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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7/1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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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7월 1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7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11,10─12,14)
    저녁 어스름에 새끼 양을 잡아라.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 오늘 복음
    (마태 12,1-8)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탈출 11,10─12,14
오늘 제1독서

저녁 어스름에 새끼 양을 잡아라.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 무렵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12,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9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2,1-8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7월 18일
박성경 시몬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2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랑이다.

오늘 독서는 파스카에 대하여 전합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페사흐’라는 히브리 말을 칠십인역 성경에서 그리스 말 ‘파스카’로 음역하였고, 신약 성경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페사흐’는 ‘거르고 지나가다.’라고 번역된 동사와(탈출 12,13 참조) 같은 어근을 지닌 명사입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땅을 지나시면서 이집트의 맏배를 모조리 치시고 모든 이집트 신들을 처벌하셨지만, 피가 발린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거르고 지나가셨음’을 기념하는 것이 파스카 축제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 해방과 기쁨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12,11)라고 말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축제일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당신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시는 하느님,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으로 여기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자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잘 지키느냐 않느냐에 관심을 두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두시고 그들을 살리시는 데 마음을 두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자비이며 안식일과 모든 법의 참된 정신임을 바리사이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어제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마태오복음이 복음을 이렇게 배치하는 것이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고 시비를 거는 데 비해 주님께서는 이것이 안식일의 주인인 사람에게서 안식을 뺏어가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빼앗은 안식을 그 주인인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가 계명 또는 계율을 가지고 인간을 얼마나 역사적으로 비인간화했고 지금도 비인간화하는지 돌아보고 반성하게 합니다. 법을 가지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법을 가지고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당시 바리사이들도 안식일 법을 가지고 인간을 안식일의 죄인으로 만들고 안식일 법을 가지고 안식일의 주인인 인간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듭니다. 안식일에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안식일 법에 매여 안식일에 옴짝달싹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인간이 안식일에 매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안식일의 노예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하신 것은 우리 인간을 죄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해주시는 것이었고, 안식일의 노예에서 해방민이 되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방하여 주시는 주님 사랑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해방하여 주시는데도 계속 다시 노예가 되겠다고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진정 자유인이 되고 해방민이 되는 것이 사랑받은 자의 도리가 아닙니까?  

바리사이들이 씌운 죄인이라는 굴레를 주님께서 일껏 벗겨 주셨는데 자유를 방종하게 사용하여 우리 스스로 죄의 굴레를 다시 쓰면 되겠습니까?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라고 자유를 주셨는데 여전히 일의 노예요 돈의 노예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까? 왜 일과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다 그놈의 욕심 때문이 아닙니까?  

일을 사랑하지 말고 삶을 사랑합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합시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삶을 사랑하여 일에는 성실하되 돈은 욕심 부리지 않아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그래서 행복한 우리의 삶이 되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안식일을 세우신 이유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이 일을 트집 잡은 것은 남의 밭의 이삭을 뜯어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렇다면, 대체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탈출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 참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야훼께서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나 주님이 너희를 성별하는 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징이다.”(탈출 31,13) 

이는 ‘안식일을 새운 이유’와 ‘안식일의 정신’이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이처럼, 우주 만물의 주권이 그분께 있음을 알기에,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쉬는 것인가? 곧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 말합니다. 

“~이렛 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병행 본문인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런 까닭에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정작 형제에게는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 자신이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2,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인 까닭입니다.

희생제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바로 당신께 바치는 
제물이오니 

저 자신이 흠 없는 제물, 
사랑의 제물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그늘이 되어주면 그늘도 내 편이 되어줍니다.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십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을 두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며 무섭게 따져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굳은 마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안식일은 분명 ‘쉼’, 곧 안식을 위한 날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안식일에는 쉼이 없습니다. 사랑도, 자비도 없이 오직 차가운 규정과 판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자비가 없는 곳에는 참된 안식도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진정으로 쉬게 하는 안식일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안식은 무자비할 때 잃습니다. 자기를 무자비에 맡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인류의 비극은 자비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카인의 이야기입니다. 아우 아벨을 향한 시기심에 눈이 먼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 무자비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그 벌은 감옥이나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2)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함의 첫 번째 열매는 바로 ‘안식의 상실’입니다. 

이 비극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아기 예수님 시대의 헤로데 대왕을 보십시오. 그는 로마의 인정을 받아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웅장한 건축물들을 세운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하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헤로데가 자신의 왕좌를 위협할 수 있다는 망상적 두려움 때문에 사랑했던 아내 마리암네와 자신의 세 아들마저 서슴없이 처형했다고 기록합니다.  

