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하라 하셨으니 그의 전구로 저희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광 속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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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아가 3,1-4ㄴ)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오늘 복음
(요한 20,1-2.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아가 3,1-4ㄴ
오늘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요한 20,1-2.11-18
오늘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22일
박준현 루카 신부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9:34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기다림 뒤에 오는 만남
오늘 복음은 주님을 애타게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을 전합니다. 우리가 누구 또는 무엇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내’ 동생, ‘내’ 물건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주님에 대한 막달레나의 깊은 사랑과 간절함은 ‘저의’ 주님이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납니다. 오늘 독서도 그러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처럼 마음이 오직 주님께만 향한다 해도 그분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복음에서도 주인공들은 애를 태우고 태우다 사랑하는 이를 겨우 만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당신을 바로 보이시지 않고 뒤에서 한참 지켜보시다가, 질문도 하시고 답변도 들으시고 나서야 드러내 보이셨을까요?
그레고리오 성인은 “거룩한 욕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진다.”라고 말하면서 마리아의 열망이 더욱더 커지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러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이 한층 더 크게 불타오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을 체험하는 행복 속에 있다가도, 그분을 느끼지 못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게을러서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우리의 탓일 때도, 이는 우리가 잘못을 알아차리고 고치게 하시는 그분의 교육 방법입니다.
그런데 충실히 기도해도 그분의 부재를 느낀다면, 우리는 이 부재 체험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더 불태우게 하는 그분의 배려라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를 만나 주실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 뒤에 오는 만남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녀의 무엇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무엇이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했을까요? 주님께선 당신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은총을 왜 마리아에게 주셨을까요?
열두 사도가 있었고 열두 사도 가운데서도 주님의 중요한 순간들 그러니까 죽은 소녀를 되살리실 때, 거룩한 변모의 때,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실 때 그것을 보고 증거 하라고 동반하신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건만 왜 그들이 아닌 마리아에게 당신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은총을 주신 걸까요?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그 은총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먼저 빈 무덤을 봤을 때 열두 사도에게도 알렸고, 그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은 와서 빈 무덤을 보게 하였잖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도들은 아예 보러 오지도 않았고, 세 사도도 빈 무덤만 확인하고 찾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죽었다고 아예 관심을 꺼버렸고, 세 사도는 시신이 없어져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옛날 군대 친구는 한겨울 자기 친구가 죽어 장례 치르고 온 날 밤 따듯한 아랫목 이불에 발을 넣고 있을 때, 그 추운 겨울 땅속에 자기 친구 혼자 있으니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생각하니 자기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친구와 같이 있어 주려고 그 길로 그 밤에 공동묘지에 있는 친구 무덤을 찾아갔답니다.
처음 한동안은 너무 추워서 떨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안에서 따듯한 것이 올라오고, 군대에서 보초 설 때 무척 추었던 생각이 나더랍니다.
군대는 억지로 끌려갔기에 그 추위가 그렇게 추었는데 무덤은 스스로 사랑 때문에 갔기에 그 추위가 그리 춥지 않음을 깨닫고 그는 그때 사랑을, 고통마저 사랑을 더 뜨겁게 만드는 찐사랑을 발견했답니다. 그 친구가 깨닫고 얻게 된 그 찐사랑을 우리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바로 Passio(수난의 사랑)일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수난이 사랑을 포기하게 했고 그래서 부활의 체험으로 넘어가게 하지 못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수난이 그 안에서 더 큰 사랑을 불타게 했고, 그래서 그는 찾아 헤맸고, 찾아 헤맸기에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나게 했던 겁니다.
일곱 마귀에게서 자기를 구해주신 주님 사랑의 알 불이 그녀 안에 살아 있다가 수난을 거치며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게 되었던 것이고, 찾아 헤매게 했던 것이고 마침내 만나게 했던 것입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라는 아가의 말씀대로 밤새도록 찾아다니는 사랑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보고 자극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부터 포르치운쿨라 축일까지 매년 하는 행진을 합니다. 올해는 진도에서부터 장성까지 재속프란치스코회 광주 지구와 함께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새 강론을 올리지 않고 전의 강론 중에서 하나 올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행진 끝나고도 올 가을에 있을 온라인 신학원 강의 준비 때문에 새 강론을 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이 기회에 제가 할 가을 강의를 소개해드립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제 신앙 생활에서 제일 중요하게 치는 것이 미사이고, 그 믿음으로 지금까지 사제 생활을 했으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40년 제가 미사 드리며 저를 살게 하고 지탱하게 했던 그 미사의 은총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초대합니다. 강의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기도로 함께해주시고 강의 때 많이 만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으로 만지라.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뵌 분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전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리켜 ‘사도 중의 사도’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활동을 사도적 수준으로 재평가한 것으로, 이러한 관점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수의 동등한 제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사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 선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들의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이시다.’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이렇게 사도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이는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바로 ‘제자들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증언하는 진리요, 부활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곧 우리가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우리가 아빠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요한 20,14). 그런데 “마리아야!”(요한 20,16)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생각과 편견에 빠져있던 마리아를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씀은 더 이상은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르는 낮선 분’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15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주님!
