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레위 25,1.8-17)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 오늘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레위 25,1.8-17
오늘 제1독서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마태 14,1-12
오늘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2일
김민회 시몬 신부
✚ 8월 교황님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8:22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오늘 독서는 희년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세상 창조 때 하느님께서 엿샛 날까지는 일하시고 이렛 날에는 쉬셨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며 흐뭇해하시고 기뻐하셨는데,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1,10.12.18.21.25)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를 근거로 일주일의 마지막 날을 주님의 날인 ‘주일’로 정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마찬가지로 칠 년에 한 번 안식년이 돌아옵니다. 일곱 번째 안식년을 보낸 다음 해, 오십 년이 되는 해를 거룩하고 기쁨에 가득 찬 ‘희년’으로 선포합니다. 희년에는 하느님 창조 질서대로 세상 만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신 것처럼 인간도 자비롭고 정의롭게 살도록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정의롭게 살던 세례자 요한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였는지가 잔혹 동화의 한 장면처럼 소개됩니다. 헤로데라는 부정직한 자가 자존심을 내세워 자신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덮으려고 세례자 요한 같은 의인을 어떻게 박해하며 부정을 일삼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처음에 한 작은 거짓말이 나중에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것들이 불어나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자존심 때문에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습니까? 다른 이의 시선이 두려워 또는 다른 이 앞에서 생색내려고 부정하고 부적합한 행동을 일삼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희년에 담긴 정의와 자비의 정신, 그리고 헤로데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정의와 우리 인간의 정의에 대하여 곰곰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생명의 무게
여름만 되면 저는 모기와 신경전을 벌입니다. 이 신경전의 역사는 오래 됐습니다.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저희 은사인 순례자와 나그네 삶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무전 순례를 하곤 하는데 여름에 할 경우 애로 사항 중의 하나가 모기와의 싸움입니다.
하루는 잠잘 곳을 얻지 못해 한 데인 원두막에서 잠을 자는데 모기가 1개 소대로 덤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리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하고 온 신경을 쓰다 보니 밤새도록 저는 한 숨도 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새벽이 되어 더 이상 잠자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사부님, 이 모기도 형제라고 해야 합니까?”하며 긴 밤의 씨름을 헛웃음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을 형제라고 하였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뿐이 아니지요. 옛날 어떤 스님은 모기에게 피 보시를 하기 위해 모기장 밖으로 팔뚝을 내놓고 잤다지요.
그런데 저는 모기에 물릴 때마다 죽여 버릴까말까 갈등을 합니다. 물린다고 제가 죽는 거 아니고 그저 가려운 것일 뿐인데 잠시나마 저를 괴롭히고 잠을 못자게한다고 죽이려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힘으로 치면 모기는 한 줌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모기 죽이는 거, 그거 너무도 쉬운 겁니다. 눈 깜짝 안 하고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기를 생명으로 보면 아무리 내가 큰 힘을 가지고 있어도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아니 어찌 해서도 안 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자기의 아픈 곳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아픈 곳을 건드린다고 요한을 너무 쉽게 죽여 버립니다. 생명이 아니라 힘으로 요한을 대한 것입니다. 생명의 무게가 체면보다 가볍습니다. 생명의 무게를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으며,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나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지만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결국,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시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4,8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오늘,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모신심미사 : 노키즈존과 낙태, 무엇이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가?
찬미 예수님.
여러분, 이 세상에는 중력의 법칙처럼 절대로 변치 않는 영적인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살리려는 자 살 것이요, 죽이려는 자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외 없는 법칙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법칙을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노키즈존’이라는 팻말은 아이들의 소란을 ‘죽여서’ 어른들의 평온을 ‘살리겠다’는 작은 선언입니다. 낙태를 합법화하려는 시도는 한 생명을 ‘죽여서’ 나의 계획된 삶을 ‘살리겠다’는 거대한 외침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무언가를 죽이고 제거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사회와 우리 영혼이 정말 살아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더 죽어가고 있습니까?
