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1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13.
반응형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오니 저희 마음에 자녀다운 효성을 심어 주시어 약속하신 유산을 이어받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1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신명 34,1-12
오늘 제1독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8,15-20
오늘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3일
최지웅 임마누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 말로 ‘교회’를 가리키는 낱말을 자주 쓸 뿐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라는 규정은 제2성전기 유다교의 한 분파였던 쿰란 공동체의 『공동체 규칙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세네파로 추정되는 이 종말론적 공동체는 구성원의 입회에서 추방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권위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으며 본인들이 적법한 차독(대제사장)의 자손이라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속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들과 꼭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형제의 잘못을 공동체 전체에 알리기에 앞서 형제적 사랑으로 그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여러 차례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17).

이 구절은 ‘너는 이제 그 일에 상관하지 마라. 더 이상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다른 한편 ‘이 일은 예수님만이 다루실 수 있다.’는 겸손한 의미까지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분들의 합이 아닙니다. 교회는 봉건 시대의 권력 구조만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로 세워진 기구도 아닙니다. 교회가 힘주어 외치는 ‘시노달리타스’ 정신은 결국 교회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바탕에 둡니다.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신경 쓰는 것은 시노달리타스도 아니요, 교회에 대한 사랑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꼭 이렇게까지 사랑해야 하나? 

오늘 주님께서는 내게 죄지은 그러니까 남에게 죄지은 사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퍼뜩 드는 생각은 사랑하기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이 남에게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힘든데 내게 죄지은 사람을 타이르라고 하시니 얼마나 힘듭니까? 다른 사람을 타이르라고 하면 차라리 쉽겠습니다. 그냥 용서해 버리라고 하심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내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이 타이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은 그러나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미움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붙들고 있기에 내내 나를 괴롭게 할 뿐이고, 내내 나를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자유와 평안을 위해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이 진정 지혜롭고 진정 나를 위한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진정 사랑한다면 용서+타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에 타이름을 더할 때 형제 하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제 하나를 얻게 된다는 말씀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소유의 뜻이 아니라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다는 사랑의 뜻입니다.

타이름을 통하여 그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니 사랑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가 나의 타이름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잘못을 고쳐준다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쉬우며 한 사람을 얻으니 주님 말씀대로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그런데 거의 틀림 없이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지 않고 그래서 용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이르는 사랑까지 하려고 한다면 내 사랑이 거부당할 각오까지 해야 하고, 거부당할 뿐 아니라 미움까지 받고 관계가 끊어질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그뿐이 아닙니다. 혼자서 안 되면 그렇게 애썼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뒷담화하지 않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열성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그를 공동체에 알려야 한다고까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하려고 한다고 사랑할 수는 있습니까? 압도적인 사랑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 그의 죄와 그의 거부와 그의 미움과 그의 고집을 압도하지 않으면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아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용서+타이름의 사랑을 하라는 명령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그 압도적인 사랑도 받아 사랑키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마음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기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절차와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네 단계로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이나 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곧 서로를 형제요,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마음이요,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거나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적 사랑 때문에 교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꾸짖거나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해서 할 일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다섯 번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잘못한 형제를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사랑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마태 18,19)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 풀릴 것이기 때문’(마태 18,18)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마음을 모으는 일’이요, 다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로 청하는 일’입니다. 스스로가 해결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 신뢰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수도규칙]에서 “(잘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니,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8,20) 

그러니 결코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혹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포기하고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8,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이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제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장 완벽하게 사람을 잃는 법 ; 결과주의자와 관계주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명쾌하고 단순해 보이는 지침을 주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정말 단순하지 않습니까? 누가 잘못하면, 가서, 단둘이, 타이르라.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이 단순한 지침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같이 체험합니다. 배우자의 사소한 습관, 자녀의 실수, 직장 동료의 잘못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이걸 지금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섭니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옳은 소리’를 해서 문제를 바로잡는 데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는 데 집중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둘은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둘 다 가능하다고, 아니, 사람을 얻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두 개의 저울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한쪽에는 ‘결과’를, 다른 한쪽에는 ‘관계’를 올려놓은 저울입니다. 이 두 저울은 우리에게 사람을 얻는 지혜, 그리고 사람을 잃는 어리석음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명확히 보여줄 것입니다. 

첫 번째 저울은 ‘결과’에 모든 것을 건 저울입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영웅, ‘매그니피선트 세븐(Magnificent Seven)’이라 불렸던 미국 여자 체조 대표팀을 기억하십니까? 그 중심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명장, 벨라 카롤리라는 코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금메달로 바꾸는 데는 귀신같은 능력을 지녔지만, 그 과정은 혹독했습니다. 특히 그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선수가 보는 앞에서 특정 선수를 질책하고 모욕을 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몸무게로 무슨 연기를 하겠다는 거야?”  

“정신 차려!”  