제 이름을 부르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저를 먼저 찾으시니,
진정 제가 당신의 사람입니다.
제 눈동자 안에
당신 얼굴을 새기시고
제 가슴에 당신 사랑의
불을 지피소서.
제 입술에
당신 말씀을 담아 주시고
제가 당신 사랑을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열정은 있는데, 스승이 없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텅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삶의 모든 의미를 걸었던 스승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그가 자신의 이름,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 순간, 그녀의 세상은 다시 창조됩니다. 그녀는 뒤돌아서서 외칩니다. “라뿌니!”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따를 유일한 분을 다시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존재의 외침입니다.
이 “라뿌니!”라는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내 삶에서 진정 누구를 스승으로 찾고 있는가? 그리고 그 스승을 찾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어쩌면 내가 간절히 찾는 스승의 모습이야말로, 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일지 모릅니다.
드라마 ‘미생(未生)’의 주인공 장그래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평생을 바둑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바둑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어.”
“틀에 박힌 사고로는 더 나아갈 수 없어. 틀을 깨야 해.”
또 바둑에서 졌다고 세상에서 진 것은 아니라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장그래는 바둑이라는 세상에 ‘열심’이었기에, 그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아무 연고도 없이 냉혹한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던져집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생’, 즉 아직 온전히 살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그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스승이 절실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오상식 과장입니다.
오상식 과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때로는 무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그래에게 단순히 업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장그래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일에만 집중하려고 할 때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혼자라고 느낄 때는 ‘우리’라는 소속감을 알려주었습니다. 장그래는 그를 통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세상의 파도를 함께 넘어갈 힘을 얻습니다. 장그래가 그토록 간절히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기에, 오상식 과장이라는 스승을 알아보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삶에 열심인 사람은 스승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스승을 찾는 사람은, 결국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막달레나가 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줍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정말 ‘열심’이라면, 우리는 스승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말에 한 시간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넘어, 내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관계, 모든 선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을 묻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게는 오상식 과장보다 더 근본적인 스승이, 바둑 스승보다 더 궁극적인 길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분을 ‘라뿌니’로 모셨던 것은 아닙니다. 삶의 스승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곁에서 함께 걸으며 말씀을 풀어주셨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그분을 ‘나의 스승님’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언제 그들의 눈이 뜨였습니까? 식탁에 앉아,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아, 이분이 우리의 스승님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예수님에 ‘관하여’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스승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이어지려면, 내 삶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 장그래가 상사에게서 삶의 지혜를 구했듯, 우리도 예수님께 내 삶의 길을 묻고 그분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여우 중 한 마리가 ‘나의 여우’가 되고, 수많은 소년 중 한 명이 ‘나의 어린 왕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살고 싶은 열정은 스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역사 속 수많은 위인 중 한 분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스승님’이십니까? 그분을 ‘나의 스승님’으로 길들이는 열심, 곧 그분의 말씀에 내 삶을 비추고,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쓰는 열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삶에 열정이 있는데, 어떻게 삶의 스승인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수 있을까요? 잘 살고 싶다는 열정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이 갑자기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만큼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그분을 부를 것입니다.
“라뿌니! 나의 스승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신부가 되고 첫 본당의 보좌 신부로 발령을 받아 갔을 때, 어느 신자분께서 화초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화초를 키워 보았습니다. 정성이 필요했고 또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매일 물을 주고, 잎사귀도 닦아주면서 정성을 기울여 키웠습니다.
어느 날, 이파리 끝이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꽤 많은 이파리의 끝이 말라 있는 것입니다. 나름 정성을 기울여 키웠기에 항상 푸르름을 간직할 줄 알았는데,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걱정돼서 이 화초를 주신 분에게 여쭈어보았습니다. 이분께서는 제게 곧바로 되물으셨습니다.
“신부님, 새잎이 나고 있지 않아요?”
새잎이 나기도 하지만, 말라 있는 이파리 끝이 너무 많다고 혹시 병에 걸린 것은 아니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괜찮다는 것입니다. 생기를 잃고, 시든 잎이 있어도, 새잎이 난다는 것은 성장 과정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화초는 걱정과 달리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자랐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생기를 잃고, 시든 잎처럼 비실거릴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의 상황,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새잎과 같은 희망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희망으로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태가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라는 희망을 간직하면 괜찮습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지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생기를 잃고, 시든 잎처럼 비실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새벽 어둠을 무릅쓰고 무덤에 갈 정도로 예수님께 사랑이 컸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자 그 충격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아도 그 사랑하는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때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며 “라뿌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순간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희망 안에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눈물 속에서 좌절과 절망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 희망 안에서 힘찬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매일이 일 년 중 최고의 날임을 가슴속에 새겨 두세요 (랄프 오라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긴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주님 사랑을 만납니다. 주님 사랑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습니다. 신앙은 좋은 날만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닌 충실함입니다. 이 충실함은 과거의 습관이나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여정입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존재와 소명을 발견합니다. 모든 상실은 소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도들은 흩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십자가 곁과 무덤 곁에 머무는 충실함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아픔 속에도 사랑으로 머무는 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은 붙잡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증언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오늘의 삶 안에서 기쁨과 희망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새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기쁨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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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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