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된 요한 마리아 사제에게 놀라운 열정으로 양 떼를 보살피게 하셨으니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많은 형제들을 얻어 그들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11,4ㄴ-15)
저 혼자서는 이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4,13-21)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민수 11,4ㄴ-15
오늘 제1독서
저 혼자서는 이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이
4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7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8 백성은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냄비에다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과자 맛과 같았다.
9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
10 모세는 백성이 씨족끼리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언짢았다.
11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12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13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14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15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마태 14,13-21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4일
한성훈 가브리엘 신부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소개 00:06
✚ 교황님 8월 기도지향 01:27
✚ 미사시작 01:45
✚ 강론시작 09:2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신학생 때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1815년 어렵게 사제가 되어, 시골 마을 아르스로 발령을 받습니다. 성인은 아르스로 가는 길에 길을 잃었고, 그때 우연히 만난 목동에게 “네가 나에게 아르스까지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 나는 네게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르스에 도착해 보니 신자 대부분이 냉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반가톨릭주의와 반성직 주의가 널리 퍼져, 거의 모든 이가 교회를 떠났었지요. 그러던 어느 밤 성인이 사제관에서 몰래 도망쳤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너에게 맡겨진 저 많은 영혼은 어찌할 셈이냐?”라고 물으셨고, 그 물음을 들은 성인이 다시 본당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성인은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에 나오라고 권하였고 묵주 기도를 바치며 종일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그러자 냉담하던 신자들이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유럽 전역에서 고해성사를 보려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특히 성인은 성체 신심이 강하여, 신자들에게 성체를 자주 모시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소개됩니다. 빵과 고기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시는 장면은(마태 14,19 참조) 성찬 제정 이야기와(26,26 참조) 닮아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전형으로 풀이되는 이 이야기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삶을 거쳐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성인의 삶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성체 신심이 누구보다 강하였고, 두려움과 약함 가운데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성인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성인을 통하여 많은 이를 회개하도록 이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무뎌진 마음도 당신께 이끄시기를 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동화와 육화를 하지 않는 나
“예수께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가엾이 보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도 일으키시어 먹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가엾은 마음에 대해 묵상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가엾은 마음이 제게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제게 가엾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있기는 있지만 전과 비교하면 지금 그 마음이 너무 부족하고, 주님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것이 저입니다. 우선 가엾은 마음이 드는 사람, 즉 대상이 줄어들었습니다. 전에는 모든 사람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가엾이 보았고, 티브이에서 가엾은 사람들에 대한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엾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내가 다 보냐 하며 아예 보려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도 조금 아파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하다가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가여워하기는 하되 아파하는 마음이 저를 사로잡는 것은 허용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가엾은 사람을 보면 그의 아픔이 그대로 저의 것이 되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같이 아파했으며 정말로 오지랖 넓게 이 사람 저 사람 도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의 마음이 좁아지고 쫄아들었을까요? 제가 저의 합리화의 이유로 자주 내세우는 것은 나이 먹어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울 힘이 떨어져 사랑도 졸아든 거라는 얘기지요. 그것도 사실이지만 오늘 생각해보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육화 또는 동화를 제가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수녀님들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는데 제가 그 수녀원 총회 특강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과의 얘기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개인주의화한 요즘 우리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수도회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사랑은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다.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아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재물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으로 말하며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찬미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가엾이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찬미로 차린 밥상이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는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의 몸’을 건네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차고 넘치는 이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4,16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찬미를 잘하는 사람은 왜 잘 살까?
저는 가끔 성가대 하시는 분들이 안 하시는 분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왜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까?’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 비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선물을 주고도 마음이 헛헛하고, 무언가 베풀고도 괜히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 ‘주는 기쁨’이 더 크다고 배웠는데, 왜 우리의 나눔에는 이토록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주는 행위’와 ‘진짜 나눔’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상을 기대하며 주는 것은 진짜 주는 게 아닙니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가족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환경을 얻었지만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주는 척, 위하는 척하며 살았지만, 그 영혼의 본질은 주인의 것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었을 뿐입니다. 감사와 찬미가 없는 삶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진짜 나눔이 무엇인지 온 삶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정조 임금 시절,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인 기녀의 신분으로 시작해,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제주 제일의 거상, 오늘날로 치면 여성 CEO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때는 1794년(정조 18년), 제주에 끔찍한 흉년이 들어 길거리에 굶어 죽는 시신들이 즐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김만덕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다 털어 육지에서 쌀을 사 와 도민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님이 너무나 기특해서 김만덕을 한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자, 여러분이 김만덕이라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어요? 평생 먹고살 땅? 높은 벼슬? 저 같아도 귓속말로 ‘이번 새 책,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 많이 팔리게 해 주세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소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사옵니다. 부디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하게 해 주시옵소서.”
