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7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18,20-32)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 제 2독서
(콜로 2,12-14)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1-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창세 18,20-32
오늘 제1독서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 무렵
2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콜로 2,12-14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루카 11,1-13
오늘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7일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8:0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기도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고 청합니다. 보통 우리는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면 그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방법이 아니라 내용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아버지”(11,2)라고 시작하게 하십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 자체로 관계를 포함합니다. 자녀가 있어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똑같은 칭호로 부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기에, 사형 선고를 당하시는 것도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관계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고,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분으로, 또 사랑이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그 무엇도 아끼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가깝습니다.
기도에 관한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사랑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로 시작해서, 또 다른 사랑의 관계인 친구 사이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야기하시며 마치십니다. 기도는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 일치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께서도 못 들어 주시는 기도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면 주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면 다 들어주실까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기도를 했는데도 그 기도가 가납되지 않고, 기도대로 가납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도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하느님도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들어줘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못 들어주시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이 협력치 않기 때문에 못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진리 또는 진실에 어긋나고,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들어주실 수 없고, 그래서 안 들어주십니다.
진리의 하느님이 어떻게 진리/진실에 어긋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이기에 그러실 수 없고,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기에 그러실 수 없습니다. 진리/진실과 어긋나는 기도를 우리가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안 들어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기도를 하실 것입니다.
제발 진리에로 돌아서 달라고. 사랑에 어긋나는 것도 못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에 어긋나는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기에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미움과 증오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겠습니까? 저 미운 놈 다리 부러지게 해달라면 그 기도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느님께 드리면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에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지 말고 제발 마음에서 미움과 증오의 가시를 빼라고. 증오와 미움의 가시를 가지고 사느라 얼마나 아프냐고 안타까워하시면서. 좋은 청, 올바른 청이고 그래서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려고 해도 우리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못 들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저지르는 범죄는 그 자유의지를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하느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십사고 우리 인간이 아무리 기도하여도 우리 인간이 동의하고 협력치 않으면 오늘 창세기의 얘기처럼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징벌에 처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의인이 몇 명이라도 있으면 그들을 봐서라도 벌하지 마시라고. 그러면서 죄인 때문에 의인이 죽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논리를 폅니다. 사실 보통 우리는 공정을 얘기할 때 죄인, 악인을 벌하지 않고 살게 놔두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다시 말해서 죽이는 공정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아브라함은 의인 몇 명 때문에 죄인, 악인까지도 살리는 공정을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얘기하지만 실은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공정이기에 하느님께서 다만 몇 명이라도 있으면 다 살리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구원되려면 모두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협력할 의인이 몇 명이라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이런 살리는 기도를 해야 하고,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사랑의 구원 사업에 협력도 해야 함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께 청하라.
연중 제17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과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이고 신뢰에 찬 극적 장면을 통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탄원과 중재기도를 통해 선한 사람의 성성(聖性, santita)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말해줍니다.
여기서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지만, 예언자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한 사람’으로 족하리라고 말한다(예레 5,1;에제 22,33). 그리고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죄 없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그 한 사람의 역할은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 중재자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얻어지는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흔히 ‘주님의 기도’로 불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전해줍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이 기도의 배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사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억압과 과도한 세금 징수와 종교인들의 부패 속에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대망사상을 담은 여러 부흥운동 그룹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담은 기도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1)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주님의 기도’는 탄생되었습니다. 곧 ‘새 공동체의 원리와 삶과 질서를 담은 새 기도문’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강령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마태오복음>에서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저희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는 청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고 ‘모범으로 제시된 기도’임과 동시에, 이 기도는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주어진 기도’임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압바”(αββα)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과 함께 아들인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기도의 열쇠 말은 “아빠”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아빠, 아버지"이신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곧 그분을 대면하는 면전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압바”인 것입니다. 곧 복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시제가 없으니,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에게 걸 맞는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 곧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두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그러니, 그토록 넉넉히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1,2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할 때 행복해지는 이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완전한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레오 형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레오 형제는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로 눈먼 이가 눈을 뜨고, 마귀 들린 이가 해방되며,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 아닐까?’ 미래에 이루어질 눈부신 ‘성과’에서 기쁨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레오 형제여, 우리가 한겨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굶주리고 얼어붙은 채 우리 수도원 문을 두드릴 때를 상상해 보게. 문을 열어준 동료 수사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당신들은 누구인가? 어서 꺼져버려!’라며 모욕하고, 심지어 몽둥이로 우리를 때려 눈밭에 내동댕이칠 때, 바로 그 모욕과 박대와 고통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쁘게, 그리고 묵묵히 견디어 낸다면,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네.”
행복은 미래의 어떤 보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가장 비참해 보이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주님의 기도’를 끈기 있게 바칠 때 찾아오시는 ‘성령’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고, 빵을 청하는 친구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이고, 그러면 성령을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미래에 내가 이뤄낼 무언가에 둘 때 사라집니다. 우리 안의 자아는 지금의 행복보다는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뱀은 하와에게 지금을 즐기지 말고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강해지는 것에서 행복을 추구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저 역시 어릴 적부터 ‘행복’을 갈망했습니다. 할머니의 죽음이 제 삶의 첫 기억이었기에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고, 잠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날 하루 친구들과 정말 행복하게 놀았기 때문입니다. ‘아, 행복하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구나.’ 저는 막연한 공포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 행복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행복의 조건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예쁜 짝꿍과 앉는 것, 커서는 좋은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세상에서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일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했습니다. 애인이 있으면 잃을까 불안했고, 돈이 많아도 예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어디를 가든 저보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마치 산의 정상에 오르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고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정상만 바라보고 가면 도달해도 허무하기만 하지만, 더 큰 피해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에게 오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무엇을 ‘소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행복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가능합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좋은 일을 한다는 양심의 평화와 하느님께 사랑받는 느낌. 저도 이것을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때 “나는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지옥과 같이 느껴졌던 신학교가 천국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내가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데 힘이 들지 말라고 주시는 사랑의 에너지입니다. 그것 때문에 항상 주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의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는 뱀을 이기려면 지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가장 완전한 그릇은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도록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 마음은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동기화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느낍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래서 성령을 부르는 청원 기도입니다. 꾸준히 바치되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나의 이성과 마음이 주님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성과 마음에 합치된다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바로 지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어떤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날짜를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에 맞추어 볼 때, 개인적 사정만으로 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어.”
교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분이실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교수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학생이 문제지, 교수님에게 문제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왜 하느님을 나쁜 분, 매정한 분으로 만들고, 또 하느님의 활동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주님, 제 사업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이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주님,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 그러니 제가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느님이 좋은 분이실까요? 형평성에 맞지 않는 청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이 되지 않습니다. 또 기도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지요. 누구와 대화할 때 계속 부탁만 한다면 친해질까요? 아닙니다. 더 거리감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상대의 말을 잘 들을 때 더 가깝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의 말을 듣고,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들고 그래서 삶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는 과연 바른 기도였을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라고 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도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청원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청원이 먼저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원은 어떨까요? 자기 영광이 먼저였고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우리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인간이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훨씬 더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우리에게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에 걸맞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른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차라리 밑 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지만, 코 밑에 가로놓인 입은 막기 어렵다 (명심보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무언가를 청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시작되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신뢰하는 자녀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그분의 나라가 오기를 비는 하느님 중심의 간구로 시작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즉각 응답받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인내와 지속적인 태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의 신뢰의 대화이며 그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다가가는 여정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 안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믿음의 훈련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손 내밂이며 그분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손을 내미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그분께 나아가 믿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기도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루카복음 1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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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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