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네.
하느님,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내신 성자께서 복된 마르타의 집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형제들 안에서 성자를 섬기며 마리아와 함께 성자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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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4,7-16)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1요한 4,7-16
오늘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1,19-27
오늘 복음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9일
최재관 암브로시오 신부
✚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9:0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부족한 믿음에도 응답하시는 예수님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을 앓고 있다고 알립니다(요한 11,3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야 두 자매를 방문하십니다. 이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주님께 일종의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해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을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을 생각하는 마르타의 답변을 보면 ‘지금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실 일에 확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는 훌륭하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돌을 치워라.” 하셨을 때, 마르타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9)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보면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잘 모른 채, 오직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한 동의 차원의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부족한 믿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의 크고 작음보다는 믿겠다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족으로 사랑하기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으로의 초대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합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계속해서 마치 떼를 쓰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강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리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1,26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당신 ‘소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오늘 조금은 도발적인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 리스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신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매일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요?”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음료수가 안 나오면, 우리는 자판기를 발로 툭툭 차며 “이거 고장 났네!”라고 소리칩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건강’ 버튼, ‘합격’ 버튼, ‘돈’ 버튼을 절박하게 누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제 기도를 듣고는 계신 건가요?”라며 하느님이라는 자판기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기도해도 바뀌는 게 없을까?’라는 탄식은 바로 이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어떤 ‘싸움’을 시작하는지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에도 이런 원리를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어둠, 그야말로 ‘영혼의 무덤’ 속에 갇힌 아이였습니다. 가족조차 포기했던 이 아이에게 스승 앤 설리번이 찾아옵니다. 앤 설리번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헬렌을 위해 “보게 해주세요, 듣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대신 빌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헬렌의 손을 잡고 펌프가로 데려가 차가운 물을 느끼게 하면서, 그 손바닥에 ‘w-a-t-e-r’라는 단어를 수없이 써 내려가는, 지독하고 고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 갇힌 영혼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 그 작은 돌멩이 하나를 함께 치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헬렌이 펌프가에서 물의 실체와 단어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 그녀의 무덤 문이 열리고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헬렌이 스스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가장 단단한 불신의 돌, ‘나는 불가능하다’라는 돌을 함께 치워준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 소원을 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소원을 위해 움직일 의지가 있는지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21)
이 고백은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교묘한 불신이 숨어있습니다. ‘과거에’ 계셨더라면 살리셨을 것이고, ‘미래에’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지만, ‘지금 여기’ 이 절망의 현장에서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뒤, 사람들을 향해 전능하신 명령을 내리십니다.
“저 돌을 치워라.” (요한 11,39)
예수님은 손가락 하나로 돌을 날려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냄새나고, 힘들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일,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우리 손으로 직접 치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지극히 현실적인 마르타가 가로막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이게 되겠어?’라고 말하는 우리 안의 목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믿으라고 하시며, 사람들이 마침내 돌을 옮기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외치시어 죽음을 이기십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사건만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긴’ 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 ‘소원’을 비는 기도를 잠시 멈추고 ‘싸움’을 거는 기도를 시작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보다는 ‘그래서 뭐를 했는데?’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건 절대 안 될 거야’라고 단정 지었던 내 삶의 무덤을 딱 하나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무덤의 돌멩이를 옮기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주님께 대한 순종의 기도로 봉헌해보십시오.
용서할 수 없던 그 사람의 SNS에 ‘좋아요’ 한번 누르는 것이 바로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엄두가 안 나던 자격증 시험의 원서 접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자격도 없어’라는 생각과 싸우며 1분이라도 성경을 펼치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돌멩이와 씨름을 시작할 때,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보다 훨씬 더 위대한 당신의 ‘관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당신의 권능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그분이 모두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자신들에게 좋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치원생인 어린아이가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가지고 와서는 엄마에게 소주를 마시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했지요. 아이는 목이 너무 탄다면서, 어젯밤에 아빠가 이 소주를 마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안 돼. 이 소주는 어른이 마시는 것이지, 네가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아이의 부탁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해로운지를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엄마의 판단보다도 더 바른 판단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기준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유익하고 해로운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있다면, 주님의 판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어떤 청을 해야 할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 뜻에 맞는 청을 하는가? 아니면 자기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청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인해 마르타와 마리아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마르타는 그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안타까운 마음만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응답하십니다. 물론 마르타는 주님께서 어떻게 살릴지를 잘 모릅니다. 그냥 믿을 뿐이기에, 마지막 부활 때를 이야기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신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
마르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라면서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응답으로 믿음을 표현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께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항상 바르다는 믿음,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구름 뒤에는 항상 빛이 존재한다 (루이자 메이 올컷).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건네는 인격적 신뢰의 고백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병자를 고치시는 분,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자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 앞에서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니며, 절망도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그분과의 만남 안에서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전환됩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분명하고 이해될 때 가지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도 존재 전체를 걸고 그분께 의탁하는 용기 있는 응답입니다. 의심과 질문이 가시지 않은 상황 속에서조차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구원은 단지 미래의 막연한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마르타는 그 생명을 믿었고, 그 믿음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부활의 기적을 잉태했습니다.
그녀의 고백,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는 요한 복음서 전체에서 베드로의 고백에 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신앙 선언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대표했다면, 마르타는 고통과 사랑, 상실과 희망의 자리를 대표하여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고백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도 마르타처럼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주님을 생명의 빛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지금 여기, 나의 고통과 기쁨, 죽음과 생명의 경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새 생명을 시작하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요한1서 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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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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