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났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으니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5일
성모승천일
미사와 말씀 묵상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 제 2독서
(1코린 15,20-27ㄱ)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9-56)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오늘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1코린 15,20-27ㄱ
오늘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루카 1,39-56
오늘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가톨릭 평화방송 생중계
명동성당 성모승천일 미사
2025년 8월 15일 낮 12시
명동성당 평화방송 생중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지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면
영상 촬영에서 ‘줌 인’은 카메라 렌즈의 초점 거리를 조정하여 촬영 대상에 가까워지듯 보이게 하고, ‘줌 아웃’은 멀어지듯 보이게 하는 기법입니다. 자기 삶과 그 안의 고통에 줌 인하는 요즘, 성경 말씀은 삶에 대하여 줌 아웃을 하도록 제안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로마 제국에서 신앙 때문에 고통받던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으로 표상되는 마리아를 통하여 ‘아드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완성하실 구원의 드라마’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고통이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고통받는 오늘을 떨어져서 보도록 안내합니다.
한편 오늘 제2독서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바오로가 부활 신앙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분 안에서 부활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부활이 삶의 전환점이 되도록, 바오로는 삶에 대한 줌 아웃을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때를 그립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약혼한 처녀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였을 경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신명 22,23-24 참조).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비천한 자신 안에 하느님께서 이루실 위업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하느님께서 완성하실 인류 구원을 미리 경험하시는 마리아께 기쁨이 넘치십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도 신앙인들이 지금 상황을 떨어져서 보도록 이끄십니다.
지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면, 저마다 삶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줌 아웃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승천의 길
누차 하는 얘기지만 성모님의 거의 모든 축일은 예수님 축일과 병행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축일도 주님의 승천 축일과 병행입니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직천당하셨다는 축일입니다.
돌아가셨지만 부패 없이 천당에 가셨다는 축일입니다. 그리고 직천당하신 것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께서 우리와 달리 직천당하셨고 그런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리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마리아와 우리 사이의 비교 불가의 차이만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마리아는 그런 영광을 받고 싶지 않으실 것이고 우리도 이런 축일을 지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리아는 죄를 짓지 않았기에 천당에 가고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간다면 지옥에 갈 우리가 이 축일을 기뻐하며 기릴 수 없을 것이고 설사 기린다 해도 마리아가 이런 우리의 기림을 기꺼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심이 우리를 데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시기 위함이듯 마리아의 승천하심도 우리를 데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함입니다. 육신의 우리 어미도 당신 자녀가 지옥에 가는데 당신만 천당에 가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에 같이 가버리든지, 지옥까지 가서라도 천당에 데려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마리아가 주님 교회의 완성에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마리아의 승천이 주님 교회의 완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며, 그래서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라고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주님의 교회란 하느님 백성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교회의 시작이라고 함은 주님을 낳으신 것은 물론 교회가 하느님 백성을 끊임없이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느님 백성을 주님 중심으로 모으는 데 있어서 마리아가 그 첫 번째이고 원형이고 모범이기에 마리아는 교회의 시작이면서 교회이기도 하고 모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감사송은 이 세상 나그넷길을 가는 우리에게 마리아가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는 분이라고 칭송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나그넷길을 가는 존재들이라는 말이고,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마리아는 우리 희망이요 위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은 쉽게 이해되는데 우리의 위안이라는 말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처럼 주님을 따라가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마리아가 준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지 않은데 희망을 가지고 가는 우리에게 왜 위안이 필요한지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위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위안이 될 수 없고 소용도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 위안이 필요하고 소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넷길을 감에 있어서 마리아의 위안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그 길이 위안이 필요한 길 곧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길은 주님의 길과 다르지 않고 아시다시피 늘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그러기에 그 끝은 주님의 길처럼 하느님 나라이고 영광스럽지만 시작서부터 가는 과정은 십자가의 길이요 수치스러운 죽음의 길입니다.
