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8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코헬 1,2; 2,21-23)
그 모든 노고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 제 2독서
(콜로 3,1-5.9-11)
여러분은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13-21)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코헬 1,2; 2,21-23
오늘 제1독서
그 모든 노고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21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2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3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콜로 3,1-5.9-11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은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루카 12,13-21
오늘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3일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6:3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선택과 집중
오늘 독서와 복음이 다루는 주제는 ‘선택’과 ‘집중’입니다. 코헬렛의 상징적 표현인 “허무로다, 허무!”는 제1독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단순한 허무주의, 절대적 염세주의, 무정부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같은 시대의 유다인들이 하느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지혜에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초대하는 듯합니다.
제2독서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나타납니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잡다한 요소를 섞어 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종교 혼합 주의 현실 앞에서 바오로 사도가 단호하게 외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콜로 3,11).
이는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라는 형제적 격려라고 풀이됩니다.
오늘 복음은 유산 상속으로 일어난 논쟁에 관하여 탐욕을 경계하라는 예수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그러고는 재화는 마땅히 하느님 중심으로 쓰여야 하며 그분께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12,21).
다시 말해서, 신앙인은 자신을 위하여 재화를 쓰기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데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무엇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나요? 일상에서 우리 마음은 어디에 머무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창조적 허무
“나는 허무주의자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허무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허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데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허무를 저는 왜 좋아할까요? 물론 그 허무가 제가 좋아할 만한 허무이기 때문인데요, 제가 좋아할 만한 허무란 창조적 허무입니다. 창조적 파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던 집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공연히 집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집이 이제는 더 이상 집으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보기 흉하기에 부수는 겁니다.
그러므로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이고, 허무의 원조는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허무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일 뿐 아니라 곧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이전의 허무이셨고 거기서 모든 것이 생겨났으며 생겨난 모든 것은 이 하느님이신 허무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허무란 말은 빌 허(虛)와 없을 무(無)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하느님은 무(無)이십니다. 그러나 무이시지만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없애시며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로부터(ex nihilo)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허(虛)이십니다. 허이신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고, 그래서 텅 빈 분으로 늘 계시지만 비우심으로써 모든 것을 채우시고, 텅 비어 계심으로 사실은 가득 차신 분, 곧 허허실실(虛虛實實)이십니다.
하느님은 이러하신데 우리 인간은 허무로 되돌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허물기는커녕 더 쌓으려고 하고, 비우기는커녕 더 채우려고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재산 문제로 다투는 사람에게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뜻으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탐욕(貪慾)이란 게 무엇입니까? 욕구하는 것을 탐하는 것인데, 비우려 하지 않기에 욕구가 생기고, 욕구를 채우려 하기에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제부터 저와 수련자들은 여름 체험 프로그램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전 수련소를 떠나 지금 전남 장성 노인 요양원에 와 있습니다. 오는 길에 저희는 전에 제가 녹음해두었던 노래 하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노래의 내용이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입니다.
오래간만에 이 노래를 들으며 진정 모든 것이 바람결의 먼지와 같음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지만 진정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게 되어있고, 우리의 삶, 특히 영적인 삶이란 바로 허무화의 삶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무화가 바로 창조적 허무화입니다. 창조적 허무화는 상태를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도록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것인데, 어차피 허무로 돌아갈 우리는 스스로 자신과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느냐, 아니면 스스로 허무로 만들지 않기에 하느님께서 허무로 만드시느냐, 우리는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연중 제1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는 것을 말하면서 진정한 참된 지혜를 찾도록 인도합니다.
<제2독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참된 지혜(생명)’를 가르쳐줍니다.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이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하지만, 마음속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 안에 탐욕과 이해타산이 아닌, 사랑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될까?