돈도, 벼슬도 아닌 금강산 유람이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녀의 마음에는 ‘결핍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음에 기뻐하는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풍요로웠기에, 나눔에 대한 보상으로 다시 물질을 채우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큰 명예와 기쁨을 얻게 되었죠.
저에게도 이 ‘결핍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이 컸습니다. ‘나는 가정을 꾸리는 기쁨을 포기했으니, 주님께 더 많이 드리고 있고, 신자들에게 더 많이 희생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내 사그라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피어난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피정에서 찬미를 할 때였습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이 가사들이 무심코 들어왔는데 그때 길 잃고 헤맬 때 빛을 보았던 것처럼 다시 빛을 본 느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찬미가 기도가 됩니다. 찬미로 느꼈던 그 충만함의 느낌.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억지로라도 성막을 짓고 매일 감사의 제사를 바치게 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 감사와 찬미라는 ‘영적 훈련’이 없다면, 한 번만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결핍의 감정을 극복하고 감사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찬미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사촌이자 동료였던 세례자 요한이 끔찍하게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계셨죠.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수만 명의 군중을 앞에 두고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마태 14,17)라고 말합니다. 상황 전체가 ‘결핍’이라는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슬픔의 결핍, 물질의 결핍.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으십니다.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고기를 받아 드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슬픔과 결핍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감사와 찬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기적의 스위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에우카리스티아)가 없었다면, 빵 다섯 개는 그저 한두 명의 허기를 달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미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되었을 때, 그것은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찬미와 풍요의 법칙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노래가 있지요. 이 아름다운 찬미를 지은 존 뉴턴은 처음부터 거룩한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고통 속에 밀어 넣으며 살았던,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극적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자신의 끔찍한 죄를 눈물로 회개하자,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위대한 찬미가 된 것입니다. 유명해지려고 쓴 곡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흘러넘쳐 저절로 나온 찬미였고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찾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텅 빈 지갑이 아니라, ‘결핍의 감정’ 바로 그것입니다.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찬미가 바로 감사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결핍의 감정을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조건 없이 은총을 받았음을 알기에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감사하며 나눌 줄 아는 마음에 더 큰 축복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설거지할 때, 운전할 때 차 안에서 찬미를 틀어놓고 따라 불러 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기다릴 때,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자투리 시간을 찬미로 채워보는 겁니다. 완벽하게 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작은 흥얼거림이, 낮은 읊조림이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의 소리를 잠재우고, 항상 내가 베푼 것의 수십 배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기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믿음도 변하고 진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를 모두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8세기에 익사자는 엉덩이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으면 소생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대변을 치료 약으로, 즉 두통, 간질 등 모든 병의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던 중세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를 믿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을 버릴 수 없어.”라는 생각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싸우게 합니다. 그 상대를 미워하고 단죄합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병자였습니다. 당시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이가 거부를 했습니다. 병자와 함께하면 자기에게도 그 더러움이 옮겨져서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병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 병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모두 고쳐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치유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치유된 이 사람은 보통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지 않을까요? 병원에서라면 치료비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얻고 싶었나 봅니다. 그곳은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기에 외딴곳이었고, 그래서 먹을거리를 살 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예수님 먹을거리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제자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려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맞는 답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도록, 그래서 가진 것이 적어도 내놓으라고 하시지요. 이것이 기적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적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에서 나오는 신념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늘 보여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실제로는 약한 분이 아니시지요. 너무나 강한 분이시기에 겸손으로 약하게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강함이 불가능할 것 같은 우리 모두의 구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자기 믿음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 이곳에서 그리움을 동력 삼아 행복으로 나아간다 (정은숙).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14장 16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8/03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8.03 |
---|---|
25/08/02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4) | 2025.08.02 |
25/08/0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4) | 2025.08.01 |
25/07/3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3) | 2025.07.31 |
25/07/3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7.30 |
25/07/2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7.29 |
25/07/2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 | 2025.07.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