주님 승천이건 마리아의 승천이건 승천의 길은 가기 아주 힘든 길입니다. 혼자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같이 가야 하는데 그 길에 주님과 마리아가 앞서가시며 같이 가시고 우리도 서로 도반(道伴)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승천 축일을 지내는 우리, 마리아에게서 승천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희망과 위안을 받지 못한다면 우린 이 축일을 헛되이 지내는 것이고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마리아는 새 계약의 궤
오늘은 “성모승천” 교리를 ‘예형론’(typologia)을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굽을 이끄는 새로운 모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출애굽’이 이집트 땅에서 시작해서 약속의 땅에서 끝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출애굽’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에서 끝납니다. 곧 지상의 ‘약속된 땅’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출발지’일 따름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곧 ‘하느님 영광의 구름’과 ‘계약 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다인들은 잃어버린 ‘계약 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하느님 현존을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지상 거처로서 당신 백성들 가운데 머무실 장소로 ‘성막’을 짓고(탈출 25,8-9), 그 안에 ‘계약 궤’를 만들라고 합니다(탈출 25,8-22). 그리고 그 안에는 ‘두 개의 증언판’(탈출 31.18)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싹이 돋은 대사제 아론의 신비로운 ‘지팡이’가 모셔졌는데(탈출 16,34;민수 17,25), 그 위에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인 구름’이 내려와 머물렀습니다(탈출 40,21.34-38).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10장)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 제국에 파괴되기(기원전 587년) 전에 하느님 ‘영광의 구름’이 예루살렘에서 떠났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2마카베오>(2,8)에서는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시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하며,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렇게 해서, 성막 위에 내려온 ‘영광의 구름’과 ‘마리아에게 내려온 성령’이 연결됩니다. 곧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는 말과 “성령이 동정 마리아를 덮을 것이다(επισκιαξω).”(루카 1,35)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마리아를 ‘새 계약 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주님 현존이 머무는 곳인 ‘계약 궤’가 나타날 때처럼 환희에 차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루카복음사가는 마리아를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인 ‘새 계약 궤’로 묘사해 줍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태양을 입은 여인’에 대한 요한의 환시를 통해, ‘여인과 계약 궤’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1,19-12,2)
이렇게 ‘계약 궤’와 ‘여인’은 하늘의 성전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계약 궤’가 더 이상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바로 ‘성모승천’을 밝혀줍니다. 여기에서, ‘계약 궤’와 ‘여인’은 한 사람에 대한 이중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 계약 궤’로서의 마리아의 정체성의 신비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아주 깊은 신비를 밝혀줍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말씀의 거처이신 분, 오 새로운 계약의 궤여, 순금대신 순결을 입으신 분, 당신은 계약의 궤, 참된 만나를 담은 황금 그릇, 신성이 머무르는 육신이로다. ... 당신 안에 온전한 발, 머리, 완전한 하느님의 온몸을 지니고 계시니,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쉬시는 거처로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 마리아께서는 ...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교리서] 2676항)
그래서 교종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 마리아의의 육신이 천상으로 들어 올림 받으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썩지 않는 나무로 지어져 주님의 성전에 안치된 계약 궤를 동정녀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한 육신의 예형으로 여겼습니다. 마리아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었으며 천상의 지고한 영향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교종 비오 12세,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 26항)
이처럼, 마리아는 ‘새 계약의 궤’로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되시고, 육신의 부패로부터 보존되시고,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신 마리아는 육신의 부활과 승천이 예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하고 승천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
제가 진정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똑같이 노력하는데, 누구는 추락하고 누구는 승천할까?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큰 축일 중 하나인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이 ‘승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는 성모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동시에 나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마치 신화처럼 느껴지는 어떤 사건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승천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특별 이벤트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모님의 어떤 삶의 열매이자 결과입니다. 사실 위로 올라감은 내려옴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낚싯바늘을 물어야 고기는 사람의 식탁으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좀 비유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하느님은 우리에게 미끼를 던졌고 그것을 덥석 무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사실 예수님의 강생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강생의 완성이 승천입니다.
왜 성모님은 예수님을 덥석 물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하늘을 바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찾습니다. 성모님은 행복을 하늘에서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잉태하기를 원합니까?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몸으로보다 마음으로 먼저 잉태하셨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잉태하고 사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음으로 아무것도 잉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잉태는 낳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낳음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미래의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무언가를 잉태하고 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승천도 하고 추락도 합니다.
영화 ‘마약왕’의 주인공 이두삼은 처음 이렇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내가 와 이 짓을 하는데? 다 우리 식구들 배불리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 아이가!” 그런데 그는 가족을 잉태하였을까요, 아니면 마약을 잉태하였을까요? 그는 또 말합니다.
“애국이 별거 있나? 뽕 팔아서 일본 넘들 뿅 가게 만들고 달러 싹쓸이해오면, 그게 바로 애국이지!”
그가 만약 진정으로 가족을 잉태하고 살았다면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족이나 나라는 핑계였습니다. 그가 잉태한 것은 세.육.마였습니다. 돈과 여자와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황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저택에서, 아내도 동료도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총을 든 채 환각에 시달리다 총을 맞고 체포됩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잉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땅으로 나를 끌어내리는 세.육.마.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를 더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날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추락시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자유에 도취되어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교만하게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그 교만이 날개를 녹였고 그를 추락시켜 죽였습니다.
