊은 평화와 넓은 자유로 걸어가야 합니다.  

분열과 평화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넘어 진리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과정입니다. 거짓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느님을 따르는 평화의 참된 주일 되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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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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