‘죽이려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이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먼저 소설과 역사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천재 과학자는 생명을 창조했지만 그 모습이 흉측하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버립니다. 자신의 완벽한 세계에 나타난 ‘문제’를 죽여 없애려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버림받은 피조물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창조주의 가족과 친구, 그의 세상 모든 것을 파괴했고, 마침내 창조주 자신마저 고독과 절망 속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죽이려는 자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외 없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조선의 왕 연산군은 어머니의 복수를 명분으로 수많은 신하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정적을 죽여야만 자신의 왕위가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수록 그는 살아남은 이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불신은 그를 외롭게 했으며, 고독은 그를 미치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장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받아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결국 그가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무서운 법칙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법칙은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려는 자가 죽는다면, 반대로 살리려는 자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제거할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완성시켜줄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하늘의 어머니, 성모님이십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소식은, 당시의 기준으로 그녀의 사회적 생명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살리겠다’고 결심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위대한 순명으로, 그녀는 단지 한 아기를 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인류를 살렸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구원의 어머니요 하늘의 모후로 영원히 살아나는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살리려는 자 살 것이라는 법칙의 가장 완벽한 증명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이 법칙은 성인들의 삶에서도 그대로 증명됩니다. 1950년 흥남부두에서 레너드 라루 선장은 자신과 선원들을 지켜줄 무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1만 4천 명의 생명을 태워 ‘살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돈과 명예를 얻는 대신,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남은 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살림으로써 자기 자신이 영원히 사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도로시 데이는 어떻습니까? 젊은 시절 방황하던 그녀는 딸 ‘타마르’를 낳고 그 생명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리기로’ 결심합니다. 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어 세례를 받게 한 그 선택이, 결국 도로시 자신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한 명의 딸을 살리려던 그 사랑이, 그녀 자신을 살리고 나아가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살리는 ‘가톨릭 일꾼 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서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연산군처럼, 내 앞의 생명을 문제로 여기고 죽여서 내가 살려는 길. 그 끝은 공허와 파멸뿐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라루 선장, 도로시 데이처럼, 내 것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살리려는 길. 그 끝은 완성된 기쁨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당 문을 나서며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예외 없는 법칙입니다. 살리려는 자 살 것이요, 죽이려는 자 죽을 것입니다. 생명은 제거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줄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번 주, 우리 마음속에 이 생명의 법칙을 실천해 봅시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배우자의 잔소리가, 직장 동료의 실수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그들을 문제로 여기며 내 마음속에서 죽이지 맙시다. 대신 이렇게 아주 작은 기도를 바쳐보는 겁니다. “주님, 이 또한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감사합니다. 저를 살리시기 위해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이 작은 기도가 ‘죽이려는 자’에서 ‘살리려는 자’로 우리를 바꾸어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유럽에서 최악의 호텔로 알려진 곳이 있습니다. 최악의 호텔로 알려져 있다면 사람들이 굳이 방문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위치는 정말 좋습니다. 국립 미술관, 반 고흐 미술관, 릭스 뮤지엄, 라이덴 광장, 폰델 공원 등 주요 관광지와 가깝고 지하철도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합니다. 이렇게 좋은 점도 있지만, 청결하지 못하고 침구류가 편하지 않아서 “베개 챙겨오라.”라는 후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또 도심지에 있어서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행객이 이 호텔을 이용하려고 줄을 섰습니다. 이 호텔의 이름은 한스 브링커 호스텔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호텔에서 먼저 ‘유럽 최악의 호텔’이라고 홍보하고 있고, 사람들이 이 호텔에 묵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SNS에 알립니다. 부정적인 말로 홍보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이 관심을 끌게 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호텔처럼 최고의 호텔인 것처럼 홍보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진도 조작해서 하룻밤 묵고 싶은 곳으로 홈페이지에 올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위치를 알고 솔직하게 홍보했기에 오히려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남에게 잘 보이려고만 노력합니다. 그 결과가 좋게 나오면 좋겠지만, 그런 노력이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가야 그 진정성이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의 배경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헤로데 영주가 유다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이에 대해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혼인이라면서 공개적으로 꾸짖었고, 그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자기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춘 것에 기뻐하면서 어떤 청이든 다 들어주겠다면서 맹세를 하지요. 그때의 청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는 것이었고, 헤로데 영주는 맹세 깨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요한을 참수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세례자 요한의 부활로 오해하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불의한 임금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간의 망신과 자기 체면 때문에 하느님 앞에 제대로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와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순간의 망신과 자기 체면의 손상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께 떳떳한 삶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도 너를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으로 대하면, 그들도 너에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매일매일 새로운 선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권력 앞에서도 진리를 외쳤고, 그 대가는 생명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살인을 선택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권력보다 양심을 무너뜨릴 때 드러납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죽음조차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헤로데의 잔치는 쾌락과 권력, 술과 충동으로 가득 찼고 그 끝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생명과 치유, 나눔과 진리로 가득 찹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통해 깊어지고, 고난을 통해 완성됩니다. 세상의 가치는 진리를 두려워하고 진리를 제거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영광은 항상 십자가를 지납니다. 쟁반 위에 올려진 것은 단지 한 예언자의 머리가 아니라, 세상이 외면한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것인지, 외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선택은 침묵이 아닌 사랑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그 용기를 따르는 사랑의 길은 너와 나, 우리를 지키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의 손에는 수 많은 쟁반이 아닌 수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소중한 진리를 살리는 오늘입니다.
레위기 2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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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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