반대로, 어떤 잉태는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그것은 숭고한 사랑인데, 이것을 잉태하면 세.육.마.로부터 나를 들어 올려 하늘 나라의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1938년, 니컬러스 윈턴이라는 젊은 영국인은 나치의 위협 아래 놓인 유대인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거룩한 가치를 잉태했습니다. 그는 이미 그 높은 가치를 품었기에,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더 높은 수준의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669명의 아이들을 구해냈고, 50년간 그 사실을 잊은 듯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50년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한 방송국에서 그와 그가 구한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진행자의 한마디에, 수십 명의 중년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했다고 믿는 누군가를 위해 그 방송국까지 왔습니다. 그들도 승천했지만, 참 승천의 기쁨은 윈턴 경이 누렸습니다. 그 일로 세상이 그를 불러올려 영광을 준 것입니다. 이것이 승천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이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아기를 잉태한 엄마의 정신은 온통 아기에게 향합니다. 아기를 위해 몸에 안 좋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육.마.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아기 때문에 술을 끊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어디를 향해 승천해야겠습니까? 내 안에 그것을 잉태하면 내가 세상 것은 다 버리고 그분을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이것이 선포되고 주어지는 곳은 성당의 제단입니다. 우리가 승천하는 곳은 바로 성당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엔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를 위해 우리에게 자꾸 미끼를 던지시는 것입니다.
베네수엘라에 ‘엘 시스테마’라는 기적의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라는 분이 마약과 범죄로 가득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총 대신 바이올린을, 칼 대신 첼로를 쥐여 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소음과 폭력이 아닌, 하늘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잉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가난과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무대에 서는 희망의 삶으로 ‘승천’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잉태하겠느냐? 너를 추락시키는 세상의 소음을 잉태하겠느냐, 아니면 너를 승천시키는 하느님의 거룩한 침묵과 말씀을 잉태하겠느냐?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이미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세.육.마.에서 멀어져 이웃 사랑을 더 실천하게 만드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나를 승천시키는 것을 사랑합시다. 자신 안에 죄의 수렁에서 구해 줄 보물이 있었음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래되고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우심이여,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보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셨지만 저는 제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실망과 절망을 할 때도 많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제의 길은 늘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아서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에게 사제를 준비했던 그 길이 100% 행복했었냐고 묻는다면, 한 30% 아니 20% 정도만 행복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공부가 힘들었고, 기도가 힘들었고, 공동체 생활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에 100%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데 왜 신부가 되었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신부가 되면 그 힘든 것이 모두 없어질 것으로 믿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지금을 보면, 신학생 때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더 열심히 기도할 수밖에 없으며, 또 더 자유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삶 안에서 2~30% 이상의 행복이 있기에, 또 그 의미 있음에 신부로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만을 위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아픔과 시련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행복은 삶 안에서 100%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100%는 하느님 나라에서만 가능합니다. 단 1%의 행복만 있어도, 충분히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모범을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 승천 대축일’의 주인공이신 성모님에게서 보게 됩니다. 우선 ‘성모 승천 대축일’은 지상 생애를 마치신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림을 받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행복하신 분일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행복은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 성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태중에 모셨기 때문에 행복하신 것일까요?
성모님의 삶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행복하다는 삶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고, 예수님을 낳고도 산후조리 할 시간도 없이 이집트로 피신을 가야만 했었습니다. 또 사랑하는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던 사건도 있었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들렸던 ‘미쳤다’라는 소문에 가슴 졸이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당신 품에 안기도 했습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오늘 복음의 ‘성모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바로 응답하는 신앙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할 수 있었고, 이것이 ‘성모 승천’이라는 커다란 영광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바로 응답하는 신앙인이 될 때, 어렵고 힘든 삶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어느 페이지에서나 기뻐하기를.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더 감사하기를 (오은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우리 모두의 여정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완성될 우리의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승천은 순명의 완성입니다. 마리아께서 스스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들어 올리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성화도 구원도 결국 하느님의 은총이 완성하십니다.
성모 승천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겨진 삶이 마침내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된 삶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삶은 하느님 뜻에 대한 순명 속에서도 참된 자유가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참된 자유는 은총 안에서 무한성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을 줍니다.
마리아의 생애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승천을 통해 역사성을 넘어 영원한 차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은총의 결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승천 전까지 봉사와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승천의 영광은 충실한 여정의 완수 뒤에 오는 은총의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모 승천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우리의 역사 안에서 실현된 사건이자, 부활의 희망을 확증하는 표징이며, 모든 신자가 걸어가야 할 순명과 은총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낮은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날마다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겸손한 순명과 깊은 신뢰의 길입니다.
우리의 작고 평범한 오늘이 하느님 안에서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행복을 가득 누리시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기쁜 날 되십시오..
루카복음 1장 46-4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8/1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4 |
---|---|
25/08/1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8.13 |
25/08/1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2 |
25/08/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11 |
25/08/1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1) | 2025.08.10 |
25/08/09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8.09 |
25/08/0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8.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