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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25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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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게 하셨으니 그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며 하느님의 보호로 교회를 지켜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25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2코린 4,7-15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20,20-28
오늘 복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5일
최재관 암브로시오 신부

 

✚ 성 야고보 사도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09: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어머니를 통하여 앞으로 올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태오 복음서 16장에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고 그들의 바람은 메시아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너무나 세속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 “종”(마태 20,26.27)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당신께서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0,28)라는 말씀으로 메시아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더욱이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수난의 뜻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시는 모습은 나중에 실현될 무엇이 아니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이제 곧 그 수난이 시작될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바로 앞에 있습니다.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분 곁에서 그분을 지켜보고 느끼고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분을 모르니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호통치시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가까이”(20,25) 부르시고 부드럽게 타이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으로서 계시기에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들 수준에 맞추어 온화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신의 죽음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과 수난의 정화와 담금질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질그릇과 잔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질그릇과 잔은 공통점이 있지요. 무엇을 담는 그릇, 용기라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잔이 마실 것을 담고 그릇은 음식을 담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와 예수님 모두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바꿉니다. 우리 인간이 또는 우리 마음이 무엇을 담는 존재라는 뜻으로.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담는 존재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 안에 무엇을 담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담는 좋은 그릇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을 담는 나쁜 그릇일 수도 있습니다. 성혈을 담는 성작이 될 수도 있고 술을 담는 술잔이 될 수 있으며 술잔이라도 축제 때 마시는 축배의 잔이 될 수도 있고 고통과 좌절의 때에 마시는 수난의 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담는 사랑의 그릇과 욕심을 담는 욕심의 그릇 말입니다. 사랑의 그릇은 사랑을 원하여 사랑을 담습니다. 반면에 욕심의 그릇은 사랑보다 다른 것을 원하여 그것을 담거나 사랑을 원하더라도 사랑을 소유하려다 미움이나 악감정을 담으며 결국은 소유하려던 것도 죽고 자신도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어제는 걸으면서 길가에 핀 많은 꽃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만일 사랑의 그릇이라면 꽃을 사랑하기에 꽃을 마음에 담지만 욕심의 그릇이라며 꽃을 탐내기에 꽃을 꺾어 화병에 담거나 꺾지 않더라도 화분에 담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보물을 담는 질그릇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런데 보물이란 무엇이고 질그릇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보물이란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은총이고 질그릇이란 그릇은 그릇이로되 보물을 담기에는 초라하고 무엇보다도 잃지 않고 간직하기에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 그릇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하다가 쉽게 다른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다가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호감 면에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랑한다고 해야 할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꽃을 사랑하면 꽃에 물을 주지만 좋아하면 꽃을 꺾어 자기 화병에 꽂아 결국에는 죽게 만들 듯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려다가 오히려 잃게 됩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오해한 거였고 실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사랑한 거였습니다. 그러나 오해가 이해로 바뀌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의 배반으로 자기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었으며 반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진정 사랑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사랑케 되었습니다. 수난 전의 사랑과 수난 후의 사랑은 이렇게 다른 법입니다. 고통과 수난으로 정화되지 않고 담금질되지 않으면 사랑은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했습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와 아들들의 열망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곧 ‘진정 청해야 할 바’가 무엇이고, ‘진정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 ‘무엇을 먼저’ 행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이는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이요, ‘진정한 으뜸인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진정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내 아내를 왕비로 대하고, 내가 왕비처럼 살고 싶다면 내 남편을 임금으로 받들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성인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여기고, 내가 예수님이 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예수님으로 바라볼 일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자신도 그렇게 무시당하게 되고, 남을 존중하면 그만큼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을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면, 필시 그도 나에게 억울함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뻔하고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살지를 못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며,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 가버릴 그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김’의 본질은 자신을 낮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고, 상대에 대한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들어 올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높이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섬기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20,23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주님!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피워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과 동행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복음은 그를 ‘천둥의 아들’이라 부를 만큼 불같고 다혈질적인 인물로 소개합니다.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마을을 향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는 자신을 고발하여 죽음으로 이끈 이에게 “평화가 그대와 함께하기를”이라 말하며 입을 맞추고 순교했습니다. 하늘의 불을 부르던 ‘분노의 사람’이, 자신을 죽이는 이를 용서하는 ‘평화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는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종종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처와 불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스승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답을 얻었습니다. 르완다 대학살의 생존자 이마퀼레 일리바기자의 체험은 이 여정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첫째, 야고보는 죽음마저 이기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죽어서 곡소리가 진동하던 야이로의 집에서 “아이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소녀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체험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해답이 되었습니다. 이마퀼레 역시 7명의 여성과 함께 좁은 화장실에 숨어 91일을 보냈습니다.  

밖에서는 가족을 죽인 학살자들이 자신을 찾아다녔고, 그녀 안에서는 ‘독을 품은 뱀과 같은 증오심’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녀는 기도하며 깨달았습니다. 육신은 저들의 손에 달려있어도, 영혼은 오직 하느님께 달려있음을 말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하느님을 유일한 보호자로 받아들인 순간, 그녀는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야고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타보르산에서 눈부시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뵈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목격했습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명마저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과 함께라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마퀼레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기도 구절을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 구절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았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너는 나의 용서를 원하면서 왜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느냐?”는 하느님의 시선을 체험하고, 마침내 살인자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합니다.  

심판은 나의 몫이 아니라,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몫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분노는 두려움에서 오고, 두려움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라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십니다. 

첫째로, 그분은 죽은 이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과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로,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실 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앞에서 분노하며 심판자가 되려 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셨듯,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영원한 중재자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홀로 버려지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두려움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그 자리에 하느님의 자비가 채워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움 대신 용서를, 분노 대신 평화를 선택하는 **‘평화의 사도’**로 변화되어 갑니다.  

진짜 기적은 홍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미움을 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두려움을 넘어 평화를 이루는 복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대(大) 미사 때 분향합니다. 어디를 향해 분향할까요? 먼저 제대에 합니다. 제대는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제물인 그리스도와 연결된 그리스도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제대가 곧 그리스도이기에 분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에게도 분향합니다. 왜냐하면 미사 중에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디에 분향할까요? 맞습니다. 신자들에게도 분향합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신비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분향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분향 받으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거룩하기 때문에 분향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거룩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나눠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분향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면서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입니다. 당연히 분향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사도 야고보와 요한으로,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입니다. 그런데 청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도록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은 왕의 옥좌 곁을 의미하며, 가장 큰 권세와 영광의 자리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거룩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라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거룩한 상태이기에 계속 그 거룩한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의 길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세상에서 보여주는 부귀영화가 아닌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함께하는 어려운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이 길은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함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영광을 원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섬김을 실천하는 삶입니까?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나눠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멈춰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모든 경험을 통해 강인함, 용기, 자신감을 얻는다. ‘이런 공포를 이겨냈으니, 다음에 오는 것도 문제없어’라고 스스로 되뇔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라 (엘리노어 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고통의 잔을 마심으로써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권력과 영광의 자리를 청했지만 예수님은 그 요청을 넘어서 권위의 이면에 있는 십자가의 섬김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잔을 마신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권력 행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과 비움의 상징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처음에는 영광의 자리를 구했지만 결국에는 예수님의 잔을 마신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는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위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부유한 자들의 오만함을 비판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평등과 겸손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삶은 말과 행동 믿음과 실천이 하나로 이어진 지행합일의 여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마신 그 잔을 사랑으로 마실 수 있는 용기 있는 제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신앙은 실천이며 낮아짐 속에서 피어나는 은총입니다. 

 

 

 

마태오복음 20장 23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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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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