그의 공개적인 질책은 선수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독기를 품게 했습니다. 마침내 결전의 날, 그의 팀은 완벽한 연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꿈에 그리던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카롤리 코치는 영웅이 되었고,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팀의 막내였던 도미니크 모치아누 선수는 자서전을 통해 카롤리 코치의 끊임없는 언어적, 정신적 학대를 폭로했습니다. 금메달의 영광 뒤에는 코치의 강압과 모욕으로 얼룩진 눈물이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코치는 ‘결과’는 얻었지만, ‘선수’는 잃었습니다. 그는 ‘금메달’이라는 명예는 얻었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왜 비극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코치는 다른 선수들과 세상의 인정을 받으며 선수를 다그쳤습니다. 그의 질책은 선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채찍질이었습니다. 세상의 칭찬과 금메달이라는 결과, 그것이 그가 받을 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기에, 한 인간, 한 ‘자매’를 얻는 더 큰 상은 결코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울의 반대쪽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관계’에 모든 것을 건 한 성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윤리 신학자이자 의사인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귀족 부인이 성인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왔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죄를 고백했지만, 정작 가장 큰 죄였던 다른 귀족과의 불륜 관계는 숨기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녀의 마음속 비밀을 알았지만, 고해소에서 그녀를 다그치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성인은 그 부인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단둘이 만났습니다. 부인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예상 밖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저는 며칠 동안 부인을 위해 기도하며 제가 가진 모든 공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침, 부인의 영혼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책 대신, 자신의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랑의 고백 앞에서 부인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숨겨왔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성인의 가장 충실한 영적 자녀이자 친구가 되어 평생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성 알폰소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고해사제라는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죄를 지적하여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구원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하느님으로부터 한 ‘자매’를 얻는 가장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이 왜 그토록 ‘단둘이’ 만나라고 강조하는지 분명해집니다. 

“네가 그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예수님의 목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순간, 우리의 관심은 ‘저 사람의 영혼’에서 ‘내 체면’과 ‘다른 사람의 평가’로 옮겨갑니다. 공개적인 질책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 없는 성공, 금메달을 따고도 마음이 떠나버린 선수와 같은 비극을 낳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형제의 잘못을 마주합니다.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코치가 될 수도 있고,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금메달을 얻고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명성을 잃고 사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기 전에, 사랑을 먼저 세우십시오. 사람을 얻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언제나 먼저입니다. 

이번 한 주, 누군가의 잘못이나 고쳐주고 싶은 점을 발견했을 때, 즉시 말하려는 혀를 잠시 멈추어 주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를 위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때가 온다면, 반드시 단둘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더 많은 친구와 형제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대했는지, 그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사랑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책을 읽다가 어떤 미국 드라마의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주인공은 천재 공학 박사인데, 그는 요일마다 먹는 메뉴와 해야 할 일을 정해둡니다. 월요일에는 피자, 목요일에는 타이 음식을 먹는 식입니다. 그래야 삶에 혼란이 없고 편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천재 공학 박사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목요일, 갑자기 친구 때문에 집이 아닌 술집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 박사는 어떠했을까요? 
 
자기 계획대로 할 수 없음에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천재 공학 박사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새로운 날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 달에 한 번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목요일’로 정한 것입니다. 
 
계획에서 어긋나면 화도 나고 스트레스로 어쩔 줄을 모르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함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혼자 있으면 어떻게든 계획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획에 어긋나도 해결 방법은 있었습니다. 이 천재 공학 박사처럼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날을 정하는 등의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현대인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정신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없이 보내는 시간 안에서 함께하는 모습은 필요합니다. 함께하면서 문제의 해결도 가져올 수 있지만, 새로움을 받아들이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일은 계획성 있게 주어지지 않기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혼자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함께함은 우리에게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라면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공개적으로 문제를 드러내기 전에 단둘이 만나 대화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관계의 회복은 물론이고 그 형제의 구원을 우선시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는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증인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미움이나 배척이 아니라, 공동체 질서와 신앙 고백을 거부하는 사람을 더 이상 같은 신앙 안에서 취급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공동체가 중요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라는 공동체는 회개와 구원의 대상인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하느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소망이란 어둠 속에 두 손을 믿음으로 모으는 것이다(아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형제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단순한 규율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구원하려는 구원의 협력입니다. 이 협력의 출발점은 상대를 인격으로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잘못을 덮어두는 것도, 무자비하게 단죄하는 것도 아닌 상호 존중의 마음이 핵심입니다. 대화는 때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작동해야 할 때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방임이 되고, 사랑 없는 진리는 폭력적 심판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해를 위해 모일 때, 그 자리가 곧 성전이며 구원의 공간이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상처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심판보다 회복을, 단절보다 이해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서로를 품으며 회복을 향해 걸어가는 은총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며 사랑과 회복이 살아 숨 쉬는 복음의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만남과 대화가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의 회복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사랑은 만남과 대화로 드러납니다.

 

 

 

마태오복음 18장 2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813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23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