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주님, 복된 도미니코 사제는 주님의 진리를 전하는 훌륭한 설교자였으니 저희가 그의 성덕과 가르침으로 도움을 받고 그의 전구로 보호를 받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 4,32-40)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 오늘 복음
(마태 16,24-28)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신명 4,32-40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5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36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주셨다. 또 땅 위에서는 당신의 큰 불을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너희가 불 가운데에서 울려 나오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다.
37 그분께서는 너희 조상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 후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38 그리하여 너희보다 크고 강한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내쫓으시고, 너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오늘 이처럼 이 땅을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신 것이다.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마태 16,24-28
오늘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8일
최지웅 임마누엘 신부
✚ 성 도미니코 소개 00:06
✚ 미사시작 01:09
✚ 강론시작 08:3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달라도 서로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대단한 영광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그에게만은 피하고 싶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영광의 십자가라면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기꺼이 지겠지만, 속내 모르는 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까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말 못 할 고통을 낳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주님께 여쭙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지. 그러고는 주님께 용기를 청합니다, 이 길을 기쁘게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십자가를 팽개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십자가는 무엇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입니다. 다른 이를 의식하는 한 십자가는 빛을 잃고 맙니다. 다른 이가 인정하는 십자가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한낱 자신만의 영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이해하고, 주님께서 나를 지켜보시듯 말없이 나의 등을 도닥이며 격려해 주는 소중한 벗들을 떠올립니다. 벗들의 십자가를 보며 그들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그들의 아름다운 결단을 나 또한 소중히 여기고 보듬으려고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듯이.
저마다 짊어진 십자가는 달라도 서로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로 힘들어하는 바로 그 순간이 어쩌면 나의 십자가와 벗들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간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많이 듣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기 싫은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기 싫습니다. 제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 십자가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좋아하는 것이면 남의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할 텐데 싫어하는 것이기에 제 십자가인데도 남의 것이라고 합니다.
교묘한 바꿔치기입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자신도 속습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말썽을 부리는 형제, 그것 내 십자가입니다.
골치를 썩이는 아들, 옆집 여자의 십자가입니까?
말썽을 부리는 형제, 갈멜 수사의 십자가입니까?
그런데도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거운 걸 지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가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책임,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게 주어진 모든 것, 그것 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제자모집광고
오늘 <복음>은 일종의 ‘제자모집광고’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오늘날 ‘성소자모집광고’를 이렇게 낸다면, 누가 따라 나설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되는 이 ‘모집공고’는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제자로 모집하는 광고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집공고’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표현되어,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따라 나설 수가 있으니, 곧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어린이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 조건인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만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허약함과 무력함을 품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 곧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만나면,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 십자가를 제거하지도 해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참고 견디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참고 견디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건너 띠거나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를 건너 뛰거나 초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타협하거나 무관심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과 타협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흔연하게 품으시고, 그 속에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와 허약함과 고통 중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라고,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요청하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6,2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며,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오직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제발 “나는 죄인입니다” 좀 그만했으면…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심에 있는,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 하나를 우리 앞에 놓아두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 죽는 것 같습니다. 고해성사 들어와서, “저는 큰 ~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죄인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깨닫기까지는 정말 힘이 듭니다. ‘농구 황제’라 불리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조던. 그의 개인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플레이로 수많은 득점을 올렸고, 모두가 그를 ‘코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뜻은 명확했습니다. ‘내 능력으로 경기를 지배하고, 내 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 그는 늘 자신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팀 시카고 불스는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습니다. 왕은 있었지만, 왕조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 잭슨이라는 감독이 부임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라는 팀 전술을 도입합니다. 이 전술의 핵심은 공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선수가 함께 움직이며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던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팀의 시스템을 위해 자신의 개인기를 죽이라는 것은, 왕에게 왕관을 내려놓으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그는 마침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내 방식대로 계속 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죽여 팀을 우승시킬 것인가.’ 오랜 갈등 끝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고집을 꺾습니다. 코트의 왕이었던 그가 기꺼이 자신을 시스템의 일부로 내어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자기 뜻을 죽이고, ‘팀의 승리’라는 더 높은 뜻에 순명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시카고 불스는 한두 번이 아닌, 무려 여섯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왕조를 건설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고독한 왕’을 넘어, ‘위대한 팀의 리더’라는 더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분이 삽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면 쉽습니다. 십자가는 정체성입니다.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어쩌면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으면 영원히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런던의 거리에서 마약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노숙자, 제임스 보웬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그 자신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중독자’, ‘거리의 쓰레기’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삶은 그저 오늘의 마약을 구할 돈을 구걸하고,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랬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허름한 거처 복도에서 상처 입은 채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며칠을 굶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고양이의 치료비를 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밥(Bob)’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쓸모없는 노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밥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밥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그는 밥을 어깨에 메고 거리로 나가 버스킹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를 본 것이 아니라, ‘어깨에 고양이를 멘 특별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자, 그 자신도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지옥 같은 금단 증세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밥을 보며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밥의 보호자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무엇이 제임스를 구원했습니까? 더 강력한 의지였을까요? 더 좋은 치료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나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노숙자’라는 낡은 정체성을 죽이고,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믿었을 때, 그의 삶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이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소멸할 것이다’가 아니라, ‘소멸하였다’입니다.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하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 죄에 종노릇하던 나는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세례의 신비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세탁기가 아니라, 옛 자아를 장사 지내는 장례식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걷기 위해 걷는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는 그저 이미 걷고 있는 엄마, 아빠를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머릿속으로, 그 온 존재로 믿습니다. ‘아, 걷는 것이 정상이구나. 나도 저렇게 걷는 존재구나.’ 그 믿음이 아기의 첫걸음을 떼게 합니다.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걷는 존재가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정체성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넘어지는 나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미 온전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아주 작지만 강력한 영적 실천 하나를 제안합니다. 마음속에서 ‘아,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 자책의 언어 대신, 믿음의 언어로 이렇게 선포해 보십시오.
“주님, 저의 옛사람은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습니다. 이제 제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어떤 분이 하느님의 불의를 말하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저의 기도를 안 들어 주세요?”
“왜 저렇게 나쁜 놈들은 벌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평불만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하느님 해라.”
하느님께서 알아서 살기 좋은 낙원을 만들어주시면 참 좋겠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정의롭지 못하다는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시선과 하느님의 시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삶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만,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주님과 달리 바로 코 앞의 일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선을 따라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얻게 되는 고통이나 시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겪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생과 사랑, 자기 부정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우리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아픔과 시련에 시선을 맞춰서 불평불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시선에 눈을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용서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넓혀준다 (파울 뵈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16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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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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