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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8/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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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하느님,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끄시어 가난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8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 10,12-22)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라.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 오늘 복음
    (마태 17,22-27)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신명 10,12-22
오늘 제1독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라.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2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13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14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15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17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18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19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2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만 매달리고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21 그분은 너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분이시고, 너희가 두 눈으로 본 대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크고 두려운 일을 하신 너희 하느님이시다. 

22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는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셨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7,22-27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1일
강철호 세례자 요한 신부

 

✚ 성녀 클라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9: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오늘 독서에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신명 10,16)라는 말씀은 육체의 할례뿐 아니라 마음의 할례까지 강조합니다. 외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경외하며 내적 변화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는]”(10,18)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10,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은 보호자가 없는 사회적 약자였기에,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관심과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오늘날 가톨릭 사회 교리까지 이어져 옵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세 이야기입니다. 스타테르 한 닢은 그리스 은화로 4드라크마였습니다. 드라크마 한 닢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4드라크마, 곧 스타테르 한 닢은 나흘 치 품삯이면서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성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고자 일 년에 2드라크마를 내야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바쳐진 공간이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성전의 주인이시지요.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없으신 분께서 당시 사회적 의무에 충실하신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인간의 고통에 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태의연한 정치적 분쟁이나 이기주의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이 시대의 사회적 약자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해 보고, 문제의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산 여인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오늘 감사송은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걸은 성녀로 칭송합니다.

“주님께서는 복된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써 세라핌 완덕의 정상에 올리셨나이다.”

그리고 클라라의 가난을 얘기할 때 매우 엄격한 가난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사실 클라라는 가난을 가장 엄격하게 살은 성인 중의 하나이고 가난 면에서는 가난의 대명사요 자신이 가난의 본보기로 삼았던 프란치스코보다도 어쩌면 더 가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클라라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엄격한 가난만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엄격한 가난이지 지극히 높은 가난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클라라가 가난을 엄격하게 준수하였지만 기쁨이 없었다거나, 엄격한 가난을 실천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산 것이 아니고 그런 가난을 우리는 칭송하지도 따르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클라라의 가난은 우선 관상적 가난이고, 그래서 지극히 높은 가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관상을 위한 가난이지 가난을 위한 가난은 아닙니다.

관상을 위한 가난일 때 우리는 무엇을 소유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치 않는 것이며 그럴 때 봉헌하는 가난이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난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면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애착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무엇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 이상의 애착이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되게 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애착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으며 무엇에도 안주치 않음으로써 지극히 높은 가난은 훨훨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고 하느님께 머물게 합니다.

다음으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형제적 가난입니다. 가난하기만 하고 형제애가 없으면 낮은 가난이고, 가난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면 그 가난은 더 낮은 가난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보면 재산 때문에 형제끼리 싸우고 갈라서기도 하지만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져 싸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클라라의 공동체를 보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에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 덕분에 영혼이 풍요로워져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클라라는 가난한 자매들을 가난 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특히 가난 때문에 병약한 자매들을 더욱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이것은 마치 콩 한 쪽도 반으로 나눠 먹는 사랑이고 그래서 애틋합니다.

저는 요즘 같은 더위에 산다미아노 공동체를 생각해봅니다. 좁은 공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는 수도원에 자매들은 많아서 마치 좁은 감방에 열기 때문에 옆 사람이 원수가 되는 그런 일이 산다미아노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라라와 산다미아노 공동체 자매들은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은 클라라와 자매들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 때문이고 이것이 바로 관상적이고 형제적인 가난을 살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오늘, 에어컨이 없어서 더위에 짜증이 나고 옆 사람이 없었으면 할 때도 더위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하며 더위도 관상하고 하느님도 관상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 당신 생명의 말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7,27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물고기 입 속의 동전, 그 기이한 기적의 진짜 의미