내가 무자비하면 나 자신을 무자비에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언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 그 자체입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늘 남을 해치고 빼앗는 사람은,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둠이 빛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무자비한 마음은 자비가 머물 공간이 없습니다. 나를 안식일의 주인인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18세기 말, 조선의 가장 척박한 땅이었던 제주에는 김만덕이라는 비범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기생이 되었으나, 20대에 관아에 끈질기게 호소하여 양인 신분을 되찾은 뒤 포구에서 객주를 운영하며 제주 제일의 거상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성실함과 지혜는 큰 재산을 모으게 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부(富)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1794년(정조 18년), 제주 섬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극심한 흉년이 휩쓴 데다, 가을에는 거센 태풍이 섬을 강타하여 남은 곡식마저 바닷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마저 풍랑으로 대부분 유실되자, 섬 전체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거대한 절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김만덕은 평생을 바쳐 이룬 자신의 전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녀는 사재를 털어 육지에서 쌀 500여 석(오늘날 가치로 환산 시 수십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사들여와, 굶주림에 쓰러져가던 백성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그녀는 죽어가던 제주 백성들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따뜻하고 너른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소식은 한양의 정조 임금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어질게 다스리고자 했던 정조에게, 신분과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룩한 자비를 베푼 한 여성의 의로운 행위는 깊은 감동과 함께, 자신이 꿈꾸던 왕도(王道) 정치를 실현할 소중한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정조는 김만덕을 한양으로 불러 직접 치하하고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정조는 김만덕을 위해 또 다른 '그늘'이 되어줍니다. 당시 제주도민, 특히 여성은 국법으로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김만덕의 위대한 자비를 기리기 위해 기꺼이 그 법을 넘어서는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김만덕을 ‘의로운 여인’이라는 뜻의 ‘의녀(義女)’로 칭하며 내의원 의녀들과 함께 궁궐을 출입하는 최고의 영예를 주었고,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때 김만덕은 재물이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소원의 지극함은 오직 한 가지, 한양에 올라와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입니다.” 

한평생 섬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인에게 금강산 유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정조는 그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왕의 세심한 배려 속에서 김만덕은 조선 팔도를 여행하며 꿈에 그리던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눈에 담는, 일생일대의 기쁨과 평화, 즉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김만덕과 정조의 이야기는 자비와 안식의 아름다운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김만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 위기에 처한 백성에게 생명의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라의 임금이 그녀의 편이 되어, 사회적 제약이라는 견고한 벽을 허무는 특별한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김만덕이 베푼 자비는 그녀 자신에게 가장 큰 꿈의 성취라는 안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의 군인이었던 투르의 성 마르티노는 혹한에 떨고 있는 걸인을 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군 외투를 칼로 잘라 덮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꿈에서 자신이 덮어준 그 외투를 입고 있는 예수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네가 아직 예비 신자이지만, 이 옷으로 나를 입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의 영혼은 한 번 체험한 주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세상이 주는 어떤 명예나 권력보다 더 큰 평화와 안식을 평생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안식, 이 두 가지 믿음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빼앗고 빼앗기는 무자비한 곳이다’라는 카인의 믿음, 혹은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로 채워져 있고, 나 또한 그 자비 안에 살아간다’라는 마르티노의 믿음. 이 두 믿음은 한 영혼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처럼, 자비와 무자비가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줄 마음이 있다면, 그 그늘이 나의 편이 되어줍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랑에 대해 우리는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지구를 사랑하십니까? 지구 없이 나의 존재 역시 불가능하기에 당연히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끼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아끼고 소중하면서 가능해집니다. 만약 그 대상을 전혀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고 그래서 공허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환경 문제로 지구가 앓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지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모습이 참 많습니다. 일회용품을 남용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과잉으로 버리고 있으며, 무분별한 소비와 과잉 포장 역시 환경 부담이 커지는 요인이 됩니다. 무엇보다 환경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모습, 함께 돌보아야 할 집이라는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 등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바라봅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라면, 당연히 하느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에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의 바람을 채워주는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문제 삼습니다. 율법에서 안식일은 노동이 금지된 날인데, 이삭을 뜯는 행위를 일종의 ‘수확’으로 간주했던 것이지요.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 철저히 지키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빼놓고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있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안식일 준수보다 더 중요한 가치인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형식만 지키고 있을 뿐, 자비와 사랑의 정신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진짜일까요? 거짓일까요? 그들은 진짜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형식적인 사랑일 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만드는 가짜 하느님에게만 메어있게 됩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향해 진짜 사랑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이 지구도 또 나의 이웃도 열심히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너에게 있어 가장 불편한 시기는 너 자신을 가장 많이 배우는 시기이다 (메리 루이즈 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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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마태오복음 1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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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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