진정,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카 12,18)
그는 탐욕으로 눈멀었고, 하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오만함으로 눈멀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느님도, 주위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형제들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과 재물만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쌓아 둔 재물에 희망을 걸면서,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의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정, 내일을 대비하는 삶이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니요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의 생명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
당연히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주인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안토니오 더블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가리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곳간에 자신의 말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간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생각을 많이 품은 사람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요,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곳간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주님의 말씀인가? 주님의 사랑인가? 아니면, 내 자신인가? 재물인가? 자신의 뜻인가?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고, 온전히 당신께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바닥을 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는 이미 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끔찍한 고통을 끝내기 위한 발명이, 어째서 발명가들에게는 지옥의 시작이 되었을까요? 이 비극은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인류는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를 이용한 공개 수술에 성공하며 환호했지만, 그 영광의 무대 뒤편에서는 세 남자의 인생이 파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치과의사 웰스, 그의 제자 모턴, 그리고 또 다른 스승 잭슨. 이 세 사람은 서로가 마취술의 최초 발명가라고 주장하며, 탐욕이라는 광기가 빚어낸 지옥도를 펼쳤습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소송을 걸고, 명예를 짓밟았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웰스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모턴은 특허 소송에 모든 것을 탕진한 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며, 잭슨은 두 사람의 비극을 지켜보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할 기술이, 정작 당사자들은 가장 끔찍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의 맨얼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남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유산을 나눠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왜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하고 얼굴을 굳히며 말씀하셨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한마디 말속에 숨겨진, 저 세 사람의 비극으로 향하는 길을 똑똑히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탐욕의 길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제가 아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한 봉지 사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제가 “아빠도 하나만 먹어보자” 하니 아이가 싫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럼 동생이랑 하나씩 나눠 먹으렴” 하니, 그것도 싫다고 자기 품에 꼭 껴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다음에 또 과자를 사 주고 싶을까요? 저라도 삐져서 다음엔 국물도 없을 겁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 재능, 재물을 자기 것인 양 꼭 껴안고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색한 사람은, 결국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스타 강사 김미경 씨가 방송 ‘어쩌다 어른’에 나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강사였던 그녀는, 석사 논문 표절 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강의가 끊기고 완전히 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녀는 그 끝없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삶이 오직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만을 갈구하는 ‘자아의 노예’로 살아온 삶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침묵 속에서, 자기 안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 어쩌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망해야 한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꼭 그렇게 인생의 급소를 맞고 쓰러져야만, 비로소 탐욕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망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직접 망해보는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이미 에덴 밖, 즉 ‘영적 파산 상태’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데이터가 이미 내장되어 있습니다. 굳이 새로 망할 필요 없이, 과거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어릴 적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훔치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죄책감의 고통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저를 도둑질로부터 지켜줍니다. 또래보다 일찍 담배를 피웠지만, 남의 것을 훔쳐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모두 이런 ‘작은 실패’와 ‘양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물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오늘 밤 내가 죽는다’는 생각의 예방주사를 매일 맞는 것입니다. 백신은 소량의 약화된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 주입해서, 진짜 바이러스가 왔을 때 이겨낼 항체를 만들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조금 불편하고 거북한 주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주사는,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우리 영혼이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백신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 예방주사를 맞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병을 온몸으로 앓아야 했습니다. 수도 한양이 불타고,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자신은 비에 젖어 의주로 도망치는, 나라의 ‘죽음’이라는 바닥을 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이순신이라는 보물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경이 없으면 나라도 없소. 모든 것이 경에게 달려 있소.” 자신의 권력이라는 창고가 완전히 파산하고 나서야, 그는 신뢰라는 진짜 부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매일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이 잠을 자다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잠드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나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할까 봐서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저는 이상한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후회 없이 행복하게 하루를 살자.’ 그렇게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기 시작하자, 역설적이게도 제 삶은 그 어떤 때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워졌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오늘 밤이면 다 놓고 가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교회는 이 위대한 지혜를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성무일도 끝기도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기도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기도가 아니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가장 간절한 기도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고백하며, 오늘의 모든 집착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는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이번 주, 우리의 실천 사항은 이것입니다. 매일 밤, 그 작은 죽음인 잠자리에 들기 전, 이 기도를 꼭 한 번씩 바칩시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탐욕과 걱정들을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백신을 매일 맞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닌, 하느님 앞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사람으로 매일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시어 저희 마음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시편 90,12)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신부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정말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강론하는 것, 신자들과의 만남, 어려운 사람을 향한 배려 등등 무엇 하나 잘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잠을 줄이고 열심히 독서했으며, 또 각종 강의를 들으면서 저를 만들어갔습니다. 시간 활용을 위해 플래너를 사용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빡빡한 하루의 연속이었고, 또 이렇게 살아야 잘 산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신학생 때와 다른 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더 중요한 미래는 이 세상에서의 미래가 아님을, 즉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대비해야 함을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나를 지웠습니다. 플래너와 일기 쓰기를 멈췄습니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빡빡하게 사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야 당연하지만, 인간 사랑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 모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그럽고 베푸는 삶을 습관처럼 행해야 했습니다. 즉, 사랑에 성실한 제 모습을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본당에 파견 나온 부제가 강론 중에 “제가 30년 뒤, 이 본당 주임 신부로 올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순간 계산합니다. 30년 후에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가 얼마나 시급함을 깨닫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마음의 변화와 불안, 그리고 근원적인 헛됨을 깨닫지 못하고, 재산으로 자신의 성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재산을 쌓아두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재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없으며,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을 하느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합니다. 진정한 부유함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얻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밤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요? 내 재물을 하느님 나라와 다른 이를 위해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 사랑, 삶.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글자 셋은 꼴만큼이나 속성도 닮았다. 저마다의 모서리와 귀퉁이를 가진 사람이 하늘처럼 둥근 사람과 합쳐 삶이 된다 (유선경).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삶의 가치는 재산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더 안전하고 더 많이 쌓아야 더 성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보험이나 계좌 잔고, 소유한 물건의 개수나 집의 크기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생명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습니다. 재산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은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직면하는 사람은 비로소 삶의 본질을 바라봅니다.
재산은 때로 사람을 보호하는 듯하지만, 종종 사람을 구속하고 속박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진실하게 관계맺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나눔 속에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삶을 살아갑시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루카복음 12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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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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