오늘 복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셔야 하는데, 그냥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베드로를 바다에 보내 낚시를 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처음 낚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 하나를 찾아, “나와 네 몫으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전능하신 분의 행동치고는 너무 번거롭고,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이런 비효율적인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셔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 슬퍼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수난과 부활에 대한 필연성을 이해시켜야만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잃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세는 누가 낼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다 밑의 물고기 한 마리가 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물고기는 요나의 기적에서처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베드로가 성전,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자격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구원에 이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셨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사에 김익두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원래는 황해도를 주름잡던 악명 높은 주먹대장이었죠.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 뒤, 예전의 그를 알던 사람들이 시비를 걸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모욕을 참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당신들이 알던 주먹대장 김익두는 이미 죽었소. 죽은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주먹을 씁니까?”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신앙을 가졌을 때 이전의 자신은 죽었다고 부고장까지 돌렸다고 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이전의 내가 죽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유익한 분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그분 없으면 구원이 없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필요한 것은 ‘슬기로운 감방 생활’에 대한 유익한 책이 아닙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감옥 문을 열어줄 ‘사면권’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을 변화시킨 것은 ‘앞으로 착하게 살자’는 유익한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죽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거스르는 믿음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혹시 갯벌이나 유사(流沙)에 빠졌을 때 살아나오는 법을 아십니까? 얼마 전 흥미로운 생존법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갯벌에 빠졌을 때, 본능적으로 다리를 빼내려고 허우적거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 주위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져, 펄은 더욱더 강한 힘으로 몸을 빨아들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더 빨리 빠져들어 가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정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몸부림을 멈추고, 차라리 갯벌 위로 편안하게 드러누워야 합니다. 몸의 무게를 펄 전체에 분산시켜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겁니다. 그러면 다리를 옭아매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신기하게도 다리가 스르르 떠오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삼키려는 그 펄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죽은 듯이’ 누울 때, 역설적으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과 우리 신앙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라는 갯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 힘으로 발버둥 칩니다. ‘노력’과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허우적거릴수록, 우리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라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우리가 죄에서 빠져나오게 ‘노력하게 만드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합니다.

만약 갯벌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뭍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칩니다. “거기서 힘을 빼고 드러누우시오!” 여러분, 그 말을 선뜻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비상식적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바로 내 옆에서 똑같이 펄에 빠졌던 사람이, 바로 그 방법으로 살아나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면 어떨까요? “제가 해 봐서 압니다. 저를 믿고, 당신의 몸을 펄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그 죽음을 이겨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이미 죽은 몸으로 사셨습니다. 처음부터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듯이’ 당신을 온전히 성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의 중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죽음의 갯벌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을 당신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만이 죽음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실제적 권능을 지니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만이 '옛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고 그것을 영적 현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하는 일은 작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따름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나중에 순교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익한 조언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죽음이 되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입장료를 “나와 네 몫으로” 대신 지불해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한 남성이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신부님, 아무도 저를 안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곧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이 남성을 따뜻하게 꼭 안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깜짝 놀란 다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노숙 생활을 오래 해서 온몸에 벼룩이 가득합니다.” 
 
그 뒤 신부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온몸에 가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사랑의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포옹은 분명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벼룩으로 인해 괴로운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옹 자체는 쉽지만, 벼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랑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벼룩’으로 호칭 되는 이유가 붙게 되면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도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로 사랑 자체가 지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에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로 사랑이 지워지고, 나의 행복도 또 기쁨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다.”(마태 17,22)라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퍼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죽음’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부활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통과 시련이지만, 사랑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의 사랑은 배려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세 사건 역시 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처럼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세금인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 성전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세금을 내십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복음 선포가 방해받지 않도록 겸손과 배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보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조건을 붙이고, 나의 욕심을 더하면서 오염된 사랑만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중심에는 무한히 공급되는 사랑이 있다.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루이스 헤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가을을 조금씩 더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존재의 변환이며, 부활은 우리 삶의 참된 완성입니다.

패패처럼 보이는 순간이 오히려 승리의 시작입니다. 고난을 넘어서는 뜨거운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새롭게 피어나는 출발점입니다.

성녀 클라라는 철저한 청빈과 겸손으로 세속의 안락과 권세를 모두 버렸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선택은 세상의 눈에는 죽음 같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난 안에서 누리는 부활의 참기쁨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죽음을 통해 사는 길이라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참된 삶은 죽음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죽음을 통과해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는 데 있습니다. 죽음도 부활도 하나의 구원 사건 안에서 통합됩니다. 성녀 클라라의 청빈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향해 사는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잃음과 포기의 자리는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참된 부활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부활의 약속은 고난을 피하게 하는 면제가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초대가 됩니다.

고난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은총은 다름 아닌 내적 가난입니다. 마음의 자유는 하느님만이 전부가 되는 청빈의 길입니다. 그 길이 우리의 오늘을 부요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의 면제입니다.

 

 

 

마태오복음 17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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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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